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답사 2

굴 속의 시간 2010. 3. 31. 21:04

마곡사 2

자, 이제 다시가 보자. 오층석탑 지나 대적광전 지나 대웅보전으로 계속 가보자. 고고씽!

요사채를 지나 경내 한 가운데로 들어왔다. 보이는 것이 마곡사 5층석탑, 그 뒤가 대적광전, 그리고 대적광전의 지붕 위로 조그맣게 보이는 지붕이 대웅보전의 것이다. 이렇게 경내 한 가운데에 5층탑과 대적광전, 대웅보전이 일직선을 이루며 서 있다.

마곡사의 5층석탑은 딱 봐도 우리 탑 양식과 뭔가 다르다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가장 특징적인 거라면 상륜부에 풍마등을 설치한 것인데, 라마교의 묘탑과 같은 형상이라던가. 이러한 풍마등은 전세계에 세 개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하는데 중국 북경의 묘응사 백탑과 오대산 탑원사 백탑 상륜부가 그렇고, 바로 이곳의 마곡사 5층석탑이 또한 그렇다고 한다.

이층 탑신부에는 사방을 지키는 사방불이 새겨져 있다. 옥개석의 처마 끝이 올라간 모습은 우리 전통 탑에서도 많이 보아왔지만 왠지 느낌이 다르다. 옥개석이 좁은 것에 반해 추녀마루의 반전이 심해 안정감이 떨어진달까, 그러면서도 1층부터 5층까지 탑신의 체감률은 조금밖에 되질 않아 상승감이 강조되어 있다. 그래서 강의시간에 교수님은 '비례 체계가 우리 탑 양식과 많이 다르고 수직성이 강조된 형태'라설명한 바 있다.

2층 기단을 쌓은 것은 우리 전통 양식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처럼 기단이 높아진 것은 통일신라시대에 들어 감은사지 동/서 3층석탑에서부터 보이는데, 이것은 탑의 상징성을 강조하느라 그러하다고 강의시간에 배운 것으로 기억한다. 통일신라에 들면서 사찰의 형태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쌍탑일금당 양식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서탑에 있던 중심성이 금당으로 옮겨가면서 상대적으로 약화된 탑의 상징성을 더욱 부각하느라 기단을높게, 2층으로 쌓았다는 것이다. 탑이라면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곳, 부처님을 뜻하는 것이니 아무리 금당이 중심이 되는 사찰 배치가 되더라도탑의 상징성을 높이려는 의도였을 거라며 말이다. 그래서 쌍탑일가람 양식을 보이는 감은사지 3층탑 이후로 만들어지는 석탑들은 대부분 기단이 높고, 이중으로 쌓은 모습을 보인다.

어쨌든 이 마곡사 5층석탑도 기단부를 보면이중으로 쌓고 있다. 아래부터 보면 지대석 혹은 하대석 같은 것이 평평한 바닥을 만들어주고 있고, 그 위에 1층 기단대석과 기단면석, 기단갑석 다시 2층의 기단면석과 기단갑석이 쌓여 있는 것이 보인다.

각 층의 옥개석에는 네 귀마다 풍경을 달았던 흔적이 보이는데 지금은 5층 옥개석에만 풍경 하나가 달려 있다. 대광보전이 불에 탔을 때 이 탑도 함께 훼손이 많이 되었다는데 옥개석이나 탑신에 깨져 나간 것들이 아마 그 때의 화재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마곡사 5층석탑 앞에 써 있는 표지판이다. '원나라 라마교의 영향, 풍마등, 고려시대 특수양식 가운데 하나' 정도가 이 탑을 기억하는 핵심 키워드가 된다 하겠다. 그런데 이 안내판의 설명 끝에 경천사지 석탑과 원각사지 석탑 또한 원나라 탑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는데, 솔직히 거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강의시간에도 경천사지 석탑과 원각사지 석탑을 다루기는 했다. 이 석탑들의 특징이라면 추녀골이니 처마골 따위 아주 세부적인 초각까지 섬세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가능했던 것은 우리나라의 석탑들은 대부분 화강암으로 만들었는데, 이 두 개의 탑은 대리암으로 만들었다는 것. 대리암이라는 것은 돌 자체가 무르기 때문에 조각하기가 아주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럽에 세부 묘사가 잘 된 조각이 많은 까닭도 거기에 있는 것이고 말이다. 거꾸로 서양에서 우리 석조물을 보고 놀라는 까닭 또한 화강암을 조각해 만들었다는 것에서 경이로워한다는 거라던가. 암튼 대리암은 처음 돌을 떠낼 때는 아주 물러서 조각하기에 좋다는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 어느정도 딱딱하게 굳게 된다면서 말이다.

이 정도 설명으로 경천사지 10층석탑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그런데 이 대리암 석탑들의 단점이라면 산성비를 맞으면 백화현상이 일어나 녹아내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석탑 모두 바깥에 세워두지 못하고,경천사지 10층 석탑은 국립중앙박물관 안에 두었고, 원각사지 10층석탑은 파고다 공원에 있지만 비를 맞지 않게 보호각을 씌워두었다고 말이다. (원각사지 10층석탑은 조선시대(1465)에 만든 것으로 경천사지 10층석탑을 그대로 베낀 거라던가.)

어쨌든 경천사지 10층석탑은 원각사지 5층석탑과 함께 고려시대 특수양식을 보이는 석탑으로 분류가 되어 있었다. 이것 밖에도 강릉 신복사지 석탑과 월정사 8각9층석탑 또한 고려시대 특수양식 석탑의 사례라 할 수 있는데, 강릉 신복사지 석탑은 이중기단에 3층, 보개형 상륜부를 지닌 탑으로, 각층의 탑신들에 따로 탑신의 괴임석을 별석으로 두고 있다는것이 특징이라 했다. 그처럼탑신 밑에 괴임석을 따로 두는 것은 부도탑에서 많이 보이던 모습으로초기에는 일층에만 보였는데강릉의 신복사지 석탑에는 모든 층, 심지어는 이층 기단 밑에도 들어가 있다. 그리고 월정사 8각9층석탑은 팔각이라는 것만으로도 특이하지 않은가. 이 팔각탑은 고구려 지역에만 있어온 탑으로 고구려의 목탑양식 석탑이라 하기도 한다. 묘향산에 있는 영변 보현사의 8각13층 석탑과 비슷하다는 점도 기억해둘만 한 것.

5층석탑 뒤에는 바로 대적광전이 있다. 이 건물 역시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임진왜란에 불탄 것을 1651년에 대웅보전과 함께 중건했다가 1782년 다시 소실된 것을 1788년 재건하여 지금껏 남아 있는 거라 했다. 사진으로 보이는 것처럼 자연석 기단 위에 정면 다섯 칸, 측면 세 칸으로 구성된 팔작지붕 건물이다.

여기에서 잠깐 사찰에서의법당들의 이름을 확인하고지났으면 한다. 몇 번 들었으면서도 자꾸만 헷갈려.부석사 무량수전을 공부하는 강의 때 잠깐 듣기는 했는데 마침 적어놓은 것이 있어 다시 한 번 정리.

