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답사 준비

내일 이른 시간 길목수 형님과 만나 다시 답사길에 나서기로 했다.지난 번 헤어질 때도, 엊그제 전화를 할 때까지만 해도지역만 대충 얘기했지 정확한 코스를 약속하지는 못했다. 오늘 강의실에서 만나 얘기해보자 했는데 실은 오늘까지도분명하게 정하지는 못했다. 일단 내가 제안하고 있던 공주, 부여 쪽으로 방향을 잡기는 해.그래서 내가 준비해온 자료는 공주의 마곡사 마곡사 5층석탑, 부여의 무량사와 무량사 5층석탑,정림사지5층석탑, 정산리 9층석탑 들이었다.그리고 가능하다면 궁남지의 판교와 공주산성까지. 일단 이 정도가우리가 강의시간에 공부하면서 중요 사례로 다룬 공주-부여 지역의 건축물들이었다. 그런데 길목수 형님은 여기에 한 술을 더 떠 청양의 장곡사와 홍성의 고산사까지 말을 한다. 그 대신 정림사지 같은 곳들까지 가려면 너무 힘들겠다고. 그러니 공주산성과 널다리는 말도 꺼내질 못하겠네. 아무래도 길목수 형님은 주요 건축물 중심으로 더 많이 보고 싶어하시는 것 같고, 나는 어쨌든 한 지역에 가면 볼 수 있는 걸 다 보았으면 하는 쪽인 것 같다. 굳이 말하자면 공주산성은 금강 다리를 걸어 건너면서 본 일도 있고, 궁남지 널다리야 황금성 샘과 함께 벌써 몇 번은 건넌 기억이 있으니 어쩌면 굳이 가보지 않아도 사진이나 도면만으로 충분하다 하겠다. 그리고 사실 산성이라는 건 문화재만 천팔백 개 이상이어서 몇 군데를 찍어 답사를 한다는 건 의미없다 할 수도 있겠고, 궁남지 널다리야 교량구조가 어떤 식으로 발달되어 왔는가 흐름을 살피던 가운데 사례로 든 것이기에 건축구조적으로는 크게 볼 것이 없다고도 할 수 있겠다. 말하자면 건축사적으로 중요하다면 모를까 건축구조적으로는 너무나도 간단한 것이니 말이다. 그래도 기왕이면 나는 주요사례로 거론된 것들이라면최대한 눈으로 보고 싶은 바람이 있던 것인데, 사실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으로서의 답사라면 길목수 형님 생각이 옳다 하겠다. 한 문제에 50점이 되는 주요 논술과제들로는대부분 목건축물에서 나오게 되고,건축구조에 있어서나 건축시공에 있어서나 목건축물들을구조를 잘 파악하고 사례별 특징을 잘 정리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글쎄, 어쨌든 부여에 공주, 청양, 홍성까지 다니려면 하루치기로는될 일이 아니겠다. 일요일 강의 끝나고 출발하지 말고 다음 날 일찍 출발하자고 하시기에나는 당일치리로 다녀오자는 말씀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거였다.어쨌든 나로서는 그렇게 하루 코스로만 생각을 하다가 청양의 장곡사, 홍성의 고산사까지 둘러보자는 얘기에 일단은 좋았다. 어차피 지역을 묶어서 최대한 볼 수 있는만큼 볼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으니반가움이 앞선 것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이래도 되나 싶기도 해. 지난 번보은에 다녀온 답사정리도 여태 삼년산성 하나 뿐, 나머지 법주사팔상전과 대웅전, 원통보전은 시작도 못하고 있는데, 그렇게나 많은 곳을 보고 오는 것이 과연 좋기만 할까 하는 생각. 아닌 게 아니라 점심밥을 먹을 때우리 답사 계획에 대한 얘기를 듣던 원 선생님이딱집어 지적하시기도 했다. 무조건 많이 다닌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아셔야지. 많이 보는 게 다가 아니라 그걸 소화해내야 하는데 내용량에 그걸 다 담아올 수 있냐 말이야……. 어쨌든 길목수 형님하고는 내일 아침 서초역에서 만나기로 했다.수원에서 형님이 차를 가지고 올라올 테니 고속도로진입 나들목이 가까운쪽에서 만나자는 약속.교수님께 우리 답사 계획을 말씀드리며 어떻겠는지, 혹시 더 봐야 할것을 추천해주실 곳이 있는지를 물었더니 부여의장하리 3층석탑도 꼭 한 번 들러보라 했다. 아! 장하리 3층석탑.어젯밤 들은 이름이다. 신기하기도 하여라. 이로써둘러볼 곳이 하나 더 늘었다.어찌할까. 일단 내려가서 생각해 보자구, 다니면서 생각해보자구……. 이게 우리의 결론이었다. 내친김에 일박이일로 그곳들 모두보고 오고싶은 마음도 있고, 일단 무량사, 마곡사를 중심으로 그 주변만을 살피고 하루 일정으로 오고 싶은 마음도 있고 갈팡질팡이다.어쨌든 내일 둘러보게 될 곳들을간단하게나마 정리.

