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답사 1

굴 속의 시간 2010. 3. 24. 17:43

나름 답사지에 대한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한 가지 빠뜨린 것이 있다면 그곳들을 어떤 순서로 찾아니는 것이 좋을까 하는 거였다.시간이나 경비 따위에 아무런 제한이 없다면야 부여로 갔다가 안동으로 갔다가 익산으로 갔다가 경주, 다시 예산, 강릉, 영주 하는 식으로 시대 흐름이나 건축 양식의 테마별로 찾아다니는 게 좋겠지만 그런 낭비를 할 수는 없는 일. 그러니 인근 지역의 답사지를 묶어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인데, 비슷한 어느 지역이라 할지라도 멀게는 비교적 가깝다는 것이지 멀게는 한 시간 이상씩 움직여야 하는 길이니 그 안에서도 나름 동선을 그리고 있어야 했다. 같은 공주 지역이라 할지라도, 같은 부여라 할지라도 행정구역 상으로 그러할 뿐 어디는 청양군에 가까운 부여군이고, 또 어디는 보령시에 가까운 부여군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한참을 갔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고, 더 가까운 곳을 지나쳐 다른 곳부터 찾아갔다가 다시 거슬러올라 지그재그로 다니는 경우도 생기니 말이다. 그저 그 비슷한 지역의 답사지에 대한 내용조사만을 했을 뿐 동선을 그려놓질 않았으니 이런 부분에 시행착오가 없지 않았다. 길목수 형님 차에 있는 네비게이션만 믿고 지도를 챙겨가지 않았다는 거, 실수라면 이게 실수였다.

아무튼 공주 마곡사를 보고 난 뒤 청양의 장곡사 쪽으로 갈까, 부여 무량사로 갈까 하다가 어찌어찌하여 부여 무량사 쪽으로 가게 되었다. 가다보니 이정표는 계속해서 보령, 서천을 가리기고 있어. 안 그래도 그 전날 피네 아저씨 집 고치는 얘기로 메일을 주고 받기도 했는데 바로 거기, 보령이 가까웠다. 어쩌나, 어쩌나. 마음은 콩닥거렸지만 가볼 수는 없었다. 혼자 나선 길도 아니고, 다른 분 차를 얻어타고 빡빡한 일정으로 시간을 다투며 다니는 길. 그저 마음만 괴로웠다. 아마 내가 목수 일을 하며 살아가는 동안 가장 안타까운 오점으로 남을 일. 형님이 집을 고치고 있는데, 목수라는 아우가 그 일을 하기는커녕 한 번 찾아가지도 못해.이 알량한 공부를 한다고 못질 한 번 하지를 못하고 있으니말이다.일요일 아침 아저씨의 메일을 받고 강의실에 들어가서는 자꾸만 그렇게 딴 생각에 빠지곤 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아저씨 집을 다 고치고 나도록 한참은 못가볼 것이다. 후회가 될 것을 뻔히 알지만, 편치 못할 것을 뻔히 알지만, 가슴팍에 삼인치 못 하나 깊이 박아놓게 되리라는 것 뻔히 알지만, 그렇지만 말이다. 그러니 무량사 가는 길에 보령이 십몇 키로밖에 남지 않았다는 표지판을 보면서 내내 마음이 그랬던 것이다. 그게 어디 피네 아저씨 고치는 집 뿐인가, 무량사를 시작으로 정림사지와 장하리 석탑을 둘러보며, 그리고 부소산성과 궁남지, 그리고 금강 뚝길을 지나칠 때마다 황금성 샘 목소리가 내내 따라다녔다. 부여라고는 황금성 선생님을 만나러, 황금성 선생님 초대로, 황금성 선생님 안내로 다녀본 적밖에 없어. 선생님의 초대로 여고에 가서 아이들을 만났고, 선생님이 마련해주는 자리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선생님 안내로 박물관이며 산성이며 강둑이며 부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곳을 다니곤 했었다. 아마선생님과 동행을 했더라면 자료와 도면만으로는 알 수 없는 백제, 그 시절의 역사와 숨결까지도 고스란히 담아갈 수 있으련만. 내게는 그렇게 부여가 곧 황금성 선생님이었다. 지난 해부터는 서천에 산너울마을이라는 생태마을을 짓고 가꾸어 계시는데 여태 한 번도 찾아뵌 일이 없다. 그랬으니 부여를 지나고, 교통 표지판에 보령이 얼마, 서천이 얼마 가까워졌다 할 때마다 마음에는 자꾸만 딴 생각들. 어쩌나, 일정을 다 마치고 나서라도 서천으로, 보령으로 형님들을 만나고 가는 게 좋을까…… 그러나 나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무량사 극락전 (조선중기)