대웅전(大雄殿) / 대웅보전(大雄寶殿) - 석가모니불을 모심

② 극락전(極樂殿) / 극락보전(極樂寶殿) / 아미타전(阿彌陀殿) / 무량수전(無量壽殿) - 아미타불을 모심

③ 대적광전(大寂光殿) / 보광전(寶光殿) / 보광명전(寶光明殿) - 비로자나불을 모심

④ 미륵전(彌勒殿) - 미륵불을 모심

⑤ 약사전(藥師殿) - 약사불을 모심
⑥ 관음전(觀音殿) - 관음보살을 모심

⑦ 명부전(冥府殿) / 지장전(地藏殿) / 시왕전(十王殿) - 지장보살과 명부시왕을 모심
⑧ 나한전(羅漢殿) - 부처의 제자인 나한(승려)을 모심. 16나한, 5백나한
⑨ 영산전(靈山殿) / 팔상전(八相殿. 捌相殿) -석가불과 팔상도를 봉안

이 가운데 해탈문과 천왕문으로 들어오기 전 사찰의 서쪽 언덕에서 가본 곳이 영산전과 명부전이었고, 지금 사진으로 보고 있는 건물이 대광보전인 것이다. (으잉? 그런데 이게 뭐야. 나는 저 위에 나오는 대적광전으로 또 착각을 하고 있었나 보다. 그게 아니잖아. 대광보전은 그럼 뭐냐구. ㅠㅠ 여기저기를 찾다보니 이 마곡사 대광보전에 모셔진 불상이 비로자나불이라 하니 대적광전이라는 것도 비로자나불을 모신다는 대적광전, 보광전, 보광명전과 비슷한 거기는 한가 보다.) 불교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보니 그래봐야 여기 메모해둔 정도로밖에 구분할 줄을 모르지만 그래도 아예 아무 것도 모르고 있던 것보다야 대충은 알겠다. 처음에는 대적광전이 뭔지 대웅보전이 뭔지, 그 이름이 그 이름 같고 했는데 이 정도로나마 구분을 할 줄 알아야……. 물론 불교에 대한 더 깊은 이해가 있으면 훨씬 도움이 되기야 할 것이다. 어차피 건축물이라는 것은 그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삶의 양식을 담아내는 구조물이고, 그들의 의식과 관념을 땅 위의 구조물로 표현해낸 것이라 할 수 있기에 사찰 건축을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불교에 대한 이해를 어느만큼 하는가에 따라 크게 좌우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까닭으로조선시대의 궁궐이나 서원, 향교, 사대부의 가옥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교에 대한 공부가 필요할 테고 말이다. 그거야 당연하지 않겠나. 학교 건물을 이해하려면 학교라는 공간을 어떤 사람들이 어떠한 용도와 목적으로 지었고, 어떠한 기능을 했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처럼 사찰 건물을 이해하려면 그 건물을 지은 사람들의 필요와 의식, 활용 방법 들을 알지 못하는 이상 그 구조의 양식과 특성을 이해하기란 요원하기만 할 테니 말이다.

정면의 다섯 칸은 모두 꽃살을 가진 삼분합문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사진에서 또 한 가지 이 건물의 특이한 점으로 보이는 것은, 어칸의 평주 위에 안초공이라는 부재가 있는데, 솔직히 그 자리에서 사진을 찍을 때까지만 해도 저것을 눈여겨 보질 못했다. 지금에서야 다시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아, 저게 바로 강의 시간에 설명해주던 그 용두형안초공이라는 거구나! 하고 눈치채게 된 것인데 왜 그 때 알아보지 못하고 제대로 보질 못했을까 아쉬운 마음이 든다.

안초공에 대해 맨 처음 설명을 들은 것은 창경궁 명정전의 공포도를 보면서였다. 이 때는 초기 형식인 나비형안초공이 공포도에 나와 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것은 기둥머리에서 창방을 감싸면서 평방의 밑부분을 살짝 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이 하는 기능이라면 기둥머리와 평방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한 부재라 했는데, 창경궁 명정전과 명정문이 우리 궁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1616)로 남아 있는만큼 여기에 쓰인 나비형안초공은 안초공으로 치면 아주 초기의 것이 된다. 그러던 것이 조선 후기로 하면 파련 초각이 되어 있는 파련형안초공이라는 것으로 바뀌게 되는데, 경복궁 근정전이나 창덕궁 인정전, 덕수궁 중화전, 화성 팔달문과 장안문 들에 쓰인 이 파련형 안초공은 나비형안초공보다 크기가 훨씬 크다. 나비형안초공이 창방을 감싼 기둥머리에서 평방 밑을 살짝 물고 있다면, 이 파련형 안초공은 평방 뿐 아니라 주두와 공포까지 잡아주니 말이다. 다시 말해 기둥머리는 물론이고 창방부터 평방까지 모두 감싸면서 그 위에 있는 주두까지 잡아주면서 공포의 밑부분까지도 지지해준다는 것이다.그러니 단순히 기둥과 평방의 이탈을 방지하는 기능을 넘어 공포를 지지하는 역할까지 기능이 커진 것이다. 귓기둥 위에서는 귀한대가 처지는 걸 막기 위해 안초공을 쓰기도 한다면서 말이다. 강의실에서 이러한 설명을 하면서 교수님은 주로 이러한 안초공이 궁궐 건물에 쓰인다 하면서 사찰 건물에서는 간혹 어칸의 기둥 위에 쓰이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그런데 특이하다면 궁궐 건물에서처럼 파련형 초각이 아니라 용머리를 초각한 모양이 많다면서, 한 쪽에는 여의주와 삼지창을 물고 있는 용머리를, 또 한 쪽에는 물고기를 물고 있는 용머리를 초각하거나 하는 예를 들었더랬다.

아! 그런데 지금 사진을 보면서야 용두형안초공을 보게 된 것이다. 강의시간 교수님이 말하던 걔가 바로 얘인 것이다. 확인하는 김에 아예 다져놓고 가자. 건축용어사전을 보면 이렇게 나와 있다.

안초공

안초공(按草工)은 창방과 직교하여 기둥머리에서 빠져나와 평방과 주두 또는 주두와 도리까지 감싼 부재를 말한다. 안초공은 주심상에서만 생기며 평방과 주두 등을 일체화 시키는 역할과 함께 장식적인 효과도 있다. 안초공은 창덕궁 인정전, 화성 팔달문 및 장안문 등 규모 있는 다포형식 건물에서 볼 수 있으며 사찰 대웅전 등에서는 파련형 안초공 대신에 용을 입체적으로 조각해 사용하기도 한다.

안초공은 평주에만 사용하지 않고 고주에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는 평주와 고주를 구분하여 평주안초공, 고주안초공이라고 부른다.

좀 더 자세히 정리되어 있는 것을 마침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볼 수 있었다. 여기에다 그 내용을 끼워넣기에는 좀 긴 듯 하고 따로 페이지를 열어 옮겨두었다.아, 이로써 안초공완전정복!

또 한 가지 이 정면 어칸 위의 사진을 보면서 덧붙이고 지나자면, 대광보전이라고 쓴 저 편액 글씨를 쓴 사람이 아주 유명하다는 것이다. 미술사 쪽으로 아는 것이 없어 나로서는 생소한 이름이기만 한데 '조선 후기 화단의 거장'인 표암 강세황의 글씨라고 소개되어 있다. 이 뿐 아니라 마곡사에는 많은 명필가들의 서체가 있는 것으로 이름나 있는데 대웅보전은 신라의 명필 김생, 영산전은 조선 세조의 글씨라 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유명한 거라면 김구가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인 장교를 죽인 뒤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해 이 절에 숨어 승려로 지냈다 하는데, 지금도 대광보전 앞쪽에는 김구가 심었다는 향나무가자란다고 한다는 거다.