무량사 극락전 (조선중기)

온칸물림 중층건물의 맨 첫번째 사례로 나온 건물이다. 교수님은 온칸물림 방식의 중층건물 가운데에서 가장 비례감이 좋고, 잘 지었다 할 만한 건물이라는 평가를 아끼지 않았다. 온칸물림 방식으로 중층을 이룰 경우 퇴칸이 한 칸씩 떨궈지기 때문에 하층에 비해 상층으로 올라가면 두 칸이 줄어들어 체감률이 급격해진다는 것이 하나의 단점인데, 이 무량사 극락전은 온칸물림의 단점이라는급격한 체감, 그에 따라 비례감이 떨어지는 것마저도 잘 극복한 건물이라 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까닭은아랫층 기둥을 높게 썼고, 상층으로 올라가 없어지게 되는 아랫층의 퇴칸 폭을 좁게한 거라며 말이다. 게다가 상층에는 사면으로 전방위광창을 설치했는데, 이처럼 중층 건물의 상층전후면과 측면 모두 창호로 설치된 건물은 흔치 않다 했다.내일이면 실제로 가 보겠지만 사진으로만 먼저 보았어도 정말예뻐. 아마 그렇게 상층으로 전방위 창호를 둔 것은 의장성을 생각해서이기도 하겠지만, 말했든 건물 자체가 다른 중층 건물보다도 매우 높으니 그만큼 실내공간이 어두워지는 것 또한 고려했을 것이다.

교수님이 무위사 극락전을 여러 모로 잘 계획된 온칸물림의 중층건물이라 평가하는 또한 가지 중요한 까닭은 공포부의 배열이다. 다포건물에서는 언제나 이 부분이 까다롭고, 특히나 중층 건물에서는 더욱 그러한데 무량사 극락전에서는 더할 나위없이 깔끔하게 구성이 되어 있다. 일단 칸의 평면 자체가 퇴칸<협칸<어칸>협칸>퇴칸으로, 가운데 있는 어칸의 너비가 가장 넓고양쪽 협칸과 퇴칸으로 갈수록 조금씩 좁아지는전형적인 양식인데,그에 따라 공포의 배열 또한간포의수가 어칸에는 셋, 협칸들에는 둘씩, 퇴칸들에는 하나씩 하는 식으로 일정하게 줄어든다. 공포 뿐 아니라 공포들 사이의 간격인 포벽도 마찬가지.공포부 구성이 까다롭고 불규칙한 예는 많이 찾을 수 있지만 내일가보게 될 또 하나의 건물인 마곡사만 봐도 그러하다.