아, 무량사!강의 시간 교수님이 그토록이나 뛰어난 비례미, 중층건물로는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든다 하더니그러한 미감은 크게 빗겨나가지 않는 모양이다. 이곳에 들르기 전 마곡사의 대웅보전을 보고 왔으니나름 비교가 되어 더욱 그러했을까?그렇다고 마곡사 대웅보전이 아주 못난 건물은 아니었지만이 무량사 극락전을 보면 정말 잘 지었구나, 그야말로 중층의 구조이면서도간결함, 시원함, 담백함이 느껴지는 예쁜건물이다 하는 느낌을피해갈수 없었다. 경내에 들어서자마자 와아,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어.

극락전 건물 뿐 아니라 경내 전체가 품 넓게 안아주는 포근함이, 넘치지 않는 여유로움이 좋았다.경건함이 지나쳐 부담스운 어떤 느낌도, 위엄을 치장하는 어떤 화려함 따위도 그곳에는 없었다. 자유로이 바람이 탑돌이를 하고, 둘레에 서 있는 나무들과 그 나뭇가지 위를 옮겨다니는 새들이 너나할 것 없이편안히 부처님의 친구가 되고 있는 것 같아.

천왕문을 지나 들어가면 이처럼 석등과 석탑, 그리고 극락전이 한 줄로 사이좋게 서 있어.

자, 그럼 그 앞에 서 있는 안내판 내용들을 다시 한 번 볼까. 외관상으로는 2층이지만 내부는 하나로 된 통층 건물. 이건 사찰의 주불전이 중층으로 되었을 때나 궁궐의 정전이 중층으로 되었을 때는 모두 마찬가지다. 중층 건물 가운데 1층과 2층을 분리해서 쓰는 경우는 민가에서 1층을 반외부공간으로 두거나 아님 창고 같은 것으로 쓰면서 2층을 올려 쓰는 경우가 있겠고, 아님 누하진입을 유도하는 누각 건물에서 2층을 누각으로, 1층은 통행로로 쓰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아님 아예 문루 건물로 2층은 경계나 감시를 하는 공간으로, 1층을 문으로 쓰는 경우들이 있겠는데, 1층과 2층을 분리하여 두 공간 모두 실내공간으로 쓰는 경우는 찾기에 드물다. 우리가 강의 시간에 배운 것으로는 창덕궁에 있는 주합루가 이례적으로 상, 하층이 모두 실내공간으로 사용되는 건물이었고, 안동에 있는 송석재사 라는 재사 건물이 또한 그러했다. 암튼, 이 무량사 극락전은 중층으로 된 사찰의 주불전들이 다들 그러하듯 바깥에서는 중층이지만 안에서는 나뉘지 않고 통층으로 뚫려있는 건물이다.

인조 11년(1633)에 중건된 조선중기의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물, 아랫층은 3출목이고 윗층은 4출목으로 상층에 출목을 더 냈다는 것은 이제 더 특별할 것이 없는 얘기다. 정면에서는 아래층 다섯 칸이 위층에서 세 칸, 측면에서는 아래층 네 칸이 위층에서 두 칸이 되는 전형적인 온칸물림 방식. 장대석 세벌대를 쌓았다, 자연석 초석(덤벙주초)를 놓았다, 추녀 부에 활주를 두었다, 내부 살미첨차는 운공으로 초각했고 충량에는 용머리를 초각했다 하는 것들도 굳이 외우려 할 것이 아니라 이미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게 된 것.

정면에서 보았을 때 맨 오른쪽 퇴칸 부분이다. 간포가 하나, 협칸으로 가면 간포가 둘이고, 어칸에서는 셋이다. 그리고 상층에는 이 퇴칸이 떨구어진 채 어칸과 협칸만이 올라간다. 이 사진을 찍은 까닭은 강의록에서도 사진 자료가 있던 것처럼귀솟음이 잘 나타나는 것을 눈여겨 보기 위함이었다.