측면에서 찍은 사진이다. 귓기둥이 무지하게 굵은 것이 보인다. 그것과 나란히 있는 기둥과 견줘보면 차이가 확 드러난다. 출입을 위한 문이 측면에 조그맣게 나 있고, 건물 앞으로 좀 전에 살펴보던 5층석탑이 보인다.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나무가 있는데 김구가 심었다는 향나무가 저건가? 모르겠다. ㅠㅠ 알고 갔으면 찾아봤을 텐데 이제야 자료를 살피면서 알게 된 거라 갸우뚱거리기만 할 뿐.

지붕 밑의 공포들을 보면 바깥으로 3출목이 나와 있다. 그리고 법당 안에서 찍은 내부 사진(아래)을 보면 안에서는 출목이 넷인 외3출목, 내4출목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사진을 찍을 때는 솔직히 4출목이나 되는 내부 공포에 곡과 단청으로 어지럽게 보이는 대량과 충량들, 그리고 우물천정들까지 해서 일단 찍어놓고 보자 하면서 셔터를 눌렀던 것 같다. 이렇게 화려하고 복잡해 보일 때는 솔직히 구조가 눈에 들어오기보다는 무얼 봐야 할지 모르게 어지러워보이기만 해. 그렇게 정신이 없는 속에서 아마 내가 찍으려 했던건 충량이 나가는 모습을 나중에 사진으로 좀 더 자세히 봐야겠다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자니 눈이 커지며 이상한 점이 보인다. 잠이 확 달아난다.안에 있는 기둥들의 높이가 서로 달라! 약간 구부러져 있는 대들보를 사이에 두고 있는 앞열의 내진과 뒷열의 내진의 높이가 다른 것이다. 대들보가 앞열에서는 기둥 머리 위를 타고 있고, 뒷열에서는 기둥 중간에 꽂혀 있다.말하자면 뒷열의 내진주는 내진고주가 되어 직접 중도리의 장혀를 받아줄만큼 높이서 있다. 그리고 앞열의 내진주는 대들보를 머리에 이고 있으니바깥 기둥들과 높이가 같은 것이다. 아니, 바깥 기둥들보다는 조금 더 높다. 바깥 기둥들은 기둥 머리가 직접 보를 받을 수 없고, 기둥 위로 평방도 있고 주두도 있고, 그 위로 공포가 짜 올라가면서 보머리를 받는 것이니 이 내진기둥은 바깥 기둥보다는 높다. 그러나 뒷열의 내진고주는 그보다 훨씬 높다. 기둥들의 높이가 이처럼 바깥 기둥과 앞열의 내진기둥, 그리고 뒷열의 내진고주까지 모두 점점 높아지는 것이다. 세상에나, 이 일을 어쩐댜.이걸 그곳에 직접 가서 볼 때는 왜 못봤을까? 그냥 눈이 휘둥그레져서 여기저기 사진만 몇 컷 찍다가 나온 것만 같아. 으…… 이 건물의 안에 들어가서 찍은 사진이 모두 석 장인데 그 석 장의 사진을 아무리 뜯어봐도 상부구조를 제대로 보여주는 것은 없어. 아뿔싸! 정작 제대로 봐야 할 것을 못 본 거이다. 겨우겨우 석 장의 사진들을 다시 보고, 또 보고, 귀퉁이에 보이는 부분과 그것으로 유추해보면서야 어느정도 머릿속으로 짜맞출 수 있을 것 같다.

차근차근 해보자. 일단 사진기에 확인되는 사실부터 하나하나 찾아보고, 그래도 보이지 않는 부분들은 사진에서 찾을 수 있는 어떤 단서에서 출발해 맞추어 나가자. 일단 이 사진에서는 뒷열의 내진고주에 충량 한 쪽이 꽂혀 있으면서 측면으로 굽어지면서 내려가는 모습이 확인된다.

자, 그렇다면 이 사진은 또 뭔가? 이 또한 분명히 충량을 찍은 사진이다. 대량 위를 타고 있는 충량의 머리가 용처럼 초각이 되어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어서 좀 더 끌어당겨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아, 그런데 좀 전의 사진에서 볼 때는 높이 올라간 내진고주의 기둥 가운데에 충량 끝이 꽂혀 있고, 거기에서부터 휘어져 내려가지 않았었나? 그런데 여기에서 보이는 충량은 기둥 위에 올라탄 대들보, 그 대들보에 올라탄 자리에서 측면으로 내려간다. 위에서 본 충량과 다르다. ㅠㅠ 으, 점점 머리가 아파온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사진. 으아 답답하다. 마치 내가 무슨 탐정이라도 된 듯 몇 장의 사진으로 건물 전체의 진상을 알겠다고 덤벼드는 꼴은 아닌지. ㅠㅠ 이 사진은 대광보전 내부사진 석 장 가운데 맨 앞에 올렸던 것에서 약간 각도를 틀어 찍은 것이다.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 보자.여기에서 가장가까이 보이는 기둥은건물의 정면 쪽 내진기둥이다. 대들보를 받치고 있다. 그런데 그 대들보위로 직각 방향으로 무언가가 지나간다. 그 끝을 보니 아주 조그맣게용의 머리가 보인다. 밑에서 보는 용의 머리다. 아, 그렇다면 그 용의 머리는 두 번째 사진에서 보았던 그 용의 머리,앞열의 내진기둥에서는 이렇게 대들보를 이고, 그 위에서 충량이 올라타 측면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휴우, 하나 해결.

그 다음으로는 조금 전에 봤던 기둥 머리 위를 타고 지나가는 대들보를 보자. 그 대들보는 건물의 뒷면 쪽으로 가다가 어딘가에 꽂혀 있다. 이 사진에서는귀퉁이에서 아주 살짝 보이고 있지만, 대들보가 꽂혀 있는 그것은 첫번 째 사진에서 보던 내진고주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 내진고주에는 대들보만 꽃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직각 방향으로 또다른 무언가가 꽂혀 있는 것이 정말 손톱만큼 보인다. 그것은 첫번 째 사진을 보며 확인했던 그 충량이다.

아아, 이렇게 하여 충량 하나는대들보 위에서, 또 하나는 내진고주의 중간에 꽂혀 있으면서 각각 측면으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 충량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들보의 한 쪽은 기둥머리 위에 얹혀져 있고, 나머지 한 쪽은 내진기둥에 꽂혀 있다. 내진기둥들이 서로 높이가 다르다는 것. 이것이 마곡사 대광보전이라는 건물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첫번째 비밀, 열쇠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렇다고모두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지?슬프게도 아니올시다이다.충량이 나오고 있는 쪽에서는대들보를 받치는 기둥과 대들보가꽂혀 있는 기둥두 개가 서로 높이가 다른 채로 서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사진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보다 더 안 쪽, 말하자면 어칸과 협칸 쪽을 보면 뒷열의 내진고주만 있지 앞열에는 기둥이 아예 보이지 않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대들보를 받아주고 있던 그 기둥이 말이다. 이건 또 어떻게 된 일인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부 사진을 왜 그것밖에 찍지 않았던가를 땅을 치고 후회하며, 머리를 쥐어뜯어 답답해하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인터넷 사진들을 검색해보았다. 혹시 누구라도 무언가 단서를 보여줄만한 사진을 찍어올린 것이 있지 않을까? 백여 개가 넘는 게시물들을 검색해 열어보다가 드디어 단서가 될 만한 사진을 발견했다. 유레카! 아니, 심봤다!

