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원

굴 속의 시간 2012. 10. 30. 22:03

 

 경주에서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되었다. 그랬으니 이 일을 하는 내내 메뚜기처럼 여관방을 옮겨다닐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들어오게 된 고시원. 이십 대에 아주 잠깐 학교 앞 고시원 생활을 한 적은 있지만, 후아, 여긴 그보다도 더한 한 평 남짓 칸막이 칸칸의 쪽방. 몸 하나만 쭉 뻗으면 옴짝달싹하기도 어려운 조그만 동굴. 아아, 이제 꼭 삼 년이 되어가는 굴 속의 시간 마지막을 이렇게 정말 굴 속에 들어와 지내고 마는구나. 다른 분들처럼 원룸을 구해 들어갈 수도 있었을 거고, 함께 일하는 형님이 내 방에서 같이 지내자, 고맙게 마음 써주시기도 했지만, 굳이 이리로 들어왔다. 

 

                                                       (신용대출 말고 신라고시원 ^^)

 

 일을 마치고 연장 정리하고 나면 다섯 시 반, 마침 공양간에서 저녁 밥을 주는 시간. 오늘은 부러 밥을 더 떠서 배부르게 먹고 왔건만 여기 굴 속, 고시원에 들어오면 씻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이내 배가 고파온다. 일을 해서 그런 것 같지만은 않고, 절밥이 풀밖에 없어 그런 것 같지도 않다. 풀만 있는 진수성찬이니 오히려 나로서는 어딜 가서 사먹는 밥보다 백 배 좋기만 하지. 그런데 잠자리에 들기 전 왜 이렇게 배가 고픈가 몰라. 객지에 나와 있으니 그런 걸까, 아님, 어쩌면, 나는, 배가 고픈 게 아니라 다른 무엇이 고픈지도.

 오늘도 역시나 배가 고파와서 좀 전엔 요 앞 가게에 나가 컵라면을 사가지고 왔다. 갑자기 숙소를 구해 들어오느라 냄비며 그릇이며, 아무 것도 준비를 해오질 못했으니. 정수기 뜨거운 물을 컵라면에 부어, 후후 불어대며 옥상에서 먹고 내려왔다.

 

                        (요건 컵라면 먹으러 올라간 고시원 옥상에서 내다보고 찍은 거.)

 

 여기에선 점심, 저녁은 그렇게 공양간에서 절밥을 먹는다. 아침 공양은 시간이 너무 빨라 그러구 싶지만 그거는 포기 ㅜㅜ. 아, 그런데 십일월부터는 저녁 공양 시간이 다섯 시 부터라지. 그럼 이걸 어쩌나. 설마 일 하다 말고 밥부터 먹다가 다시 올라가 일 정리를 하고 퇴근을 해야 할까, 아님 저녁 공양은 포기하고, 그냥 일하다 나와서 어디 식당에 나가 사먹어야 할까. 쩝 ㅜㅜ 제일 좋은 거야 다섯 시에 일을 마쳐주고, 공양 시간에 맞춰 저녁밥을 먹고 나오는 거긴 한데, 글쎄 그건 어쩔란가 모르겠다. 그런데 오늘 해넘어가고 어두워지는 걸 보면 그럴 것 같기도 해. 여기가 산 밑이어서 그런지, 금세 깜깜해지더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학여행에 단풍구경, 중국에 일본 관광객들까지 경내를 벅적하게 하더니, 어둡다 싶을 즈음에는 이미 고요해. 아, 문제는 그거겠구나. 공양간에서 다섯 시에 저녁을 먹게 되면, 이 긴긴밤은 또 얼마나 배가 고플까, 하는 거. 피휴.

 이 일에서는 나 말고도 조공이 한 명 더, *희 형님이 같이 일을 하고 있다. 형님하고 같이 일을 하게 되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혼자였다면 더 많이 외로웠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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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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