또 한 가지, 무량사 극락전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내진열을 형성하는 기둥에 있다.종단면도를 보면 동쪽에서는 내진 기둥 셋이 모두상층의 평방까지 쭉쭉 뻗어올라가는 데 반해, 서쪽에서는내진 기둥 사이에 대들보가 지나가면서 가운데 있는 내진기둥이 대들보를 기준으로 위아래로 둘이 나뉘어져 있다. 게다가 대들보 아래에 있는 기둥이 가늘고 대들보 위로 올라선 기둥이 굵어.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건 뒤바뀐 것 아니겠나? 크고 굵은 것이 밑에 있고, 작고 가는 것이 위로 올라선 모습이 누가보더라도 안정되어보이고,하중의 전달 면에서 봐도 그러할 테고 말이다. 왜일까, 왜일까, 왜일까? 강의를 하며 교수님은 몇 번을 물었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그 비밀은 바로대들보를 기준으로 아래 있는 기둥은 하층의 실내공간에 있게 되지만대들보 위의 기둥은 상층의 바깥열을 이루는 기둥이다. 다시 말해 바깥에서 보이는 기둥이다.하중의 전달이라는 것은 그 기둥 둘이 아무 것도 없이 이어져 있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대들보를 통해 하중을 분산시키고 있으므로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니 실내로 감춰진 아랫기둥을 얇게 쓰고 바깥에서 보이는 윗기둥을 굵게 쓴 것이다. 이렇게 쓰인비슷한 예는 법주사 대웅전에서도 있었다.지난 번 법주사 답사 정리를아직 못하고 있어서 미뤄두고 있는데, 그 때 다시 이것과 묶어 얘기할 수 있겠다. 어쨌든 법주사의 많은 법당들을 중수할 때도 그랬고, 여기 무량사 극락전을 지은 조선중기에는조선에 목재가 부족한 때였다. 때문에 왕실의큰 지원을 받았다 하는 법주사 건물들에도 굵고 긴 부재들이 없어 어떤 것(대들보, 툇보)들은나무 몇 개를 겹친 합재를 쓰기도 했고, 추녀도 끝까지 올리지 못한 채 지지목을 지어놓기도 했다. 그리고 이처럼 굵고 긴 기둥을 쓰지 못한 자리에는둘로 끊어 쓰기도 했는데, 무량사 극락전 역시 그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사찰 건물인 것이다.그랬으니 동쪽의내진열처럼 기둥들 셋을 모두 하나로 올리지 못하고,그만한 기둥자재를 구하지 못한 자리에는 둘로 나누어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많은 사람들은 무량사 극락전을 가 보더라도 한 쪽 기둥이 그런 식으로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했다.그만큼 목수들이 그럴듯 하게 처리를 해놓아 마치 원래 그러한 양식, 의도적인 계획인 것처럼 구조적, 시각적으로 해결을 잘 해놓았기 때문이라 했다.실내 사진을 보니 정말 그렇다. 기가막힌 해결방법. 대들보 위로 한 쪽은 툇보, 그 툇보와십자결구를 할 수 있는부재 하나를 끼워넣음으로 해서 마치 평방같은 바닥을 이뤄주었고, 그 위로상층의 굵은 기둥이 섰다. 아, 가는 부재를 아래, 굵은 부재를 위에 써야 했던 또 한 가지 까닭을 말하자면 이 기둥들 위에도 상층의 공포부의 받침이 되는 평방이라는 부재가 가로놓여야 하는데, 넓고 두툼한 평방 부재를 받아주려면 그 자리에는 굵은 기둥이 필요했다.아무튼 무량사 극락전의 서쪽 내진열 가운뎃 기둥은 그처럼 대들보를 두고 위아래로 기둥을 나누어 썼는데, 이 때 쓴 대들보는 일부로 휜 나무를 썼고, 위로 살짝 굽어 있게 걸어놓았다. 그 까닭은 대들보 위에 서게 되는 굵은 기둥의 하중을 잘 받아낼 수 있도록.