사진이 바로 그것인데 이 역시 전체를 비춰주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좀 더 훤히 보여주고는 있다. 그렇담 내진 기둥들을 보자. 측면의 벽체가 있는 쪽에서는 따로 말할 것이 없겠다. 세 칸으로 되어 있는 측면부를 구성하는 바깥기둥들이 제 위치에 서 있다. 그리곤 퇴칸을 이루는 기둥열에서 보자. 그 부분이 앞서 머리를 싸매고 뜯어본 바로 그 부분이다. 대들보가 지나가는데 앞열에서는 대들보를 받아줄 정도 높이의 기둥이 서 있고, 뒷열에서는 내진고주가 중도리까지 받아줄 높이로 서 있다. 퇴칸 쪽이니 그곳에서는 측면으로 나갈 충량들이 필요하다. 앞열에서는 기둥이 받아주는 대들보 위를 올라탄 충량이 보인다. 용머리가 보인다. 그것이 측면부의 기둥 쪽으로 나갈 것이고, 뒷열에서는 내진고주 중간에 꽂혀 있는 충량이 또한측면부의 기둥으로 나가는 것이 보인다. 그 다음열을 보자. 조금 전 그 기둥열과 함께 협칸을 이루는 기둥열이다. 다시 말해 어칸과 협칸의 경계가 되는 기둥열이다. 이 기둥열에는 내진기둥이 감주가 되어 있다. 내진고주에 꽂혀 있는 대들보는 그대로 나가서 정면 외평주 쪽으로 바로 이어진다. 그렇다 하여 구조나 하중에서 문제될 것은 없다. 대들보라는 것 본연의 역할이 바로 기둥을 감주해주는 것 아니겠는가. 대들보는 그 자체로 하중을 받아 바깥 기둥으로 전달해주면 그 뿐인 것이다. 그런데 협칸과 퇴칸을 가르는 기둥열에서는 왜 굳이 내진기둥을 두었을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충량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량과 직각 방향으로 충량이라는 것을 측면 기둥 쪽으로 빼야 하기 때문에 그 부분에는 훨씬 더 하중이 몰리는 것이다. 충량이라는 것이 뭔가? 팔작지붕에서 합각부와 측면 서까래들의하중을 받아주는 것이 바로 충량 아니었나? 그러니 충량이 있는 자리에는 대들보 밑으로 기둥을 세워 구조면에서 더욱 보강을 해준 것이었다. 아, 감격! 감동! 만세만세 만만세! 이 복잡오묘한 것을 사진 몇 장으로 알아내고 말았다니! 충분히 자축과 자뻑을 해도 좋을 일지 않은가.

그러나 이제 확인한 것은 측면 벽체가 있는 기둥열부터 해서 겨우 세 곳 뿐이다. 대광보전은 모두 다섯 칸 건물이니 측면벽체까지 치면 기둥 열은 모두 여섯이 된다. 그렇다면 지금 확인한 것이 그대로 대칭이 되어 반대 편을 이루고 있는 걸까? 불행하게도 그건 아니었다.


사진은 또 뭐란 말인가? 마곡사 대광보전은 비로자나불이 정면에 안치되어 있지를 않고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마치 부석사 무량수전의아미타불이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말이다. 그렇다면불상이 있는 불단은 서쪽 협칸이 될 것이다. 그리고 불단 뒤가 서쪽 퇴칸. 그런데 기둥들은 어떤 모습인가? 일단불단의 후불벽을 이루는 기둥은 두 개가 모두 높이 뻗어올라가는 고주로 되어 있다. (아우, 머리 아파. ㅠㅠ) 여태껏 살펴본 바로는앞열과 뒷열 모두 높이 뻗은 내고주는 없었다.벽체가 되는 측면처럼 평주들이거나 아님 한쪽은 내진고주, 한쪽은 대들보 높이까지의 내진주, 아니면 아예기둥 하나가 감주되면서 내진고주 하나만 있는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내진고주 두 개가 나란히 높이 솟아 있는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허걱.

하지만 침착하자.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대로 그대로 조합하면 그것이 이 건물의 기둥 구조가 되는 것이다. 앞서 동쪽의 기둥열 셋은 확인한 바가 있다. 이번에는 서쪽. 서쪽 역시 벽체를 이루는 측면부는 동쪽 측면부와 다를 것이 없다. 세 칸으로 분할해주는 제 자리에, 외진열을 이루는 기둥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 다음은 퇴칸과 협칸을 갈라주는 열, 사진에 보이다시피 후불벽을 이뤄주는 기둥역할까지 하면서 앞열 뒷열 모두 고주식으로 높이 올라가 있다. 그리고 협칸과 어칸을 가르고 있는 기둥열. 이곳은 동쪽에서 어칸과 협칸을 가르는 기둥열처럼 앞열의 기둥은 감주된 채로 뒷열의 내진고주 하나만이 대들보를 꽂아 정면의 기둥 쪽으로 내보낸 형국이다.

어려울 것 없다. 정리가 다 되었다. 다섯 칸 건물의 양쪽 측면 벽체 쪽은 가장 평범하게 기둥들이 서 있다. 그리고 내부공간에 들어오면 내진기둥의 뒷열은 모두 높이 올라가는 고주로 되어 있다. 이 때 퇴칸과 협칸을 가르는 자리에서 동쪽은 내진고주와 함께 대들보 높이만큼의 기둥이, 서쪽은 후불벽을 이루느라 앞열에도 내진고주가! 어칸과 협칸을 가르는 자리에서는 동쪽이나 서쪽 모두 앞열은 감주된 채 뒷열의 내진고주만이 서 있는 모습. 아, 이렇게 정리를 할 수 있게 되다니. 정리하고 나니까 깔끔하게 이해가 되었다.

이렇게 이해가 되고나니 여기저기 검색을 해보다가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설명 가운데 "건물의 내부는 무고주, 1고주, 2고주가 절충된 형식으로 공간구조가 특이"하다는 말도 무슨 뜻인지 알게 되는 것 같다. 이 마곡사 대광보전은 강의시간에 전혀 다루지 않은 건물이었는데 교수님 도움없이 이렇게 구조를 파악할 수 있게 되다니 지금은 내 자신이 마음껏 므흣, 기특뿌듯한 순간이다. ^ ^ 그렇다면 조금 전 설명을 따다 인용한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내용을 옮겨보면이와 같다. 하하하.