인조 11년(1633), 조선 중기 양식을 잘 보여준다 했다. 제공의 끝이 쇠서(강직하게 아래로 뻗은 모습)가 아니라 조금씩 위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조선후기 앙서 모양으로 아주 솟지는 않았고 그 중간 쯤이랄까. 3출목으로 내밀었고, 보머리는 구름모양으로 초각이 되어 있다. 아, 그런데나는 왜 이리도 주관적이고 편파적인 것인지, 한 번 마음에 들기 시작하면 모든 게 마음에 든다. 이렇게 은은하게 빛바랜 단청도 너무나 편안하고 좋아.

살미첨차의 안 쪽은 구름 모양으로 초각되었다는데, 이러한 모습이다. 툇보가 나가는 주상포 부분과 보가 없는 간포 부분이 서로 살짝 다른 모습이기는하다.

동쪽의 측면과 뒷면이 보이는 쪽에서 찍은 사진이다. (측면 쪽 기단 있는데를 크게 찍었더니 아래와 같다.)

어허, 이거 기단부가 어째 이리된 것일까. 정면에서 볼 때는 안내판에 써 있는 것처럼 세벌식 장대석으로 쌓은 것이 맞는데, 측면부에서는 전퇴칸 쪽만 장대석을 갑석처럼 썼고, 그 뒤로는 무어라 규칙을 말하기도 어려운 '아무 돌로나 아무렇게 쌓기'가 되어 있는데, 이건 도무지 어쩐 일인지.

뒷면에서 찍은 사진이다. 특별히 무언가가 있어서라기보다는 혹시 싶어서라도 이쪽 저쪽에서 자꾸 사진을 찍게 되곤 한다. 암튼 뒷면 상층부에도 정면 상층부에서처럼 모든 칸에 광창을 두었다. 그리하여 사면 모두 광창. 그런데 사진을 찍으면서 특이하다 할만한 점은 이제껏 사찰 답사를 다니면서 주불전의 뒷면 사진을 이렇게 편안하게 찍어본 일이 없었다. 다른 절들은 모두 뒷공간에 여유가 없어 제대로 사진을 찍기에 어려웠다는 말이다. 대부분 경사지에 서 있는 까닭에 뒷공간이 없곤 했던 것인데, 무량사는 건물 뒤편도 훤히 트여 있어 어디에서라도 사진기 각을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 무량사라는 절의 또다른 특징이라면 특징. 주불전의 뒤가 가파른 경사지이기는커녕 오히려 살짝 꺼지면서 넓게 펼쳐져 있고, 더 뒤로 들어가면 영산전이라는 작은 법당이 있기까지 하다.

법당 내부로 들어갔다. 무량사 극락전은 바깥에서 보던 것처럼 중층건물로는 뛰어난 비례미를 지니고 있는, 칸 수 배열에 있어서도 명확하고, 공포의 배분 역시 깔끔하게 지었다 하는 건물이다. 그런데 이 건물에서 눈여겨 봐야 할 곳은 사실 내부를 이루고 있는 기둥에 있다. 기본으로 이 건물은 내진고주들이 이층까지 쭉쭉 뻗어올라가 그대로 외진기둥열을 이루는 건물인데, 특이하게도 서쪽의 내진기둥이 대들보를 사이에 두고 분할되어 있다.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내진고주들 사이에 대들보가 가로지르고, 그 위로 기둥이 서 있으면서 상층의 기둥이 되게 했다. 그러고는 대들보 밑에 얇고 가는 기둥을 마치 보조기둥처럼 받쳐놓은 것이다. 굵은 통재를 하나로 써야 할 것을 대들보를 둠으로써 상하기둥으로 나눴다고도 할 수 있겠으며 아니면 대들보에 기둥을 세운 것에 보조기둥을 받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또한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기둥을 받고 있는 대량은 위로 살짝 굽으며 밑면이 살짝 파인 모양으로 하중에 더욱 잘 견딜 수 있게끔 했다. 여기서에서 뿐 아니라 보를 쓸 때는 이처럼 위로 살짝 굽거나 아니면 일부러 밑면을 깎아내는데 이러한 치목방식은 표준시방서에 나와 있기로'바데떼기'라 한다고 했다.

