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 장의사

냉이로그 2010. 3. 29. 12:30

진달래 장의사

영월에 처음 와 읍내를둘러보면서 가장 눈에 띄던 간판이었다.영월역 건너편,아, 저 간판의 이름은 누가 달았을까, 과연 어떤 분이 하는 곳일까 하면서 참 좋았더랬다. 그렇다고 가게 분위기가 진달래처럼 화사한 것도 아니었다. 장의사 하면으레 그렇듯 칙칙한 빛깔,낡고 오래된 건물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칙칙함 안에 들어 있던 '진달래'라는 글자. 그곳은 정말죽음이라는 것과 진정으로 마주하고끌어안을 줄 아는 이가 하고 있는장의사겠구나 싶기만 했다. 장의사와 진달래, 검은 수의와 꽃분홍, 죽음과 봄……. 적어도 한 주에 한 번은 기차를 타러 나갔으니 일주일에 한 번은 저 간판 앞을 지나쳤을 텐데 그 때마다 질리지도 않게 아아, 좋다 하고 느끼곤 했다. 겨우 여섯 글자 한 구절의 간판이지만 너무 많은것으로그림을 그려주고 이야기를 전해주는, 그야말로 한 편의 시처럼 여기면서 말이다. 돌아가시는 길에 대한 축복,지독한 아픔일 수 있는 그것을화사한 봄 진달래로 승화시켜주는 따뜻한 위로……. 그렇다고 그러한 의도를 내비치기라도 하듯 건물이나 가게를 화사하거나 환하게 치장한 것도 아니었다. 장의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그대로 시커멓고 칙칙한, 낡은 잿빛의 가게. 그 안에서 발견하게 해주는 진달래라는 말, 진달래 장의사. 그리고 오늘아침 첫 기차로 내려와역을 나서면서다시 그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큰외삼촌이 돌아가셨다. 중풍으로 거동이 어려웠던 것은 벌써 수 해 째. 올 겨울 언길에 넘어져 다치면서 머리로 피를 흘려 사진을 찍어보면서 암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암은 머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폐에도 넓게 퍼져 있었다. 이제는 가실 때가 됐나 보다, 엄마가 말했다. 외삼촌은 열일곱, 엄마는 열 살에 피난을 나왔다. 외삼촌 위로 이모 한 분과작은 외삼촌까지 사남매 뿐이었다. 이모와 외삼촌들은 포천이며 동두천, 의정부 쪽에서 벌이를 찾아 살기를 시작했다. 가게에서 심부름을 하는 점원으로 일을 했고, 목에 상판을 걸고 미군부대에서 어찌어찌하여 나오는 껌이며 초콜렛 같은 것들을 팔아 돈을 벌었다. 그러던 가운데 큰외삼촌은 군대를 다녀왔고, 일찌기 미군부대에서 심부름일을 하던 작은 외삼촌 도움으로 큰 외삼촌도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아니, 작은 외삼촌이 "나는 또 일거리를 찾을 수 있으니까 형이 내 대신 들어가서 일을 해." 라면서 자리를 물려줬다던가. 그렇게 미군부대 안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큰외삼촌은 음식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엄마는 지금도 가끔 말하기를 "느이 큰외삼촌은 어쩜 그렇게 잘 하는지, 외삼촌 손만 닿으면 맛이 나는 거야. 의정부에서 엄마랑 같이 식당을 할 때도 똑같은 재료에 똑같은 양념을 써도 내가 하면 그 맛이 안 나는데 큰외삼촌이 하면 맛이 달라. 손맛이라는 게 정말 있는가봐." 미군부대에서 음식을 배우는 일을 계기로 큰외삼촌은 양식이라는 것을 계속 하게 되었고, 그 뒤로는 배를 탔다고 했다. 한 번 나가면 몇 달씩 배 안에서 요리만 했다고 했다. 커다란 여객선의 주방장. 그리곤 호텔의 주방장으로. 힐튼이라던가, 하와이에 있는 호텔이라 했다. 어린시절 내 기억에도 큰외삼촌은 언제나 미국에 있었다.그러다 어쩌다 한 번한국에 들어올 때면 듣도보도 못하던 장난감 로보트며 그 때는 친구네 집 어디에도 없던 자동 연필깎기 같은 걸 한아름씩 사다주곤 하셨다. 그리고 십여 년이 더 지났고, 외숙모와 엄마는 한 동네에서 하숙집을 함께 시작했다. 엊그제도 엄마는 말하기를 "느이 외삼촌이 그 때 돈만 모아놓고 있었으면 피자집이니 레스토랑이니 그런 걸 했으면 아주 잘 했을 텐데……. 그래도여기에 와 하숙집을 할 때는 토요일이나 일요일 같은 때마다학생들 다 모이는 날외삼촌이 아주 근사하게 양식으로 요리를 해주고 그랬거든. 그러면 다들 얼마나 좋다고들 하는지, 그래서 그 집에는 졸업을 하고 멀리 취직한 학생들도 하숙집을 안 나가고 계속 그집에서 하숙을 하고 그랬지."엄마는 부럽다 하는얼굴이었다.이미 십 수 년 전에도그러한말은 간혹 듣곤 했다. 엄마는 외삼촌에게 피자니 스파게티니 그 밖에 이름도 모를 어떤 소스니 어떤 스테이크니 하는 것들을 배워오곤 했고, 하나씩 배워온 그것들을 해주면서 아주 기뻐하곤 했다. 하숙생들이 감탄을 하며 먹을 때는 더더욱. 아, 그 때 나는왜 그리도 쓸데없는 고집을세우느라그런 거 안 먹겠다고,삼겹살 먹을 거라고 비뚤게만 굴었는지 몰라.

벌써 석 달도 더 되게 돌아가실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는 말을 들어오면서 나는 외삼촌 걱정보다, 외숙모 걱정보다 그저엄마 얼굴빛 슬픈 것이 더욱 아리기만 했다. 어젯밤 소식을 듣고 빈소에 갔을 때도 영정 속의 외삼촌 얼굴보다, 병수발에 지친 외숙모 얼굴보다붉게 상기된 엄마의 얼굴에 울컥했으니……. 외삼촌, 고향 하늘에서 편히 쉬세요. 엄마, 엄마의 오빠.

'냉이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탑, 2010 봄  (10) 2010.04.12
공포의 에이포  (0) 2010.03.31
기차  (0) 2010.03.27
라디오  (4) 2010.03.24
나라  (0) 2010.03.19
Posted by 냉이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