마곡사 대광보전

마곡사에 있는 조선 후기 목조건물. 보물 제802호.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51년에 각순대사가 대웅보전과 함께 중건했으나 1782년 다시 소실된 것을 1788년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석 기단 위에 앞면 5칸, 옆면 3칸의 평면구조를 가진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공포는 기둥 위로 평방을 두고 외3출목, 내4출목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살미첨차는 3앙1수식으로 앙서 위에는 연꽃 봉오리가 표현된 데 비해 뒷면에는 중첩된 교두 형태의 살미첨차가 조각되어 있다. 건물의 내부는 무고주, 1고주, 2고주가 절충된 형식으로 공간구성이 특이하며, 우물마루의 바닥에는 갈참나무 껍질로 만든 자리를 깔아놓았다. 천장은 2단의 우물천장으로 되어 있으며 대량에는 용이 그려져 있다. 불단을 서쪽에 설치하고 그 위에 비로자나불상 1구를 동쪽을 향해 앉힌 배치방법은 부석사 무량수전과 유사한 점을 보여준다.

검색하다 찾은 사진들 두 장 옮겨다 놓는 김에 하나 더 복사해왔다. 이 사진은 내진고주에 꽂히면서 내려가는 충량의 모습을 잘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것. ♪ ♩ ♬



이제 뿌듯한 마음을 안고 대웅보전으로 올라간다.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대웅보전은 대광보전 뒤로 있는 경사지에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올라 서 있다. 이러한 지형은 마곡사 대웅보전의 구조적인 특징을 설명하는 배경이 되기도 하는데, 일단 여기에서는 이렇게 경사지로 올라간다는 것만 기억해두는 것으로 넘어간다.

대웅보전 앞에 서 있는 안내판. 임진왜란 때 불에 타고 난 뒤 1651년(효종 2년)에 다시 지은 건물. 조금 전 살펴본 대광보전은 이 때 함께 다시 지었다가 다시 1782년 소실되고, 1788년에 또다시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했는데, 대웅보전에는 그러한 설명이 없다. 그러니 이 건물은 대광보전보다 이백여 년 오래된 건물인 셈.

대웅보전은 석축을 높게 쌓아올린 경사지 위에 지었다 했는데, 그 위에서도 기단을 또다시 높게 쌓았다. 기단의 형식은 석축을 쌓은 것과 재료나 기법이 비슷해 보인다. 자연석으로 밑에는 굵고 큰 것을, 위로 갈수록 조금 작은 것들을 체감있게 쌓은 모습. 사진에서 보이고 있듯이 중층건물이며 다포식이고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그리고 건물의 1층과 2층에 모두 추녀를 받치고 있는 활주들이 세워져 있다.

일층의 정면은 다섯 칸인데 어칸과 협칸의 폭은 같고 그에 비해 협칸이 좁다. 주상포들 사이에 있는 간포의 수를 보면 어칸에는 하나, 협칸에도 하나, 퇴칸에도 간포가 하나 짜여 있기는 한 모습이다. 그런데 퇴칸의 간포는귀포쪽으로 쏠려 있어귀포와 간포가한 데 엉겨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이것이 바로온칸물림 중층건물로서의 마곡사 대웅전이 갖는 특징적인 모습이겠는데 이렇게 슬슬 그 면모가 보여지고 있다.

이 사진은 정면에서 봤을 때 일층 오른쪽 귀포 부분이다. 귓기둥 위에 평방이 있고, 그 오른쪽으로 바짝 붙어 있는 주두가 보인다. 간포를 짜올리는 주두가 되겠는데 그 위에 있는 첨차들을 보면 간포의 첨차와 귀포의 첨차가 서로 붙어 있어 별첨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다. 조금 떨어뜨려 놓아도 될 텐데 너무 붙여 놓은 것 아닌가?

그렇지가 않다. 퇴칸에 있는 간포가 귀포와 너무 붙지 않게 하려고 띄워 놓게 되면 또다른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포벽부 간격의 일정함인데, 이 포벽부의 간격이라는 것 또한 시대에 따른 양식과 함께 설명되어지는 문제이다.

강의시간 입면양식의 구성에 대한 공부는 크게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우선 우리 전통건축의 특징이라 할 만한 귀솟음이랄지, 안쏠림 같은 기법에 대해 살펴보았고, 그 다음으로는 기둥 양식에서 배흘림과 민흘림, 흘림없는 기둥 그리고 원목을 그대로 쓴 도량주로나누어 살펴보았다. 그 다음에 본 것이 칸살이 방식으로 칸들의 폭을 어떻게 설정하는지에 따라 몇 가지 분류를 해보았고, 문과 창호를 쓰는 양식에 따라 살펴보기도 했다. 그 다음으로 또 한 가지 살펴본 것이라면 바로 포벽의 구성에 대한 것인데, 포벽 구성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다포식 건물의 경우에서 포벽과 공포와의 관계 설정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달라졌는가 하는 것에 초점을 둔것이었다.주심포계나 익공계 같은 경우는 간포라는 것이 없으니포벽부의 구성에 대한 것은 다포계 건물에만 해당될 터이니 말이다.

포벽의 구성은 크게 조선초기에는 포벽의 의장성을 중요시여겼다는 것이고, 조선후기로 가면서 포벽이 아니라 공포 자체의 의장성을 더 의식했다는 것으로 나눠볼 수 있겠다. 사실 칸살이가 일정할 때는 어느 쪽으로도 문제될 것은 없다. 어느 칸에서나 동일하게 기둥자리에 주상포가 올라가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짜는 간포 또한 어느 칸에서나 그 형편이 같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살이를 서로 다르게 하면서부터 문제는 시작된다. 칸의 폭이 어떻게 되건 간에 기둥이 선 자리에는 그 위로 주상포를 올리기 마련인데 간포들을 어떻게 배치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 이 때 조선초기에는 공포 그 자체보다는 공포와 공포 사이에 빈공간으로 남는 포벽부를 더욱 중시해서 그 간격의 일정함을 선호했고, 조선후기에는 포벽부의 간격보다는 공포 그 자체를 살리는 것을 더 선호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포벽부의 간격을 더욱 중시하던 때는 전체 폭이 일정하고, 기둥 위에는 주상포가 짜여진다는 조건들이 있기 때문에 그 간격의 일정함을 갖기가 상대적으로 어렵고 까다로울 수밖에. 그러다보니 상대적으로 작업 오차가 발생하기 쉽고, 포벽을 고려하려다 보니 주상포의공포 자체가 좌우비대칭을 보인다거나 (ex : 창경궁 명정전의공포)또는여기 마곡사 대웅보전에서 보이는 것처럼 귀포 쪽에서 공포들이 몰리게 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아주 드문 경우 전등사 대웅전의 측면처럼 아예 기둥열과 상관없이 공포와 포벽을 모두 일정하게 배치하는 경우도 있다.다시 말해 기둥 위에 주상포가짜여진다는 일반적인 전제를 깨뜨리고, 전체 측면의 넓이를 공포의 수로 나누어공포와 포벽이 모두 일정하게 짜여지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기둥 위로 평방이라는 부재가 놓이고, 공포는 그 평방이라는 받침재 위에서 새로 짜올라지게 되기 때문인데, 이렇게포벽을 구성하게 되면 기둥 열과 공포 배치가 전혀 따로 놀게 되어 짜임성이 떨어지고, 부재들의 이음이 어긋난다고 한다.(사실 이 부분은 강의시간에 필기한 대목인데, 짜임성과 부재들의 이음에 왜 문제가 있다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어차피 평방 위에서 새로 짜여지기 시작하는 것이니기둥열을 떠나 있다 해도 크게 문제될 것없는 것 아닌지……. 으이구,강의실에서 졸면서 필기했니? ㅠㅠ) 암튼 전등사 대웅전 같은 경우에서는 측면부의공포 구성이 그런 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측면의 합각부를 받아주는 구조를 보면 충량이 아니라 우미량을 이용한 팔작구성 양식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충량처럼 나오는 부재가 측면부의 공포 위에 짜여지기는 하지만 공포부 자체가 이미 기둥열을 떠났기 때문에 충량이라 할 수 없고 우미량으로 보게 되면서 말이다.(충량과 우미량을 구분하는 기준이 측면부의 기둥열에서 올라가느냐, 기둥열이 아닌 지점에서 올라가느냐였으니 기둥열이 아닌 공포부에서 올라가니그것은 우미량!) 이래서 합각부가 측면으로 크게 빠져 있기도 하고 말이다.