위에서 본 서쪽 내진열과 대칭이 되는 동쪽 내진열이다. (절 안에서 사진 찍지 말아달라는 말씀에불빛 없이 몰래조용히 찍었더니 이처럼 흐릿하다. ㅠㅠ) 동쪽 내진열 사이에는 대들보가 지나지 않는다. 서쪽 내진열에서 대들보 위아래로 기둥이 분할되던자리에, 동쪽 내진열에서는 굵고 긴 통재가 그대로 올라간다. 이것은 평면도에서 봤을 때 기둥열 가운데 하나가 아주 작은 기둥으로 표시되었다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렇게 기둥을 쓴 까닭은 다른 구조적인 이유보다는임란이후중건 당시 부재 수급이 모자랐던 시대상황 때문이었을 거라 보고 있다. 비슷한 시기 중건된 법주사 대웅전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데, 왕실의 적극적 후원을받았음에도굵고 긴 통재를 쓰지 못하고기둥을 상하로 나누어쓰기도 했다는 것은 그만큼 부재 수급이 어려웠다는 것을 반증해준다.

그러면 다시 서쪽을 본다. 대들보위로 기둥이 선 지점을 가까이에서 찍은 모습인데, 강의 시간 교수님은 이 부분 처리가 기막히게 잘 되어 있어오히려 이 부분은 무량사 극락전의결점이 되기 보다는 양식적 특징이라 말해도 좋을 정도로 처리가 잘 되어 있다 했다. 나무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했다기보다는 일부러새로운 양식을 보여주기라도 하듯깔끔하게 되어 있다며 말이다.상층으로 올라가는 기둥이 서 있는 밑에는 우선 대들보와 직교해서 나가는 툇보에 대들보 방향의 토막부재를 십자결구해서 짜 놓고 있고, 그 위로 다시 평방 같은 넓은 부재로 한 번 더 십자결구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위에 기둥이.이처럼 이 건물의 서측 내진열 상하층으로 구분된 기둥은 부재가 모자라 임기응변으로 처리한 것이지만구조적으로도 완벽을 기했고, 외관상으로도 훌륭하게해결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대들보를 기준으로 상하층의 기둥이 분리되었을 때 윗기둥을 더 굵게 쓴 까닭에 대해서는 몇 번 언급한 일이 있다. 윗기둥이 바깥으로 노출이 되는 것이고, 아랫기둥은 실내에 있는 거라는 점, 또한 윗기둥은 그 기둥머리에서 평방을 받아줘야 하니 그만한 굵기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점 들이 그 까닭이라며 말이다. 이 사진에서 보면 상층의 측면 외진기둥들의 가운데 있는 기둥이 대들보 위에 서 있는 기둥인 것이다. 양 옆의 귓기둥들은 1층에서부터 통재로 올라온 것들이고 말이다.

상층과 하층 기둥의 굵기 부분에 대해 달리 생각한다면, 이미 대들보가 질렀으니 그 위에 기존 굵기의 기둥이 서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하겠다. 아무리 부재를 구할 수 없다 해도 어려운 것은 그같은 굵기의 긴 나무인 것이지, 외평주 정도의 굵기와 길이를 가진 부재는 그리 어려울 것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대들보 아래의 기둥을 가늘게 쓴 것은 부재를 구하기 어려웠다기보다는 상층 기둥의 하중을 대들보가 받아주기는 하지만 좀 더 안정감을 주기 위해 보조기둥으로 쓰느라 그랬다고도 볼 수 있다. 이미 대량이 들어갔으니 하중은 대량을 통해 옆에 있는 기둥들로 전달이 될 테니 말이다. 그러니 기둥을 쓴다 하더라도 보조기둥 정도면 족할 수 있었고, 게다가 예불을 올리는 실내공간이라는 점 또한 감안한다면 굳이 필요없이 굵은 기둥을 써야할 까닭도 없었을 것이다.

이층 천정을 보며 찍은 사진이다. 충량의 끝을 용머리 모양으로 초각해놓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요 앞의 사진이 실내 중앙의 천정이었다면 여기는 전면퇴칸부에서 올려다본 천정이다. 이처럼 천정은 전퇴칸과 중앙내부공간, 그리고 후퇴칸의 층이 다른 층급천정의 구조를 하고 있다. 이것이 조선중기에 실내공간의 위계를 더하기 위한 방식이었다면 후기로 가면서 층을 지게 한 층급천정 구조보다는 빗면을 두고 더 깊어지는 빗천정 방식을 쓰게 된다.

