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

냉이로그 2007. 10. 21. 00:28

찜질방

생각해보니 조카랑 단 둘이 어디를 가본 곳이 없어. 기껏해야 집 앞 놀이터 아니면 조카가 다니는 학교 운동장. 진우야, 우리 어디 갈까, 어디 가 보고 싶은 데 없었어? 친구들이 어디에 갔다 왔다고 해서 부러웠던 데, 아니면 평소 가 보고 싶다 그러던 데……. 동물원에 갈까, 아니면 무슨 구경이 있는 데 갈까 하다가 우리가 가기로 한 곳은 찜질방. 삶은 달걀을 사준다는말에 진우는 끔뻑 넘어왔고, 여덟 살 먹은 조카와 서른다섯 살 먹은 삼촌은 첫 데이트를 찜질방에서 하기로 했다. 사실 찜질방이야 내가 가고 싶은 곳이었지. 아, 자도 자도 몸이 풀리지를 않아.

토요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오는 조카를 기다려 책가방을 벗기고집을 함께 나섰다. 그냥 다닐 때는 그리 많이 보이던 찜질방이 막상 가려 하니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겠네. 가까이에 청량리 현대코아 건물 지하에 있다 해 그리 찾아 갔는데 아후, 여기는 너무 후졌다. 야. 목욕탕이라고 있는 게 다섯 평도 채 되지 않는, 몸 담글 탕이라고 한 평이나 될까, 수도꼭지도 다 해야 열 개도 되질 않아. 대충 씻고 나서 찜질방 옷을 입고 자리를 옮겼는데 이건 생각한 데랑 너무 다르잖아. 여긴 찜질을 하러 오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오가며 눈을 붙일 사람들 머물라고막 꾸며놓은 데였나 봐. 에이 씨, 대충 나는 조카를 찜질방 와 있는 다른 애들하고 어울려 놀게 하고 어디 뜨거운 방에 들어가 어허 좋다 하면서 누워 있으려 했는데 그게 안 되겠네. 할 수 없이 조카를 꼬시기 시작, 진우야, 삼촌이랑이 방에들어가 같이 놀자. 있다 보면 하나도 안 뜨거워. 들어가면 되게 재밌다니까. 다행히 조카 좋아하는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만화책을 가지고 가길 잘했지. 삼촌 잘 테니까 이거 다 보고나면 깨워.

그렇게 찜질방에서 세 시간. 물론 아주 보채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잠든 내 곁에서 땀 뻘뻘 흘리며 삼촌 깨 나기를 기다려준 진우가 너무너무 고마웠다. 잘 자고 나왔네. 아우, 개운해.


문방구


장난감을 사주겠다고 했는데 어디를 가야 살 수 있는지를 모르겠어. 좋아라 하는 진우 손을 꼭 잡고서 청량리 역에서부터 걸어오는데 길가에는 순 옷 파는 가게 아니면 밥 먹는 집들만. 어떻게 하지, 진우야? 장난감 파는 데가 없어. 찾다찾다 못 찾아 조카가 다니는 태권도 도장이 있는 아파트 상가로 가기로 했다. 웬 바람이 이리도 매운지, 하지만 조카는 장난감을 산다는 말에 한껏 들떠 하나도 춥지 않다 하네. 그 길로 세정거장은 걸었나 봐.
“삼촌, 그런데 얼마 있어?”
“왜?”
“삼촌 돈 얼마 있나 알아야지.”
“백만 원.”
“에이, 뻥.”
“뻥은 무슨 뻥. 삼촌 백만 원 있다니까.”
“삼촌이 무슨 백만 원 있어?
“어유, 이게 삼촌 무시하네. 삼촌 일해서 돈 벌었다니까.”
“그럼, 보여줘 봐?”
“야, 삼촌이 있다면 있는 거지.”
장난으로 말하면서도 조금은꿍한 마음이 들어 있는데 이 녀석 내 말은 아주 무시하기라도 하듯 제 하고 싶은 말만 한다.
“삼촌, 그럼 칠천오백 원 있어?”
“임마, 백만 원 있다니까.”
“아, 나 갖고 싶은 장난감 칠천오백 원인데.”
이씨, 내가 칠천오백 원도 없을 것 같단 말이지.

