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정

굴 속의 시간 2012. 11. 13. 19:02

 처음 내려왔을 땐 그때가 절정인가 보다 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한 주가 지나고, 또 한 주가 지나고, 그때는 아직 절정이 아니, 이제이야말로 절정인가 했다. 현장사무소에서 못지를 지나 대웅전 권역으로 오를 때도, 밥 때가 되어 선방과 승방 사이로 난 길을 지나 공양간으로 내려가면서도 예쁘다, 예쁘다 소리가 염불처럼 절로 나오곤 했다.  

 그러나 또 한 주일이 지나고 나니 그때도 아직 절정은 아니. 작업복 차림에 안전화와 안전모, 코팅장갑을 낀 채로 수레를 밀고 길을 오르면서도 예쁘다, 예쁘다 염불 소리는 멈춰지지가 않았다. 한참 물든 나무와 물든 산에 넋을 빼앗기고 있다 보면, 내가 지금 이곳에 일을 하러 온 게 맞나 싶기까지 한. 

 솔직히 말해 이곳에서는 힘든 일이랄 게 없다. 뜨거운 폭염, 숭례문에서 보낸 봄과 여름을 생각하면 정말 여기에서는 일도 아니다 싶을 정도. 그때는 오전 열 시가 되기 전에도 입에선 단내가 났고, 걸치고 있는 건 속옷은 물론 겉옷까지 물에서 건져 올린 것처럼 흠뻑 젖어버리곤 했다. 그때는 정말 힘이 들어, 어떻게 견뎌냈는지 몰라. 그러나 여기에선 작업량이 그리 많지도 않을 뿐더러, 작업 내용에서도 그때처럼 사람을 휘청거리게 할만한 일도 없어. 그런데다 둘러보는 자리마다 탄성을 자아내는 풍경들. 아시바 발판을 메고 비탈을 올라가면서도 눈은 한 데에 팔려 예쁘다 소리가 절로 나오는.

 

 

 한 주가 더 지나고, 지난 주보다 더 끔찍하게도 물이 들어. 예쁘다 하는 말이 절로 나오는 것처럼 감사하다 하는 마음이 멈추지 않고 들곤 해. 정선, 영월 쪽으로는 오늘 첫눈이 하얗게 내렸다는데, 여기는 이렇게 빨강과 노랑이 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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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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