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숭례문 잡부
예를 숭상하는, 남쪽으로 열린 도성의 문과 성곽. 그곳에서 나는 목수도 석공도 아니, 시공사 직원이거나 감독, 감리 파트도 아닌 그야말로 잡부로 일을 했다. 국보 1호에서 잡부로 일을 했으니, 국보급 잡부였다 자부하면서 ㅎ 그 현장에서 문루의 육축과 좌우 성곽, 그리고 박석까지 돌공사를 맡아서 하던 이의상 석장님이 거둬주어 가능했던 일. 지난겨울, 숭례문은 그야말로 혹독한 시련을 맞았다. 어쩌면 육년 전 화마에 휩싸였을 때보다도 더욱 처절하고 비참한 얼굴로 만신창이가 되어.
탈이 적지 않았다. 말은 더욱 무성하여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진단이 옳게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안타깝고 답답할 뿐. 그것이 바로 이 땅에서 문화재를, 옛것이자 우리 것을, 전통이라 말해지는 그것을 인식하고, 수용하고, 바라보는 현재의 수준인 것. 한겨울 세파가 지나는 동안 내가 그곳에서 만나 믿고 의지했던, 앞으로 이 일을 하면서 어떤 지표가 되어주던 선배, 동료들이 경찰과 검찰, 감사원의 조사라는 이름으로 혹독한 시달림을 받았다. 능욕이 있었고, 굴욕을 면치 못했다. 다행일까, 한낱 잡부로 삽질이나 열심히 했던 나에게까지 그 같은 조사가 있지는 않았지만, 그 깊은 골짜기 오두막에 쳐박혀 있는 동안에도 선배이고 동료인 이들이 난도질로 시달리는 소식들이 들려왔다.
바로잡을 것은 물론 바로 잡아야 할 일. 그러나 그 겹겹이 중첩된 구조 속에서 일선에서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해온 이들만을 잡도리한다고, 바로잡을 그것을 제자리로 세워내기란 만무하다. 한 동안은 신문이고 어디고, 심지어는 장삼이사들의 술자리에서조차 손달린 이들은 누구라도 지탄의 손가락을 뻗으며 개탄을 금치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내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그곳에서 함께 일했던 선배, 동료들은 그 누구보다 문화재에 대한 애정을 가졌고, 진정으로 일을 했다는 것이다. 때로는, 이게 아니다 싶은 꼴로 일이 돌아간다 싶을 때, 그이들이야말로 속이 속이 아니었을 것. 제약은 한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산과 시공기간, 가장 쉽게는 그 둘을 꼽곤 하지만, 그것말고도 이 사회 저변에서 문화재를 다루는 것에 대해 바라보거나 요구하는 시선에 배어있는 이중삼중의 잣대. 진행과정에서는 일에 대한 이해나 존중은커녕 최소한의 배려조차 무시되는 때가 다반사이지만, 결과를 놓고 말할 때는 언제나 순도 백퍼센트의 장인정신만을 내놓으라 하는.
그게 어디 숭례문 복구공사에서 뿐이었을까. 이땅 곳곳에서, 지금도 이뤄지고 있는 크고작은 문화재보수의 현장들, 그래서 문화재 일에 애정을 가진 이들일수록 오히려 이 일에 대한 자괴감이 커져만 가는 딜레마에 젖게 된다. 그러고는 지친 몸으로 자조하게 되어. 문화재보수를 하면 할수록 문화재를 훼손하게 되는 것만 같은, 그 자괴감.
2. 숭례문 판타지
점심시간, 정부장님이 만장굴 주차장으로 찾아왔다. 숭례문 복구현장에서 감리단으로 일을 하던 선배. 제주에 내려온지는 벌써 닷새가 되었다는데, 소식을 듣고 이제야 약속을 하고, 현장으로 찾아오게 되어. 이곳 현장의 개박살은 여전히 현장 진행형인지라, 지금 같아서는 점심시간이라고, 그 시간 개인 시간을 만들기도 어려운 상황이긴 하지만, 현부장님께 부탁하여, 딱 점심시간만이라도 시간을 배려받았다. 그러고는 정부장님과 김녕 바닷가로. 술을 잘 하지 못해, 남대문 골목 술자리에서도 술잔을 마다하실 때 많았지만, 오늘만큼은 시원하게 한라산을 주거니받거니. 지난겨울, 정부장님과는 따로 연락하지는 못했지만, 다른 동료들을 통해, 몹시도 시달림을 받으며 고생했다는 소식은 들어알고 있었다. 아마 그래서였을까, 그래서 가족이나 친구들 없이 혼자, 돌아갈 비행기표도 끊어두지 않은 채 이 섬으로 가슴을 씻으러 내려온 걸까.
그동안 힘들었던 거에 대한 얘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반가움만을 나누며, 곧 첫 휴가를 받아나올 아이에 대한 얘기며, 청바지와 빨간 잠바에 대한 얘기며, 바다의 물빛과 햇볕에 대한 이야기만으로도 시간은 금세 다 지났다. 여태 혼자 다니고만 있는지라, 사진이라고는 풍경밖에 없다기에, 전화기를 건네 받아 사진을 찍어주고, 그 바다 앞에서는 인물에 상관없이 찍는대로 화보가 되는 거라, 서로 전화기를 바꿔가며 어린애들처럼 사진찍기 놀이를 하며 즐거운 짬을 보내.
숭례문에서 잡부로 일을 할 수 있던 건, 나로서는 이쪽 일에 발을 딛으며, 가장 큰 행운이었다. 물론 그 어마거대한 중요 현장에서, 살아있는 문화재로 지정받은 장인 어르신들을 가까이에서 뵌 것도 어쩜 다시 올 수 없는 기회였겠지만, 그런 것을 다 떠나 가장 소중한 건, 그 현장에서 마음을 나누며 기댈 수 있게 된 동년배의 그이들. 종남이 형부터 소연이까지, 손가락으로 꼽기에 모자랄, 눈에 밟히는 얼굴들. 앞으로 이 일판에서 일을 해나가면서, 언제나 의지를 하게 되고, 기준을 묻게 되고, 지표가 되어줄 그이들. 지금은 저마다 북경에서, 대전에서, 익산과 광주, 그리고 서울 도처에서, 그리고 또 어떤 애는 제주 섬의 동굴 지표 위에서, 한 데 모이기 어려운 자리로 멀어져 지내고 있어. 그러던 중, 정부장님이 다녀가면서, 단 둘이 소줏잔을 나누었을 뿐이었지만, 이내 우리가 앉은 자리로 그 얼굴들이 하나둘씩 찾아들어, 남대문 앞 여느 술자리에서처럼 왁자떠들썩한 분위기가 되어버리는 판타지에 젖어들어들기도 해.
숭례문 현장에서 일을 했던 시간은, 내가 앞으로도 일을 해가는 동안 가장 소중한 거름이 될 것이다. 나는 자랑스러운 숭례문 잡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