이 사진을 다시 보면 퇴칸의 간포를 귀포 쪽으로 치우치게 함으로 해서 포와 포 사이의 포벽부는 일정한 간격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퇴칸 폭이 협칸이나 어칸과 같은 폭을 지녔다면 문제가 될 리 없겠지만 영락없이 좁기 때문에 간포를 짜려면 어느 쪽으로든 치우치게 해야 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이랬을 때 퇴칸의 가운데에서 간포를 짰다면 포벽부는 지금보다 더 일정함을 잃게 되고 만다. 또는 간포를 귀포 쪽이 아니라 왼쪽의 기둥 쪽으로 치우치게 했다면 그 또한 마찬가지다. 일정한 간격이다가 그 일정함을 잃어버린 뒤 다시 그만큼의 폭을 되찾는 것보다는 계속 일정한 폭을 가지고 가다가 귀포 부분에서는 아예 없는 것으로 처리하는 것이 좀 더 나은 선택일 테고 말이다. 의장성이라는 것은 어차피 그 건물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기준으로 삼을 텐데, 건물의 가운데에서 보면바깥 쪽으로 몰아두는 편이 그나마일정함을 좀 더 확보할 수 있게해준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간포를 아예 생략할 수는 없겠느냐고? 그 경우 역시 포벽의 일정함은 더 크게 깨뜨려지고 만다. 아무리 퇴칸이 좁다 하지만간포를 아주 생략하기에는 너무 큰 빈 공간이 포벽으로 남게 될 테니 말이다.

이번에는 각도를 달리한 사진이다. 진작지금 정리할 내용을 염두에 두고 사진을 찍었으면 측면부가 좀 더 보여지게 찍었을 텐데 미처 그러한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찍어둔 거라 측면부가 잘 나타나지 않아 조금 아쉽기는 하다. 하지만 아쉬운대로 볼 수는 있다. 이 건물의 측면에서 봤을 때 전퇴칸의 폭. 측면에서 봤을 때의 퇴칸 폭은 정면에서 봤을 때 퇴칸의 폭보다 터무니 없이 좁다. 이래서는 귓보를 걸 때도 큰 문제로 남게 되는데 여기에서는 우선 퇴칸의 폭과 공포 배열이라는 주제만을 놓고 보기로 한다.만약 정면에서 공포와 포벽부 간격을 좀 더 일정하게 하기 위해 퇴칸을 조금 넓히고 싶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려운 까닭은 측면 퇴칸의 폭이 너무 좁기 때문이다. 현재의 상태로도 측면 퇴칸 폭과 정면 퇴칸 폭이 크게 달라 귓보나 추녀를 걸기에 문제가 되는데, 여기에서 정면 퇴칸을 더 넓힌다면 그야말로 문제는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정면 퇴칸과 측면 퇴칸 폭의 차이는 최소한으로 줄여야 할 판인데 더 넓힐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측면의 폭을 더 넓히면 어떻겠는지……. 하지만 그 또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 이 대웅보전이 입지한 곳은 가파른 경사지에 석축을 쌓아 만든 터로 측면의 폭을 뒤로 더 길게 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측면의 퇴칸들이 아주 좁아졌다. 이 건물은 온칸물림으로 올리는 중층건물이기 때문에 이층에 올라갔을 때는 정면과 측면에서 퇴칸들이 양 옆으로 한 칸씩 줄어든다. 그러니 얼마 되지 않는 측면 폭 가운데에서도 상층으로 올라가면서 버리게 될 퇴칸 공간을 최대한 줄였을 것이다.여하튼 이러한 사정으로 해서 건물의 규모를 늘리거나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오로지 공포의 배열을 통해 나름의 해법을 찾아야 했던 것인데, 이 마곡사 대웅보전에서는 퇴칸의 간포를 귀포 쪽으로 거의 붙게 하다시피 함으로써 어칸부터 퇴칸 간포 이전까지의 포벽들이나마 균등하게 가져가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서쪽에서 본 측면 모습이다. 보다시피 아랫층은 네 칸으로 되어 있는데 양쪽 퇴칸들이 무척 좁은 모습이다. 그러면서도 가운데 칸에서처럼 그 좁은 퇴칸에도 공포를 하나씩 넣어야 하겠는데, 이번에는 정면 퇴칸 때보다 상황이 더욱 열악하다. 정면에서는 그래도 간포를 귀포 쪽으로 몰면서 한 쪽 포벽은 온전한 포벽으로 사릴 수 있었는데 측면에서는 그것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니 측면의 퇴칸 위에는 공포들이 아주 다닥다닥 꽉 차 있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잘 보면 전퇴칸 쪽의 공포부나 후퇴칸 쪽 공포부 모두 앞쪽(사진에서 보기에는 오른쪽)으로 좀 더 치우쳐져 있다. 공포부 쪽이 너무 복잡하면 그것을 받치고 있는 주두들을 살펴보면 쉽게 확인이 가능하다. 아마도 이렇게 처리한 것은 시선을 고려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암튼 마곡사 대웅보전의 일층 공포부의 배열은 이처럼 깔끔하지 못하고 까다롭고 복잡하다.

사실 공포부의 배열에서 애를 먹는 구성 양식은 반칸물림을 사용한 중층건물일 경우가 더욱 심하다. 지금 보고 있는 마곡사 대웅보전은 온칸물림으로 올리는 중층건물임에도 불구하고 퇴칸 구성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드러나고 있지만, 반칸 물림인 경우에는 하층의 공포배열 뿐 아니라 그것에 영향을 받는 상층의 공포배열까지도 고려하면서 짜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은 것이다. 적어도 온칸물림인 경우에는 하층에서 상층으로 올라갈 때 하층 퇴칸 부분만을 떨군 채 그대로 올라가기 때문에 반칸물림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깔끔한 구성이 가능하다. 앞서 답사 정리를 했던 부여의 무량사 극락전이 아주 대표적인 예이다. 온칸물림의 중층건물로 어칸에서 협칸, 퇴칸으로 갈수록 간포의 수가 하나씩 줄어들면서 상층으로 올라갈 때는 퇴칸을 떨구어 아주 깔끔하게 올라가는 모습. 그에 반해 이곳 마곡사 대웅보전에서는 퇴칸 쪽에서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다. 아마 지형이 이처럼 제한되어 있지 않았다면 퇴칸을 좀 더 키우거나 할 수 있었을 텐데, 이 건물 같은 경우는 경사지에 돋운 땅이어서 공간적 제한 때문에 어쩔 수 없었으리라.