무량사 극락전에 가면 또 한 가지 보아야 할 점은 귀솟음이 되어 있는 것이다. 입면구성 양식을 배우면서 귀솟음이니 안쏠림 따위 시각적 불안함을 해결하기 위한 우리 목조건축의 여러 장치들을 살펴보았는데, 귀솟음 양식을 배우면서 그 사례로 본 것이 바로 이 무량사 극락전의 귓기둥이었다. 귀솟음은 말하자면 귓기둥들을 다른 평주들보다 조금 높게 쓴 것. 그것은 처마의 앙곡을 주는 까닭과도 같은 이유인데, 바깥에서 볼 때 좀 더 먼 곳이나 높은 곳이 처져보이거나 왜소해보이는 착시 현상을 교정하기 위해서 일부러 곡을 주고, 더 높이 해주고, 안으로 기울이게 해주는 장치들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이 때 건물의 양쪽 끝 귓기둥들을조금 더 높게 해주었을 때 벽체 부분에서는 상인방이나 창방의 두께를 모서리쪽에서 더 두껍게 해주는 것으로 해결을 한다. 공포부의 받침재가 되는 평방은 귀솟음에 간여를 하지 않으며 문설주는 더더욱 간여할 수 없다. 문설주는 그야말로 조금이라도 수직수평에서 벗어나면 금방 틈새가 벌어지거나 문짝이 여닫히지 않게 되므로 언제나 수평수직을 정확히!

또 한 가지, 이번에는 천정구조를 공부하다가 몇 가지 천정구조 가운데 층급천정 구조를 살피면서 그 사례로 이 무량사 극락전이 다시 등장했더랬다. 말 그대로 계단처럼 층을 두어 올라가는 천정구조라는 말인데, 이것은 안 공간의 위계를 높여주는 방식으로 점점 후대로 가면서는 천정의 위계를 높이는 방식이 법주사 대웅전에서 본 것과 같은 빗천정 구조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니 무량사 극락전에 가서는 이러한 것들을 중심으로 살피고 오면 될 거야.

무량사 5층석탑

무량사에 가면 또 하나 보고 와야 할 것이 5층석탑이다. 이것은 고려초기의 것으로(극락전은 조선중기) 백제계 석탑으로 분류가 되는데, 실제로는 백제계 양식과 신라계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하겠다. 백제계 석탑의 특징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단층의 가구기단과 옥개석의 처마끝 밑부분 곡이 윗부분의 곡을 따라 올라간다는 것, 그리고 옥개석의 처마가 기단을 초과한다는 것 들이 있다. 그런데 이 무량사 5층석탑은 기단이 단층이고 옥개석 처마끝 부분이 백제양식을 따랐지만 옥개석 처마가 기단을 초과하지 못한다는 점은 모전탑 계열이 많고, 수직성이 강한 신라 양식과 같다.

마곡사 대웅보전 (1813)

마곡사 대웅보전 역시 온칸물림으로 중층을 구성한 건물이다. 하지만 이 건물은 무량사 극락전에 대면 규모가 많이 작다. 아랫층이 다섯 칸, 윗층이 세 칸으로 구성된 것은 같지만 간포 자리에 쓰인 공포의 수를 보면 어칸에 하나, 협칸들에도 하나, 퇴칸에는 주상포쪽으로 붙은 하나가 된다. 다시 말해 퇴칸의 간포 자리에는 공포 하나를 제대로 놓을만큼의 간격도 되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공포를 아주 빼버리자니 포벽부가 갑자기 너무 휑해질 테니 그러지도 못하고, 공포를 놓긴 놓되 귓기둥 위의 귀포쪽으로 붙여놓았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포벽의 간격은 어칸에서 퇴칸으로 갈수록 일정하게 형성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말한 것처럼 퇴칸의 간포를 귀포와 붙이면서 여기에는 하나로 길게 이어진 '병첨'이라는 첨차의 이형이 생기게 되는 것이고,귀포의 내출목 쪽에서는 '도매첨'이라는또다른이형이 쓰이게 되었다. 병첨이란 첨차 두 개가 하나로 붙은 형태라 할 수 있겠고, 도매첨이란 하나도 제대로 쓸 수 없어 반쪽짜리 첨차를쓸 때 그리 말한다 했다.