그만 절에서 나오면서 측면 문 옆에 있는 종을 보았다. 건물 앞에 이것에 대한 안내판이 있었는데, 이 또한 중요한 문화재로 남아 있는 것인 모양이었다.

이름은 무량사 동종이라 하는데, 솔직히 지금은 목조든 석조든, 아님 건물이 되었든 탑이 되었든, 성곽이나 담장, 교각이 되었건 건축물에 한정해서 공부하고 있고 그것만 하기에도 벅차기 때문에 솔직히 별 관심을 두지는 못했다. 그래도 이 종 또한 무량사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되기는 할 것이다.인조 14년에 만들었다 했으니 건물을 짓고 3년 뒤에 만들었나 보다. 종의 몸체는 연꽃 모양 장식이, 종의 정상에는 여의주를 문 용이 감싸고 있는, 주석과 청동 합금으로 만든 조선중기 전통양식을 대표하는 종이라 한다.

법당에서 나오니 바깥에 아저씨 한 분이 계시다. 안에서 사진을 찍고 있을 때 그러면 안 된다고 조용히 일러주시던 분. 아마 절을 관리하시는 분인 듯 한데,때에 따라 예의를 갖추지 않고 사진을 찍거나 하고 그런 모습이 절의높은이들에게 눈에 띄면 아저씨에게 책임이 돌아가니 어쩔 수 없이 못하게말려야 하는 것 같았다.그러한 사정은 다른 절들에서도 비슷했고 말이다. 그래서 나와 아저씨께 죄송하다고, 문화재 공부를 하느라 그랬다고 말씀드리니마음넓게 이해해주셨다.그렇게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깜짝 놀라. 세상에나, 아저씨 귓볼 좀 봐. "아저씨가 여기 부처님인가 봐요. 어쩜 귀가 그렇게 부처님 귀를 닮았어요?" 하니 아저씨는 쑥스러운 듯 귀가 좀 크다 하고 말씀하신다. "와아, 아저씨 사진 한 번만 찍어도 돼요?" 아저씨는 멋적은 얼굴.

그러고나서 길목수 형님과 궁금한 것을 서로 얘기나누고 있으니 아저씨가 끼어들어 일러주셨다. 우리가 나누던 얘기는 대충 부연 같은 건 최근에 한 번 보수를 하면서 새로 간 것 같다는 둥, 서까래도 어떤 것들은 신재를 쓴 것 같다는 ……. 그러니 아저씨는 몇 해 전 수리를 싹 했다면서 그 때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부연도 그렇고, 평고대, 활주 같은 것들을 새로 해다 넣었다면서 말이다. 그런데 단청이라는 것은 아무리 비슷하게 하려 해도 그 오랜 세월의 빛깔을 아주 똑같이는 낼 수 없는지 조금 달라졌다며 말이다.

이제 극락전에서 나오면서 법당 앞에 있는 5층석탑을 본다. 사진은 법당 안에서 문 바깥으로 내다보며 찍었던 거.

석탑 양식을 배울 때 이 무량사 오층석탑은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백제양식과 신라양식이 혼합되어 있는 것이라 배웠더랬다. 옥개석 처마의 폭이 기단을 넘지 않는다는 점이 신라양식이라면 단층 기단을 썼다는 점, 그리고 귀꽃이라 하는 옥개석 처마 끝의 밑부분이 함께 솟아 있다는 점 들은 백제양식에서 온 것이다. 탑신의 1층에서 금동 아미타여래좌상, 지존보살상, 관음보살상의 삼존상이 나왔다는 거나 3층에서 금동보살상이 나온 거, 5층에서 사리장치가 나왔다는 거는 이 안내판을 보고 알게 된 것이다. 1, 3, 5 홀수로 가는구나 1, 3, 5!

보다시피 탑신부가 다섯 층인 5층석탑이다. 기단부는 우주와 탱주, 면석과 갑석, 기단대석이 갖춰진 가구식 기단으로 단층이다. 요것은 백제 양식을 따른 것.맨 아래 1층의 옥개석 처마가 기단갑석보다도 내밀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신라계에서 이어받은 거. 옥개석 처마 끝이 살짝 올라가 있는데, 밑면도 함께 따라 올라가 있다. 요건 다시 백제 양식을 따른 것.

전체적으로 보면 옥개석에 비해 탑신이 조금 낮다 싶지만 전체적인 모양은 수수한 모습이다. 상륜부는 보주형.

