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음에 별 하나 더 심어주고 간 할아버지


저는 이 이야기 앞부분이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밤하늘로 보이는 별의 아이들과 이곳 아이들이 아무도 모르게 이야기를 나누고 툭탁거리며 동무가 되어가는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정말 그런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킥킥킥 웃음이 나오고 다음은 어떻게 될까 두근거리면서 때때롱의 쪽지가 내려와 있지 않으면 내가 더 안타까워 조바심이 일곤 했으니까요. 그런데 새달이와 매달이, 누렁이, 흰둥이, 왕잠자리들이 랑랑별로 올라가 오백 년 뒤의 그곳과 또 오백 년 전의 그곳을 오갈 때는 사실 그만큼 재미있어 하지 못했어요. 아무래도 그곳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에는 이 동화를 쓴 할아버지가 걱정하고 속상해하는 마음이 더 크게 느껴졌어요. 아무래도 우리가 살아가는 곳이 오백 년 전 슬픈 랑랑별을 닮아가고 있는 것 같아 그럴 거예요.


지금 저는 랑랑별 이야기를 쓴 권정생 할아버지가 살던 작은 오두막에 와 앉아 있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할아버지가 아픈 몸으로 홀로 살아온 집이랍니다. 지난 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이제는 풀과 새, 벌레들이 지키고 있어요. 오늘은 잠자리들이 많아요. 어쩌면 이 애들 가운데 랑랑별에 다녀온 왕잠자리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뒤란에 가 보니 큼직한 호박이 누렇게 익어가고 있어요. 얘들도 때때롱이가 보내준 씨앗을 심어 자란 걸지도 모르겠고요. 이 오두막 마당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북두칠성에서 몇 마디 떨어진 곳에 해바라기처럼 깜빡이는 랑랑별이 보일지도 모르지.


아마 이 책을 읽기 전에도 할아버지가 쓴 이야기들은 많이 읽었을 거예요. 내가 알기로 할아버지는 이 땅에 자라는 아이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동화를 가장 많이 들려주었으니까요. 그 가운데 이 동화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가장 마지막으로 쓴 거예요. 앞서 써 두고도 아직 책이 되지 못한 것 말고, 더 쓰려 하다가 미처 다 쓰지 못한 것 말고는 말이지요.얇은 종이 위에 써 내려간 힘 없는 글씨들을 보면 이걸 쓰면서도 할아버지가 얼마나 아팠는지 알 것 같아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 아픈 몸으로도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슬픈 학교, 슬픈 도시, 슬픈 별을 더 괴로워했나 봐요. 그래서 어떻게든 슬픔을 이겨낸 랑랑별의 이야기를 들려주려 하셨는지 모르겠어요.

어두워지려면 아직 멀었건만, 우두커니 하늘을 올려 보고 있으니 문득 할아버지가 눈을 감아 간 곳이 거기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디에선가 깜빡이고 있을 것 같은 해바라기 별. 때때롱이가 새달이 방귀 뀐 것까지 다 세어 약 올리던 것처럼 할아버지도 다 내려 보면서 키득키득 웃을지도 몰라. 그러면서 이곳 어린이들과 몰래 만나 동무로 사귀어 지내겠지. 못된 짓으로 슬픈 별을 만들어가는 어른들에게는 똥가루를 뿌려대면서.


그저 제 느낌으로만 쓴 것인데 다 쓰고 나니까 동화를 읽은 어린이들에게 쓸 데 없는 군말만 된 것 같아 갑자기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부디 우리 어린이들이 살아갈 세상이 할아버지가 그리는 랑랑별과 같은 아름다운 자연으로 되돌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에요. 이 책을 읽으며 흰둥이 날개에 매달려 함께 여행을 다녀온 어린이들도 그곳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끝으로 우리 마음에 별 하나 더 심어준 권정생 할아버지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2007년 10월 24일 박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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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 나오게 될 할아버지의 동화책, 개똥이네 놀이터라는 어린이잡지에 한 해 넘게 연재한 이야기가 한 권의 책으로 나올 준비를 하고 있는데 거기에 덧말을 부탁받아 쓴 글이다. 그 동안에는 잡지를 받아보면서도 챙겨 보지 못하고 있던 것을 이 일로 해서 이번에야 읽었다. 윗 글에도 썼지만 할아버지가 쓴 동화로는 아직 써 놓고도 출판되지 못한 것 말고, 끝을 맺지 못해 쓰다 만 것을 빼고는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쓰신 이야기인 셈이다. 글을읽다가 숨을 돌릴 때면할아버지 방에서나오던, 이 글을 쓰느라 쓰다 긋고 쓰다 지워 다시 쓰던 원고 뭉치들이 아스라이 떠오르곤 했다. 랑랑별에 가 있을 거라 생각하니, 그곳에서 한 번씩 불러주며 얘기 나눠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한껏 좋아졌다. 힘들고 아파하던, 쓸쓸하고 외로워보이던 그런 얼굴들은 말고 장난을 걸고 나서 능청스레 잠깐 딴청을 했다간 돌아서 맑게 웃으시던 장난꾸러기 그 얼굴만 자꾸 떠올랐다. 지금쯤 때때롱이랑 만나 뭔가 재미있는 일을 꾸미고 계실지도…….


** 아, 그런데 이 글은 출판사에서 빠꾸를 맞았다. 그래서 새로 써야 하는데,하여간 다시 쓰는 건 다시쓰는 거고 어쨌든 나로서는 이 글이랑랑별 때때롱을 읽고 쓴 첫 독후감이면서 뭐 그런 것이다.

***아래는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보리출판사에서 홈페이지 올려 놓은 것인데. 할아버지가 랑랑별 때때롱 연재를 시작하며 쓴 글, 그리고 한 권 책으로 만들 때머릿글로 쓰라고 하셨다는 글 들이 함께 있어 다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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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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