다음 사진으로 넘어가기 전에 위의 사진을 보며 또 한 가지 유심히 볼 것이 있다. 이제 공포부 배열이니 퇴칸 폭이니 하는 문제는 그만. 건물의 측면을 통으로 보겠는데,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다. 1층의 칸 수가 넷인데, 2층은 세 칸이라니? 아니, 마곡사 대웅보전은 온칸물림 방식으로 중층을 구성하는 게 아니었나? 그렇다면 양쪽 퇴칸을 떨구고 난 뒤 두 칸만이 남아야 할 텐데 어찌 윗층에서는 세 칸이 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일반적인 기준에서는 온칸물림이라 하기에도 어렵고, 반칸물림이라 할 수도 없다. 반칸물림이라면 아래위층이 동일한 칸 수를 갖게 되는 형식인데 그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렇다고 적층형 중층건물은 물론아니다.그렇다면 이 건물의 측면부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해결해야 할 수수께끼가 또 하나 나타났다.

비밀은 여기에 있다. 조금 전에 본 측면부를 실내로 들어가 안에서 찍은 모습이다. 1, 2층의 기둥이 통재 하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1층의 내진기둥열 위로 대들보가 지나가고 있고, 그 위에서 2층의 외진기둥이 서는 모습이다. 그러면서 퇴칸을 떼어낸 1층 측면의 한 칸 폭을 2층에서 반으로 가르고 있는 모습인데, 그렇다 하여 이 건물이 반칸물림의 기둥열을 갖는 것은 아니다. 온칸물림이냐, 반칸물림이냐 하는 것은 상층의 외진 귓기둥들이 하층의 내진기둥과 열을 같이 하는가 아니면 달리 하는가, 다시 말해 하층의 귓보나 귀잡이보, 또는 아예 따로 귀고주를 쓰면서 하층 퇴칸의 가운데 부분에서 구성되는가 아니면 하층의 퇴칸을 다 떨궈내고 새롭게 칸이 시작하는 귀주와 동일하게 상층의 귀주가 올라가는가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봤을 때 여기 마곡사 대웅보전의 상층 귓기둥은 하층의 퇴칸 어느 지점에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층 퇴칸은 다 떨구어낸 채로 하층의 내진 귓기둥과 같은 선상에서 올라가고 있다. 단지, 상층의 내부공간을 좀 더 짜임새 있게 가져가기 위해서 하층의 대들보 위에서 하층 기둥열과 다르게 기둥을 올려 공간을 분할하고 있을 뿐이다. (그림으로 그려 표현한다면 참 쉬울 내용인데, 글로 서술하려니 참 어렵구나. 이래서 시험장에서는 최대한 말을 아끼고 그림으로 표현하라고 강조에 강조를 거듭하는가 보다.)

이 사진도 마찬가지로 측면부를 내부에서 찍은 것이다. 조금 전의 것이 서쪽 측면부였다면 이번에는 동쪽 측면부. 자칫 오해할 수가 있겠는데 측면부라 해도 상층은 바깥에서 볼 때도 상층의 측면부가 되지만 하층은 대들보 밑으로 한 칸을 더 들어가야 측면부가 나온다. 또한 불상이 앉혀 있고, 불상의 뒤에 있는 후불벽은 1층 건물의 뒷면이 아니라 후퇴칸만큼의 공간을 두고 불벽이 세워져 있는 것이라는 것도 함께 감안해야 한다. 이랬을 때 상층의 기둥 둘이 만들어내는 칸은 바깥에서 보았을 때 상층의 가운데 칸이 되는 것이다. 온칸으로 올라가고는 있지만 하층의 기둥열을 그대로 따르고 있지는 않은 온칸물림의 모습, 이것이 바로 마곡사 대웅보전 측면부에서 상층을 구성하는 방식인 것이다.

내부에서 찍은 사진이 하나 더 있다. 바깥에서 봤을 때 상층 전면에는 광창이 나 있는데(측면은막혀 있음, 그에 반해무량사 극락전은 상층의 사면이 모두 광창)광창이 나 있는데 그 부분을 안에서 올려 찍은 것이다. 천정에는 우물천정을 가설.

사찰 답사를 다니다보면 연등 때문에 상부구조 살피기에 애를 먹곤 한다는데 정말 그랬다. 조선시대 건물들은 천정을 가설해놓고 있어 기껏해야 천정 아래까지 볼 수밖에 없는데, 게다가 연등까지 가득 출렁이고 있으니 뭘 본다는 것이 참 쉽지가 않다. 사진에서 보이는 기둥은 전퇴칸을 받치는 기둥, 이 위로 조금 전 상층의 광창을 볼 때 보였던 상부 기둥이 올라가게 될 것이다.

휴우, 이제 다시 건물 바깥으로 나왔다. 이 사진은 아마 서쪽 측면부를 돌아나오면서 그래도 공포부 사진 하나 정도는 찍어놔야지 하면서 찍었을 거다. 앙서로 초각된 외3출목의 다포, 앙서 위에는 연꽃 초각이 함께 되어 있는. 하하, 사실 이 공부를 시작하면서 '공포' 하면 정말 얼마나 공포에 떨었던가? 첨차니 살미니 주심포니 다포니 출목이니……. 건물만 나오면 공포 양식부터 보려 들었고, 고건축박물관에 가서 수많은 건물 모형을 보면서도 무얼 봐야 할지 몰라 공포들만 사진기에 담아놓았다. 그렇게 겁을 내고 매달려온 공포, 공포……. 그런데 이제는 오히려 공포 쪽은 뒷전이 된다. 물론 아직도 더 정리해야 할 것이 많고, 확실히 다져놓아야 할 것이 많지만 더 이상 공포라는 것이 그리 공포스러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공부를 시작하고 십 주가 지나면서이렇게달라질 수 있다니,스스로 생각해도 참으로 놀랍다.

이 건물이 까다로운 공포배열을 가질 수밖에 없던 까닭이 바로 퇴칸 폭이 지나치게 좁은데다 정면에서 봤을 때 퇴칸의 폭과 측면부 퇴칸 폭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었다. 그런데 그 점은 공포부 배열만 까다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건물 자체의 구조면에서 귓보를 45'로 걸 수 없게 하는 조건이 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귀한대와 추녀가 어긋나 있는 것. 사진에서는 건물의 모서리가 되는 부분에 하필이면 활주가 서 있어서 귀한대 부분을 알아볼 수 없게 하고 있지만, 평방의 왕찌 부분과 추녀가 나오는 부분만 보아도 그 각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충분히 알아볼 수가 있다. 또한 하층의 추녀와 상층의 추녀도 각이 서로 다르지를 않은가.

이 사진은 왜 찍었더라, 잠깐 멈칫했다. 역시귓기둥 위의 귀포, 귀한대 쪽을 크게 찍은 사진이긴 한데 이렇게 당겨서 찍은 까닭이 뭘까? 아하, 평방의 이음부를 보면서 찍어둔 거라는 게 떠올랐다. 이 부분은 함께 다니던 길목수 형님이 알려주어 자세히 보게 된 것인데, 가만보면 평방 하나가 하나의 부재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재 둘을 이어붙여서 쓰고 있다. (두 평방의 왕찌 결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평방 하나가 하나의 나무가 아니라는 점을 말하는 것.) 그런데 이렇게 각재 둘을 하나처럼 붙여서 쓸 때는 나비장 같은 것으로 결구를 하는 것이 보통인데, 여기에서는각재 둘을 붙여놓고 그 사이로 네모난산지(나무못)을 가로질러놓았다. 사실 그런 이음방식으로는 두 나무가 벌어지려는 것을 잡아줄 수 없을 텐데 말이다. 길목수 형님 왈, "여기도 보면대충 지은 것 같네. 이게 뭐야, 산지 하나 박아놓고. 아무 힘도 못쓰잖아, 이거……." 말을 듣고보니 정말 그랬다.

