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

냉이로그 2014. 3. 19. 06:11




 비자림 숲에 들었다. 비자나무가 이렇게 많이 모여 있는 걸로도, 지구 위에서는 여기 말고 찾기가 힘들다는 거. (안내판이나 뭐 그런데는 흔히 '세계 최대의 비자나무 군락지' 라고 써놓고는 있지만, 개인적으로 그런 표현은 마음에 들지가 않아.)  

 제주에 오기 전까지, 나처럼 제주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제주에 대해서는 가본 데도 별로 없고, 들어서 아는 것도 별로 없는데, 여기 이 비자나무 숲이 좋다는 얘기는 벌써 여러 번이나 들었다. 나무의 기운을 느끼고, 물과 바람의 맛을 짐승처럼 잘 아는 병수 아저씨도, 지난 번 제주에 들어왔을 때 비자림부터 찾았다. 그 숲에 들어가 폐부 깊숙히 몸을 씻고 가고 싶다 하면서. 아닌 게 아니라 그래서 이 숲길에는 몸에 병이 들어 자연치유를 하기 위해 와 있는 사람들이 제법 많아. 

 



 
 마침 이 비자나무 숲은, 지금 일하는 곳과 가까운 곳에 있어. 만장굴 현장사무소와 거문오름의 자연유산센터, 그 둘을 뻔질나게 오가면서 매번 숲의 입간판을 지나치고 있었지만, 막상 가볼 짬은 나질 않았다. 아름다운 곳, 가볼 곳이 많다는 제주이건만, 실상은 날마다 일하는 일터 가까운 숲에도 발 들여놓기가 힘들어. 더러 친구들은 제주에 가서 좋겠다고, 좋은 것 많이 보겠다고 부러워도 하고, 축하도 하고, 샘도 내곤 하지만, 그러나 나는 여기에 유람을 하러 온 거가 아니라 노가다를 하러 온 거. 그래도 짬짬이 시간을 내어 곁눈질이라도 하고 다닐 수 있지 않을까 했건만, 짬은 커녕 주말에도 현장으로 불려다니기가 바쁘다. 그러니 날마다 만장굴 현장으로 일을 나오면서도 정작 굴 안에는 한 번도 들어가보지를 못해. 그 좋다는 월정 바다가 지척이지만 그 물빛이 어떤지 아직 보지를 못했다. 






 그러던 중, 현장 사전 조사를 위해 비자림에 올라갔다. 현부장이라고, 요즘 짝궁처럼 다니며 일을 하는 선배가 있는데, 요사이에는 술 한 잔씩 먹게 되거나 할 때마다 내가 좀 칭얼대고 그랬거든. '아니, 후배가 육지에서 내려왔으면은, 여기저기 좋은 데도 데리고 가주고, 구경도 시켜주고 그러지, 이러다가 일 년이 지나도록 한라산 근처에도 한 번 못가보고 끝나겠다, 엉엉엉', '짬이 날 때마다 좋다는 오름에도 데리고 가주고, 말로만 그러지 말고 산굼부리에도 같이 올라가주고, 그래라!' 하면서 왈왈거려. 그랬더니 오늘 비자림에 현장 조사를 나가는 길에, 굳이 나더러 같이 가자 해주었다. 사실 그 현장은 재선충 소나무 벌목을 하는 조경 쪽 일이라, 내가 맡은 현장도 아니고, 내가 잘 아는 일이 아닌데도, 부러 데리고 가주는 거. (고마워요, 현부장님 ㅋㅋ)






 그래서 찾아갈 수 있었던 비자나무 숲길. 과연 그곳에는 수백년 되어 둥치가 굵은 비자나무들이 수백 그루, 원시 그대로 남아있었다. 숲으로 드니 병수 아저씨 말처럼 숨을 쉴 때마다 몸이 깨끗해지는 것 같아. (괜히 더 그런 기분 ^ ^ ) 그리고 어디선가 들어본 숲의 정령 같은 것이 저 나무들 사이에 감돌고 있는 것 같아. (솔직히 나는 동물적인 감각이라던가, 영적인 그 무언가를 잘 느낄 줄 모르지만, 이렇게 무딘 감각으로도 그런 것들이 절로 떠올려지는.)  





 
  봄학기를 마치면 달래도 이리로 내려온다. 달래와 감자에게 이 비자나무 숲을 선물할 수 있어 참 기쁘다. 게다가 이 숲이 있는 구좌읍 평대리에는 아서의 집이 있기도 해. 달래의 고향 친구, 아서가 꾸려가는 예쁜 게스트하우스. 그리고 조금만 나가면 현부장이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로 손꼽고 있는 월정 바다가 펼쳐져. 그런데다 내가 일하는 현장도 바로 이 둘레. 






 감자야, 아빠 일하는 데랑도 가깝고, 엄마 친구네 집이 바로 거기에 있기도 하고, 그리고 이 멋진 숲과 바다가 바로 요만큼에서 요만큼이니 얼마나 좋으니. 아빠가 일하고 있는 동안 여기에 자주 놀러나오면 좋겠다. 저 숲의 맑은 숨, 물빛 투명한 바다. 그렇게 하여 준비하는 깨끗한 몸과 평화로운 마음. 상상만 해도 즐거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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