지슬 2

냉이로그 2014. 4. 13. 10:46



지슬 1.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주말. 또 언제 주어질지 모르는 시간. 포장도 열지 않은 채 한쪽에 밀어두었던 택배 상자를 열었다. 몇 권의 책, 그 가운데 수묵 그림이 있는 <<지슬>>이라는 제목의 책. 다운받아놓기만 하고 여태 보지 못한 영화, 그 영화를 수묵의 그림들로 종이에 담아낸 것이다. 출판사에서는 '그래픽노블'이라는 요상한 외래어를 붙였던데, 그럴 것 없이 그냥 만화책이라 하면 될 것이다. 아주 묵직하고, 울림이 긴 만화책. 
 





 그리하여 영화보다 만화로 먼저 지슬을 보았다. 몸을 피할 수 있는 굴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 그 굴 안에서 지내는 시간들, 집에 남아있는 늙은 어멍과 미처 피난 길에 함께 오르지 못한 순덕이, 빨갱이 트라우마에 악귀가 되어버린 토벌대, 징집되어 왔건만 괴로워하는 토벌대의 앳된 병사 ……. 늙은 어멍은 산으로 몸을 피하는 아들 내외에게 지슬을 싸주고, 홀로 집을 지키며 토벌대가 들이닥쳐도 지슬을 내놓는다. 그렇게 쫓는 자들과 남아있는 자, 몸을 피해 떠나간 자들을 이어주는 마지막 그것. 
  
 만화는 원작 영화를 얼마나 그대로 따른 것인지, 아직은 영화를 보지 않았으니 나로서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왠지 굴을 찾아 숨어드는 사람들, 그 굴 속에서의 시간들, 그리고 끝내 그 굴 안으로 매운 연기를 피워대는 장면들을 보면서, 지난 주에 찾아갔던 다랑쉬굴이 계속 오버랩하는 듯 했다. 마지막 그림까지 다 보고 난 뒤, 작가가 쓴 후기를 읽으니, 어쩌면 내가 가진 그 느낌이 전혀 아닌 게 아니었겠구나 싶기도 해. 김금숙 작가는 이 작업을 위해 제주에 내려오면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이 다랑쉬굴이었고, 그 현장의 기억을 깊이 가지고 있는 듯 했다.
 
 언제나 그러하지만, 학살의 기억은 죽어간 목숨이 몇 명이었는지를 셈하는 따위로는 그 무엇도 길어올릴 수가 없다. 순덕이가. 만철이가, 그리고 무동 아재와 무동 아재의 어멍이. 꽃다웠고, 순한 짐승 같았던 그이들이 그렇게 짓밟히고 스러져갔다. 

 






지슬 2.


 제주 말로 감자를 뜻한다는 지슬, 이라는 말은 훗날 우리 감자가 햇볕을 보고 나올 때, 세상의 이름으로 부르려고 지어놓은 거기도 하다. 지난 여름 강정평화상단에서 제주 감자
, 지슬을 주문해 받으면서, 달래도 행복한 얼굴로 좋아하였다. 이미 그때도 잠깐 찾아온 뱃속 아기를 감자, 라 부르고 있던 터. 게다가 국어사전에 들어가보니 제주 말로 감자라는 뜻을 가졌을 뿐 아니라 지혜롭고 슬기롭다, 하는 뜻을 갖기도 한다니, 그 또한 반가웠더랬다. 물론 그때 찾아주었던 감자는 아직 준비가 덜 되었는지, 엄마아빠에게 얼굴도 보여주지 않고 돌아갔지만, 그때부터 우리에게 아기 이름은 지슬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찾아준 아기에게도 다시 감자라 부르며, 지슬이로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어.




 그런데 이 섬에 내려와서 한 가지를 더 알게 되어. 제주 토박이인 현부장님이 일러주기를 감자를 뜻하는 제주 말, 지슬이 애초에는 땅 지(地)에 열매 실(實)을 써서 지실이라 하던 것을, 지실 지실 하다가 지슬이 되었다는. 아, 땅의 열매라니. 암튼 땅의 열매라는 뜻도 좋고, 지혜와 슬기를 뜻하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좋은 건 감자라는 뜻을 가졌기 때문이다. 제멋대로 둥글기도 하면서 주먹을 닮기도 한, 흙을 묻히고 있는 게 더 어울리는 수더분한 얼굴. 강원도에서 사는 엄마아빠가 감자를 품어, 제주에 와서 만나게 될 아기, 지슬. 

 암튼 뜻도 뜻이지만 지슬이라는 소리만으로도 예쁘고 좋아서, 달래도 나도 이 이름을 찾게 된 것에 기뻐하고 있다. 감자도 마음에 들어하면 좋겠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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