실제로도 이 뒤에 무량사를 갔을 때는이처럼 평방을 각재 두 개 이어서 썼지만 나비장으로 단단하게 묶어주고 있다는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 이거란 말이야. 아까 마곡사에서는 평방 두 개에 홈을 파서 옆으로 관통시켜버리고 말았잖아. 그런데 그런 거는 직각으로 맞출 때나 쓰는 거지, 나란히가는 두 부재에서는 아무 힘도 못받잖아. 여기 무량사에서는 제대로 했네, 저기 보이는 것처럼 나비장으로 물어줘야지. 그래야 벌어지지가 않지……." 길목수 형님은 큰 현장에서 오래도록 일을 해왔으니 아무래도 그런 부분들을 잘 보는 것 같았다. 같이 답사를 다니면서도 나는 길목수 형님이 보는 것을 못보고 지나칠 때가 많은데 그런 때마다 많이배우게 되곤 해.

아, 이제 정말 마곡사 답사를 모두 마치고 돌아나오는 길이다. 오층석탑과 대광보전, 그리고 맨 뒤 높은 자리에 이층으로 서 있는 대웅보전까지 한 화면에 다 들어오게 사진 한 방 찰칵!

거꾸로 극락교를 건넜고, 천왕문과 해탈문을 지나 바깥으로 나왔다. 이 사진에 보이는 문이 해탈문이고, 왼쪽으로 돌담 안으로 보이는 건물들 가운데 왼쪽으로 높이 서 있는 건물이 명부전이다. 그리고 아래에 있는 사진은 명부전보다 더 왼쪽으로 보이는 요사채인데 자연목을 그대로 기둥재로 쓴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사진기에 담아본 것이다.

이처럼 원목을 껍질 정도만 벗겨 자연목의 자연스러운 상태를 그대로 살려서 만든 기둥을 도랑주라 하는데, 솔직히 그 전까지는 그 자연스러움만 보고 예쁘다, 좋다 하는 생각 정도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건축의 구조면에서 보면 문제가 없지 않아. 기둥의 굵기가 일정치 않고, 기둥 자체가 휘어져 있기 때문에 일률적인 하중 전달이 어렵다는 점, 이것은 단지 기둥에서만 문제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지나면 초석에도 편심하중이 누석되어 초석 자체가 깨져나갈 수 있다 하는 것인데, 정말 그런 쪽으로는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렇게 자연목으로 생긴 모양 그대로 기둥을쓴 건물이 문화재일 경우, 그 문화재의 기둥 부분을보수하거나 교체해야 할 경우에는 더 큰 문제가 발생한다. 그와 똑같은 나무를 어디에 가서 찾는다는 말인가. ㅠㅠ 푸하, 정말로 골치 아픈 문제가 되겠구나 싶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대체재를 찾기 어려우니 수지처리를 해서 보존을 강구하는 경우가 많다 하는데 아무래도 수지처리를 하면 나무 느낌이 아니라 플라스틱 같은 느낌이 나서 그것도 좋은 방법이질 못하다며 말이다. 그러니 문화재보수기술자가 된 뒤 도랑주를 쓴 건물을 맡아 보수하게 되면 아주 골치가 아플 거라는데, 그거야 뭐 되고 난 뒤 문제 아니겠나 ㅎㅎ. 강의 시간에는 이처럼 도랑주를 쓴 건물의 사례로 화엄사 구층암과 청룡사 대웅전에 쓴 기둥들을 사진으로 살펴봤는데 저렇게도 기둥을 쓸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정말 대단했다. 특히 화엄사 구층암에 쓴 기둥 같은 경우는 휘어진 원목을 그대로 썼을 뿐 아니라 위아래를 뒤집어 놓아서 뿌리쪽이 기둥 머리가 되게 했는데 참 절묘하기도 하다. 청룡사 대웅전에 쓴 기둥 또한 어쩜 그리도 잘도 휘어졌는지 에스라인으로 집을 떠받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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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아, 이렇게 장장 사흘밤낮을 꼬박 매달려 마곡사를 다녀온 답사 정리를 마쳤다. 처음에는 사진들이나 하나하나 정리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그것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강의시간에 배운 것들이 어떻게든 다들 연결이 되고 연상이 되어 그러한 부분들까지 조금씩 정리를 해볼 수 있었다. 게다가 대광보전이나 대웅보전을 살필 때는 그 건물들만의 구조적인 특징까지 찾아내고 해결하게 되는 기쁨까지. 나름 뿌듯하고 기분이 좋다.

더러 그런 말들을 해주는 이들이 있기도 하다. 그렇게 고생을 해서 정리한 것을 누구 좋으라고 인터넷에 올려놓느냐고…….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해도 그 말뜻이 뭔지는 모르지 않는다. 그 전에는 몰랐는데얼마 전부터더러 느껴오고 있었다.잘 모르는 것을 가르쳐달라 할 때나 자료 파일을 부탁하거나 할 때, 잘 가르쳐주지 않으려 하는 것 같은 기운을 적지 않게 느꼈고, 심지어는 이어렵게 구한자료를 어떻게 주겠느냐며 대놓고 안 된다고 하는 경우마저 겪었으니 말이다. 이해한다. 다들 나름 어렵게 고생해서 구한 자료일 테고, 어렵게 노력해서 정리한 자료들인 것을, 또는 어렵게 공부해서 알게 된 것들……. 경쟁이라는 것 참으로 무섭다. 나 또한 무한경쟁 신자유주의를 얼마나 혐오하고 있어왔던가. 그러나 나 또한 지금 경주마가 되어 그 트랙 위에 섰다. 공부를 하면서도 늘 마음에 부딪히는 대목이 이것이다. 저마다의 사정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나야 고작 두 달 반이 되었지만 몇 해가 되도록 시험을 준비하고, 또다시 도전하고 있는분들을 보면 그 절박함이야 가히 짐작이 된다. 살아야 하는 사람들,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들, 꿈을 꾸는 사람들, 가장으로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 순간순간 서운한 마음이 들다가도 십분 그 심정들이 이해가 되다가도, 이게 뭔가 싶기도 하다가도,적자생존, 경쟁의 논리라는것이 인간을 이렇게 병들게 하는구나 하는 것을 다시금 체감하게 되곤 하는 것이다. 배워서 남주자, 모든 배움이라는 건 무릇 그래야만 한다고 믿고 있건만.

적어도그런 경쟁으로 이 시험을 준비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아무리 결국은 누군가를 떨어뜨리고, 누군가를 붙여주는 시험일지라도, 그것이 서로가 서로를 앞지르고젖히고, 혹은 심한 표현대로밟고 올라서게끔 하는 구조를 강요하는 것일지라도, 최소한그러고 싶지만은 않다. 나 자신과 싸움이라 생각하고, 나 자신과승부를 거는 것. 봄비가 내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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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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