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녁

냉이로그 2014. 3. 8. 23:12


1. 


 탐라에 들어와 보름. 짐을 풀고, 살 곳을 준비하자마자 바로 일을 나가야 했다. 준비할 시간을 갖겠다고 부러 열흘을 먼저 들어온 거였는데, 현장 사정이 급해 그럴 여유를 가질 수가 없었어. 그러고는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거문오름이 만들어낸 용암계 동굴의 현장을 따라 날마다 중산간을 오르내리는. 

 피네 아저씨 소개로 들이네 식구를 알게 되었다. 맑은 영혼을 지닌 따스한 사람들. 그 이웃네 덕에 예쁜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가 있어. 대문간엔 정낭이 걸려 있고, 돌담을 두른 마당에는 귤나무들이 서 있는, 제주를 꼭 닮은 시골집. 들이네 식구는 이 집을 얻어줄 뿐 아니라, 이 낯선 곳에서 살아갈 준비를 알뜰히도 챙겨주었다. 그리고 수니 언니, 익이 형님과 얼굴을 마주하던 놀라운 그 저녁까지도. 그렇게 섬살이를 시작하면서 안덕의 돌돌이 누이를 만났고, 육지에서 내려온 첫 손님으로 병수 아저씨 부부가 다녀갔고, 두 해 전 이 섬에서 터를 잡기 시작한 또치 언니가 반찬까지 챙겨 다녀가 주었다. 그리고 곽지 바닷가의 모퉁이 식당에서 만난 다와씨와 왈라씨까지. 막막할 것이 무엇보다 가장 걱정이었지만, 섬에 들어와서도 이처럼 인연들이 이어지고 있어. 제주 방언으로 당신이라는 뜻을 지닌 이녁이라는 말, 여기에 내맘대로 뜻을 보태자면, 그 인연들이 바로 이녁이질 않겠는지.



2.


 그러면서도 가장 마음 한 자리에 내내 걸리고 있던 것은, 아직 강정엘 내려가보지 못하고 있는 것. 섬의 동쪽인 이 보금자리에서 아침을 서둘러 일을 나가면, 섬의 서쪽 중산간의 일터에서 하루를 보낸다. 집에 돌아올 때면 이미 검은 하늘에 별이 총총. 그러다 오늘, 예정에 없이 일이 조금 일찍 마쳤고, 내려오는 길로 제주 시내에 있는 영화예술문화센터라는 곳을 들렀다. 짬짬이 들여다보던 구럼비 까페에 올려져 있던 포스터





 사삼부터 구럼비까지 이 섬에서 살아온 여인 삼대의 생을 모노드라마로 그려낸 공연이라는 소갯말. 섬에 들어오자마자 일을 마치면 이불펴고 자기에만 바빴던 생활이던지라 무언가 숨이라도 쉬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아직 강정으로 걸음 한 번 하지 못하고 있는 어떤 부채감을 그렇게나마 대신하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복잡한 시내의 길을 물어물어 공연장을 찾았다. 

 <이녁>이라는 제목의 작품. 무대에 선 배우는 미량이었다가, 미량의 어멍이었다가, 미량의 할망이 되곤 했다. 아, 그런데 미량이라는 그 이름은 너무도 낯이 익어. 전부터 기찻길에 가거나 하여 큰이모에게 강정 이야기를 전해듣곤 할 때면 언제나 빠지지 않고 기억하게 되던 이름. 그리고 지난 여름 어느  속에서 다시 만나면서 또렷하게 그려지던. 

 이모에게 미량 님 전화번호를 물었다. 이 섬에는 강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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