측면을 보면 어? 이건 또 뭐야 싶은 대목이 있다. 측면의 아랫층은네 칸인데, 측면의윗층은네 칸. 이렇게 되면 이건 아랫층의 양쪽 퇴칸을 떨구고 올라가는 온칸물림 방식이 아니질 않은가? .온칸물림에서는 아랫층이 다섯 칸이면 윗층은 세 칸이 되어야 하니 말이다.칸 수로만 따지자면 이건 반칸물림으로 보아야 한다.그러나 잘 보면윗층의 외진기둥은 아랫층의 내진고주가 그대로 올라간 것 맞다. 아랫층의 퇴칸 중간에서 기둥을 올린 것이 아니라 아랫층의 내진주가 상층으로 그대로 올라가 외진주를 이룬 것이다.이것은 바로 온칸물림 중층구성 방식의 특징이 되는 것인데, 이 건물이 그렇게 되어 있다.그런데 문제는 상층의 칸 수가 아랫층 내진열의 칸 수를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상층에서 내부공간의 칸 배열만을 살짝했다는 것인데, 그렇다 하여 온칸물림인 것이 반칸물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둘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은 하층에서 상층으로 올라갈 때 상층의 외진기둥이 하층의 내진고주를 쓴 것인가, 아님 툇보를 타고 올라서 있는가가 될 테니 말이다. 그러니 내일 마곡사 대웅전 법당 안에 들어가게 되면 상층의 칸 수를 다시 분할한 그 기둥들이 어떻게 서 있는지를 잘 봐야 할 일이다.

마곡사 대웅전에서 또 잘 살펴봐야 하는 것은 평면 배치에 있다. 이 건물은 앞서 말했듯 정면 다섯 칸(퇴칸<협칸=어칸=협칸>퇴칸)으로 되어 있으며 측면은 네 칸(퇴칸<가운데칸=가운데칸>퇴칸)이다. 정면에서는 퇴칸의 간포 사이에 공포 하나가 온전히 올라서지도 못할 정도로 좁은데, 측면의 퇴칸은 그보다 더 좁아서 칸포가 귀포의 주상포와 평주의 주상포 모두 붙어있는 정도다. 그러니 측면이 네 칸이라지만 칸 수만 많지 실제 폭은 좁다는 말이겠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정면의 퇴칸 너비와 측면의 퇴칸 너비가 같지 않아서 귓보를 제대로 걸기가 어려운 것인데, 여기에서는 억지로 걸어놓았다. 그래놓으니 추녀와 귀한대 또한 일치하지 못하고 어긋나 있다 하는데, 천정이 가설되어 있으니 이러한 부분들을 얼마만큼이나 확인해 볼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어쨌든 봐야 한다. 천정으로 가려져 있더라도 그것을 뚫고 봐야 한다. 보이지 않더라도 봐야 한다.

마곡사 5층석탑

이것은 고려시대 석탑 가운데 특수양식의 석탑 가운데 하나로 살펴보았다. 특히 상륜부에 설치된 풍마등이라는 것이 특이한데, 이것은 그 부분만 떼어 보았을 때 라마교의 묘탑과비슷한 모양이라 했다. 그러니 이 탑은 원나라가 침입해 들어왔을 때 전해진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석탑이라 했고,수직성이 매우 강한 것이나 탑신부 자체의 비례체계도 우리 탑 형식과 많이 다른 특징을 기억하며 봐야 할 것이다.