바람이 꽝꽝 불어 나는 추워 죽겠다 하는데저는 계속 신이 났다. 그런데 찾아가던 문방구에 왔더니 주인이 문을 닫아 놓고 어디를 갔다.야, 안되겠다, 이따 저녁에 다시 와 사야겠네.돌아서려 하는데 잡힌 손을 빼면서문에 써 붙인 쪽지를 가리킨다.<죄송합니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잠시 뒤에 온대잖아.야, 잠시 다녀오는 게 언젤지 어떻게 알고? 이따 저녁 때 다시 와서 사자. 아유, 삼촌 잠시만 기다려. 진짜 잠시 뒤 오는 거라면야 그러겠지만 그렇게 썼다 해서 어디 잠시일까? 뭔가 볼 일 있어 오늘은 장사를 못한다는 얘기일 거 같은데. 날은 춥지요, 배는 살살 고파 오지요, 화장실에도 가고 싶어 그만 들어가자 하고 싶은데 뚝 잘라 그러자 할 수가 없네.장난감사준다 해 그리 들뜬 기분을 만들어 놓았는데바로 들어가자고 하면 실망이 이만저만일까.그러면 지금부터딱 십분만 기다리는 거다. 응. 지금이 네 시 오 분이니까 네 시 십오 분까지. 응. 그래 그 앞에서 기다리는데 이 녀석 투명 유리벽으로 된 가게 안을 들여다 보며저게 갖고 싶었네, 이게 마음에 드네 초롱초롱 눈이 빛난다. 그런데 꼽는 것마다 하나같이 다 무슨 로봇 장난감에 싸우고 부수고 하는 것들. 에이, 이런 거 말고 다른 거였면 좋겠는데 하는 생각이 잠깐 들다가도, 다시 생각하면 선물이라는 게 저 좋다는 거 사줘야지 내 주고 싶은 거 억지로 가져라 하는 게 무슨 선물인가 싶기도 해. 내가 얘였더라도 나 갖고 싶은 거 사주는 게 제일일 거 같으니. 그렇게 아이랑 문방구 벽에 얼굴을 붙이고 서서 그 안에 있는 것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약속한 시간이 되어도 문방구 아저씨는 오지를 않아.
“진우야, 십 분 됐으니까 이제 가자.”
대답 없이 시무룩.
“이따 저녁에 다시 와서 사면 되잖아.”
“그 때도 안 열면 어떻게 해?”
“그럼 내일 와서 사면 되지.”
또 대답 없이 시무룩 얼굴.
“왜, 삼촌 못 믿어?”
“응, 못 믿어.”
“@#$%^&”


나는 완전 삐쳐, 야, 너 너무한다, 삼촌이 언제 너하고 약속한 거 어긴 적 있냐, 근데 왜 삼촌을 의심하냐 궁시렁궁시렁하는 데도 얘는 문방구 유리벽에서 얼굴을 떼지 않은 채 건성으로 대답한다. 못 믿으니까 못 믿지. 어쨌든약속한 시간은 다 되었고, 진우도더는 군말없이 손을 잡고 상가를 빠져 나왔다. 이따가 다시 오자,문방구 아저씨가 무슨 바쁜 일 있나 보다,삼촌 약속 지킬 거라니까……한 편으로는 아쉬움을 달래며 한 편으로는 상황을 받아들이게끔말을 하며 손을 잡고 나오는데순간 이 녀석 얼굴이 환해지면서 삼촌! 하고 소리를 질러. 왜? 저기 봐? 응? 문방구 아저씨! 어,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 문방구 주인처럼 생긴 아저씨가뭔가를 잔뜩 들고 걸어오고 있네. 거봐, 잠시 뒤에올 거라고 했잖아!하, 정말 극적이네. 아저씨를 따라 상가 안 문방구로 따라 들어가 장난감을 고르는데, 진열대 꼭대기에 도미노 게임하는 장난감 세트가 보여.생각은 여전히 얘가 갖고 싶다는 거 사주는 게 맞다 싶지만한 번쯤은 다시 물어 보고 싶어 그건 어떠냐 물으며 살짝 꼬셨다.이거 진짜 재밌는 거야.

어으, 저녁 먹을 때까지 도미노 조각들 줄지어 세우느라 진땀을 흘렸네. 줄지어 늘어세우다 보면 하나를 잘못 건드려 드르르르럭 쓰러져 버리고, 다시 세우다 보면 또 뭔가를 툭 건드려 다 쓰러지고……. 야, 이건 끈질기게 해야 되는 거야, 그래야 멋있게 넘어뜨릴 수 있는 거…….


저녁


저녁을 하며 형과 술을 마셨다. 이제는 서울에 올라오면 형과 술을 마시곤 한다. 형이 있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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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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