각도를 좀 달리해서 본 것인데, 이렇게 본 까닭은 옥개석의 밑면을 보기 위함이다. 백제시대의 전형양식 중 하나인 정림사지 석탑에서 보면 옥개석의 밑부분이 이처럼 층을 지고 있는 것을 목조건물에서 공포부가 처마내밀기하는 모습을 석조로 번안해 표현한 것이라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자리에서는 이러한 모습이 마치 전탑에서 내어쌓기를 하는 모습에서 온 것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그렇담 그건 신라계에서 온 거라 볼 수 있지 않은가? 글쎄, 확인하고 싶어 이 부분 까페 질문방에 교수님께 물어보는 글을 올렸다. 글쎄,혼자 이 궁리, 저 궁리를 해보며 짐작해보는 건 옥개석이 하나의 통돌이어서 그 밑을 층이 지게 깎아놓은 거면 전돌의 내어쌓기에서온 모습인 거고, 옥개석 밑에다가 받침돌을 따로 두세 겹 두었으면 그건 목조의 처마내밀기 방식을 석조로 번안한 모습이 되는 게 아닌가 싶다. 아직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이 무량사 5층석탑 옥개석들의 밑면을 기억해두기로 한다.

이번에는 무량사 극락전과 무량사 오층석탑과 한 줄로 놓았을 때 맨 바깥쪽에 있는 무량사 석등이다.

무량사 석등은 강의시간에 공부하면서 고려시대 전형양식으로 배웠다. 통일신라시대보다는 초각이나 양식이 좀 더 간소해졌다 했는데 이를테면 하대석의 복련이나 상대석의 악련이 통일신라시대에 비해 살짝 내반되거나 길쭉해진 모습이라거나,통일신라시대 석등에서는 보이던 간주석 밑의 계단식 괴임석이 고려시대의 것에는 없어진 모습 들이 그렇다.그리고 옥개석의 귀꽃은 통일신라 시대의 것보다 좀 더 강조되어 있는 모습이 고려시대 석등의 또 한 가지 특징이겠다. 그 밖에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이어져온 전형 양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사각의 지대석 위에 하대석부터 중대석(간주), 상대석, 화사석, 옥개석이 팔각으로 올라가고, 특히 화사석은 팔각으로 되어 있으면서 사면에 창이 나 있다. 이와 같은 고려시대 전형양식에는 무량사 석등과 금산사 석등, 나주 서문석등 들이 사례로 들어져 있는데, 무량사 석등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어찌된 일인지 석등은 부분부분 살피며 사진을 찍어오질 않았다. 으이그, 꼼꼼하질 못해가지고는 ㅠㅠ. 하지만 이 사진 하나로도 이것의 특징이라거나 이것이 대표하는 고려시대 전형양식을 살펴보기에는 크게 모자라지 않겠다. 한 가지 실제로 가서 보면서 좀 더 또렷이 알게 되었다면 팔각, 팔면의 화사석에서 창이 난 네 면은 좀 넓은 면이고 나머지 네 면은 마치 기둥이 서 있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좁은 면이었다는 거.

아, 이거는 뭐였냐 하면 극락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버려진 것처럼 이런돌들이 여럿 있었는데 무언가 보니 아마 예전에어딘가에 쓰였던 구부재인 것 같았다. 이건주초같은데 기둥이 서는 자리 주좌가 선명히 보이고, 고막이 초석 쪽으로 이어지는 부분들도 주좌처럼 살짝볼록하게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건 아마 어느 탑 같은 곳에 쓰인 면석 같았다. 이것 역시 우주, 탱주의 흔적이 선명하게 보였으니 말이다.


이건 인터넷에서어느 까페 게시물에 배치도가 나와 있어 퍼온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극락전 뒤쪽으로는 더 그려져 있지가 않네. 아무튼 그 게시물을 올린 사람은 아마 보수 공사를 할 때 갔던 모양이었다. 그 때 사진들이 있는 걸 보니.

솔직히 이렇게 답사를 다니기 전까지만 해도 절이라는 곳이 이렇게 좋은 줄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절이나 절이면 다 비슷한 절이라고만 느꼈는데, 절마다 다들 나름의 숨결과 향기가 있는 것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여기 무량사는 참 좋았어. 정말 마음에 든다. 언제라도 다시 찾아오고 싶은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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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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