정림사지 5층석탑

이것은 백제계 석탑이 아니라 '백제시대' 석탑이다. 현존하는 백제시대 석탑은 익산에 있는 미륵사지서석탑과 정림사지 5층석탑 뿐. 일단 이 탑에 '정림사지'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탑이 있는 둘레의 땅에서 출토된 와편에 '정림사'라는 글자가 발견되어, 그 터에 정림사라는 절이 있었을 거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탑을 일러 정림사지 5층석탑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림사지 5층석탑에는 신라의 석탑에 견줘 여러가지 다른 특징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바로 백제시대 석탑의 특징이 되어버리는데) 기단을 가구식 단층으로 구성했다는 것이 첫번째요, 옥개석의 처마 끝이 올라갈 때 밑면도 함께 올라간다는 것이 두 번째 특징이고, 옥개석의 처마가 기단보다 너 내밀고 있다는 것이 세 번째 특징이다. 거꾸로 말하면 그것들은 모두 신라 석탑의 특징들이 되겠다. 기단에는 상징성을 두어 높게 하고 이중으로 한다는 거, 옥개석 처마 밑면이 따라 올라가지 않는다는 거, 옥개석 처마가 기단부를 가리지 못한다는 거.

솔직히 처음에는 탑의 기단부를 얘기할 때 많이도 헤맸다. 내가 볼 때는 돌의 층이 저렇게나 많은데 어떤 때는 일단이고 또 어떤 때는 이단이고, 도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 기단이라 하는 건지, 어떤 때는 돌들을 세 단 뭉뚱그려 한 단의 기단이라 하고, 또 어떤 때는 한 단을 가지고 그냥 한 단이라 하고……알쏭달송하기만 해서 말이다.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는 내가 가구식 기단이라는 말을, 장대석 기단이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그랬던 것이다.가구식 기단이란 기단대석 위에 면석이 있고, 갑석으로 덮은 것으로하나가 완성되는 것이니, 이러한 구조를 모를 때는 대석도 하나의 기단 같았고, 면석도 또 하나의 기단 같았고, 갑석도 또 다른 기단 같았으니 기단이 셋 아닌가? 했던 것이다.아이구야. 정림사지 5층석탑에는 이렇게대석과 면석, 갑석으로 이뤄진 단층의 가구식 기단으로 되어 있다. 그 가운데 면석이란 말 그대로 바깥 면만 가려주는 돌을 말하는 것인데, 그 안에는탑신부의 하중을 고르게 받아낼 수 있도록 잡석이 고르게 채워져 있다. (나는 면석과 장대석의 차이도지난 주에야 겨우 이해를 했어. ㅠㅠ)기단대석 밑에는 지대석이라는 바닥돌이 한 번 더 깔려 있는데, 이것은 평평한 바닥면을 만들기 위해 놓은 것으로 기단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탑신을 보면 면석 가운데에 이음부가 있다. 신라 석탑들에서는 이음부를 이렇게 면석 가운데로 두게 하질 않고 있으니 이 또한 정림사지 5층석탑의 특징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겠다. 탑신부의 기둥이 민흘림 기둥처럼 되어 있다는 거나 이 탑신부에는 글씨가 조각되어 있다는데, 내일 가보면 그런 것들 또한 유심히 보고 올 일이다.

1층부터 5층까지 옥개석들에는 모두 처마 끝에 풍경을 달았던 구멍들이 남아 있는데 그 또한 까먹지 말고 보아야 할 일.풍경소리까지 상상하자,백제 시대 부처님 앞에서서 어떤 간절한 원을 비는 백성이 되어……. 옥개석에서 눈여겨 봐야 할 부분은 아랫부분이 2단이나 3단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또한 목조건축을 번안한 것이라 해석할 수도 있겠는데, 목조건축에서 공포를 짜서 처마내밀기를 하는 것과 닮았다며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옥개석 밑부분이 층단을 지는 것은 모전탑의 내어쌓기 방식을 보이는 신라계와 비슷한 모양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정산리 9층석탑

고려시대 신라양식 석탑이다. 고려시대 석탑은 이처럼 백제계냐 신라계냐 하는 것으로 크게 나누곤 하는데, 앞서 살핀 무량사 5층석탑은 백제계였고,정산리 9층석탑은 신라계라 했다. 기단이 이중으로 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수직감이 강하다는 점들이 신라 석탑의 특징이니 그렇게 분류하는 것인데, 이 정산리 9층석탑이 있는 곳은 부여, 백제 지역이라는 것이 특이할 만 하다.

