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이랜드

냉이로그 2007. 11. 4. 12:38

여성노동영화제

여성노동영화제라고 한다는데 인터넷 볼 수 있으면 그것 좀 찾아볼래? 나는 그게 보고 싶은데, 거기에 아마 그거 있을 거야, 이랜드에 대한 거. 프로그램표를 보니 그건 일요일 영영 시, 그러니까 토요일 밤 열두 시에 하는 걸로 되어 있었다. 그럼 다른 걸로 볼까, 영화 보고 나와 그 앞에서 소주 한 잔 하면 딱 좋겠는데, 밤 열두 시부터 하는 거면 거 참 술 먹고 들어가 볼 수도 없고……. 머릿속으로는 겨우 고런 거나 따지고 있었다.


밤 열두 시, 홍대 앞 술집 많은 동네 한 가운데 있는 상상마당이라는 영화관. 더러 2차, 3차 자리를 옮기며 그 앞을 지나곤 했는데 그런 공연장이 있는 줄은 몰랐네. 공짜, 어, 이런 걸 왜 공짜로……. 그 늦은 시간에도 극장 안에는 사람들이 거의 다 차 있었다. 영화 이천칠 이랜드.


2007 이랜드


일자리를 쫓겨난 아줌마들이 빼앗긴 일터로 모여들었다. 뭘 어떻게 해야할지는 몰라. 이 자리를 빼앗기는 건 삶을 빼앗기는 일, 혼자라면 얼마나 두려울까, 방패와 제복의 경찰들, 주먹쓰는 일만 했을 것 같은 검정 양복의 사람들, 그리고 위엄 있는 목소리로 나가라 말하는 그 높은 사람들. 아줌마들은 손을 꼭 잡았고, 팔에 팔을 끼웠다. 돌려주세요, 우리 일자리를, 손님들께는 죄송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만 돌아가주세요……. 여덟박자 손뼉 구호가 어색한 아줌마들, 훌라송을 배우는 아줌마들, 여럿이 앉은 앞으로 나가 한 마디 말을 하기에도 부끄러운 아줌마들, 아웃소싱으로 그 자리를 대신 채우고 있는 그 아줌마들과 하나 다르지 않을 그냥 우리 아줌마들. 농성이 길어지면서 집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아줌마들,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집에 가 밥을 짓고, 남편 와이셔츠 챙겨줄 일을 생각해야 하는 아줌마들. 그러면 우리 일할 때처럼 2교대로 하자구, 집에 가야 되는 사람들은 갖다 와, 그 대신 내일 아침 아홉 시까지는 꼭 오는 걸로 약속을 하고, 미안해요, 내일 일찍 나올게요, 아니, 미안한 게 아니지, 어쩔 수가 없잖아, 서로 돌아가면서 하자구, 계속 있을 수 있는 사람도 있어요, 나는 집에 안 갈 거야, 우리가 있을게, 그래, 그렇게 하자, 집에 갔다 와야 하는 사람들은 2교대식으로 하고, 안 그래도 되는 사람들이 붙박이로 여기에 있어…… 농성이 길어지면서 아줌마들은 스스로 조직화되어 간다, 매장 안으로 들어가 손님들이 걷는 길을 따라 손뼉 구호를 내며 한 줄로 걷기도 하고, 식품 매장으로 떼지어 들어가 오륙백 원짜리 물건 하나씩을 사들고 계산대 앞에 줄을 지어 서 계산 업무를 마비시키기도 한다. 또한 아줌마들은 그렇게 스스로 전술을 갖추어 가는 것이다. 실로 조직화라는 것, 전술이라는 것은 그 어떤 어려운 운동이론이거나 그 누군가의 계획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절박한 요구가 있는 그 분들 안에서 자연스레 피어나는 거였다. 길어지는 농성을 지나면서 아줌마들은 서로에게 동지가 되어가고 있었고, 당찬 농성 노동자로 거듭나고 있었다. 몰려드는 경찰들 곁을 나란히 걸으며 우리 지켜주러 나온 거냐며 웃으며 맞기도 하고, 철벽 같은 방패 숲이 조여들어도 아랑곳 않고 농성장 끼니를 준비하는 콩나물 씻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영화는 백오십 분이나 되었지만 끝은 나지 않았다. 팜플릿에도 이 영화는 아직 편집이 완성되지 못했다는 설명이 있기도 했지만, 정작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은 영화 편집이 아니라 그곳의 싸움일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계속되고 있는…….

그 아줌마


영화를 보는 내내 눈길이 모아지는 한 아주머니가 있었다. 아마 조합의 어느 분회장이나 모둠장을 맡고 있는 듯한 아줌마. 내가 본 이 영화는 그 아줌마의 눈빛이었다. 착해보이기만 하는 그 아줌마의 눈빛은 처음에 겁에 질린 아이의 그것이었다. 까만 눈동자 가만히 있지 못하고 자꾸만 흔들리던, 앞 자리에 나서 어떤 구실인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가슴만 두근두근 목소리가 떨리던, 화면 속 아줌마를 바라보는 내 가슴이 더 조마조마했다. 나도 모르게 마음 속으로 힘내요, 힘내세요 하는 말을 하고 있었고, 아줌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무언가 말이라도 하고 나면 모아쥔 손을 더 꼭 쥐곤 했다. 아, 눈물 나. 영화가 끝나갈 때까지 아줌마의 선한 눈은 그대로였지만 그 눈에는 힘이 들어 있었다. 더는 그 때처럼 불안해 떨리는 눈동자가 아니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는, 운동권 억양 같은 거 하나 섞이지 않았지만 하고자 하는 말만큼은 분명했다. 이건 우리가 인간다운 대우를 받겠다는 것입니다, 이대로 우리는 나갈 수가 없습니다.


백오십 분의 긴 영화는 오십 분씩 3부로 나누어 상영되었다. 1, 2부를 마치고 잠깐 쉬는 시간이 있었는데 다시 자리에 가 앉으니 극장 안에는 화면으로 보고 있던 그 아줌마들이 꽤 여럿 함께 하고 있었다. 아, 그래서 영화 보다가 맨 뒷자리에서 웃음이 크게 터지곤 하던 게 그 아줌마들이었구나, 화면에 나오는 당신 모습에 쑥스러워, 혹은 그 당시 상황을 다시 떠올리며. 그리고 그 분들 가운데에는 시종일관 눈길이 가게 하던 그 아줌마도 보였다.

새벽 바람


영화가끝나고 극장에서는 바로 이어 다른 작품들 상영이 이어졌다. 밤을 새워 다 보고 나올 생각은 없었기에 이랜드 이천칠만 보고 일어서려 했는데, 중간 쉬는 시간 같은 것을 따로 주지 않아 나올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더 그러했던 건 건 극장 안을 가득 채우던 사람들이 아무도 일어설 생각을 않아 나가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짧은 영화 두 편을 더 보게 되었다. 구로선경오피스텔 청소하는 아줌마들 이야기를 담은 ‘구로선경오피스텔을 찾다’, 그리고 광주 시청 청소용역 아줌마들의 이야기를 담은 ‘시청에서 쫓겨난 그 후’. 나는 올 봄 이 나라에서 아줌마들의 알몸시위가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까지, 보이고 싶지 않은 속살을 드러내면서까지 찾아야 할 절박함이, 청소를 하게 해 달라는 절박함이 이 땅에 있었다는 걸 알지 못했다.


동틀 무렵까지 이어지는 작품들의 상영이 계속될 거였지만 나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피곤했다. 그 절박한 싸움 앞에서도 잠이 왔다고 하면 무례한 말이 되는 걸까. 하지만 나는 잠이 왔고, 극장 바깥에 나와 보니 새벽 세 시 반. 소주 한 잔은 하지 못했다. 이천칠 년 십일 월, 잠이 오고 있어 더 그랬나, 새벽 바람이 몹시 시렸다.

* 2회 여성노동영화제는 홍대 앞 상상마당에서 11월 6일까지 있다. 상영일정표

** 아, 그리고 바끼통과 평화박물관이 함께 하는 열 번째 하비비 평화영화마당이 11월 9일에 있다. 이번 작품은 이라크-이란 국경지대에서 외딴 마을 아이들을 찾아다니는 선생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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