이정산리 9층석탑에서 한 가지 더 눈여겨 본다면 옥개석의처마 끝인 귀부분인데, 그 귀끝이 많이 솟아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견줘 고려시대 석탑은 이처럼 귀부분이 강조되어 있다 한다.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도 그러하다던가.

앞에서 정림사지 5층석탑은둘레에서출토된 기와 와편에 '정림사'라는 이름이 발견되어 '정림사지 5층석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 정산리 9층석탑은 그냥 마을 이름을 따다탑 이름이 되었다. 탑이 섰다면 그곳에도어떤 절이 있었다는 말일 텐데, 아마도 이 곳에서는 그 절이 어떤 절이었는지를 확인할만한 것이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니 그냥 정산리 9층석탑. 지금도 이 탑은 논밭 가운데에 서 있어서, 농기계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어 땅의 진동으로 구조적 문제가 우려되고 있다 한다. 기단 한 쪽이 꺼진다거나 하중이 불균등하게 발생하게 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게다가 경작지 한 가운데 삐죽이 솟아 있노라니 번개 따위에도 쉽게 노출이 되어 있기 대문에, 이런 탑에는 진동방지장치나주변 피뢰침 설치가 필요하다던가.

여기까지가 공주와 부여 답사를 위해 나름 살펴보고 온 것들이다. 여기에 하나 더 생각하고 온 곳은 교량건축을 공부하면서 나왔던 궁남지 널다리. 이것에 대해서는 굳이 구조적으로 어려울 것이 없다. '널다리란개울이나 하천에 나무나 돌다리 소재의 발 또는 교각 위에 널판자를 걸쳐놓고 건너다니도록 만들어놓은 다리로 판교라고도 한다'.강의록에서는 나무나 돌다리 소재로 교각을 만든다 했지만 실제로는돌로 많이 쓰인다고 했다. 나무로 교각을 받치면강물, 개울물에 쉽게 썪지 않겠나.

그리고 교수님이 둘러보면 좋겠다 했던 장하리 3층석탑을 더 보게 될지 모르겠고, 청양으로 가면 장곡사 대웅전을 그리고 홍성으로 가면 고산사 대웅전까지살펴보게 될 것이다. 아, 다행인 것이 장곡사에 대해서는 혼합지붕 양식의 사례 가운데 하나로 장곡사 설선당에 대한 복습을 하면서장곡사 전체에 대한 정리를 해둔 것이 있다.고산사 대웅전 또한 팔작지붕의 구성을복습하면서 우미량을사용해 합각부의 하중을 받아주는 방식으로정리해둔 것이 있다. 그것들은 그대로 인쇄만 해서 가도 되겠구나. 아, 지금은 너무 졸려. 아까부터 내일 답사, 내일 아침 하면서 말을 했는데 두 시간 뒤면길목수 형님을 만나러 나가야 한다. 이래서야 제대로 눈을 뜨고 다닐 수 있겠나 몰라. 다행스럽게운전은 길목수 형님이 하게 될 테니 그 안에서나마 숨을 돌릴 수 있겠다.이제 그만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자.이제 두 시간 뒤면 백제로 간다, 그리고 고려로 간다.

'굴 속의 시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주 답사 1  (6) 2010.03.31
부여 답사 1  (7) 2010.03.24
종강  (0) 2010.03.22
정리  (0) 2010.03.19
삼년산성  (2) 2010.03.19
Posted by 냉이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