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냉이로그 2010. 3. 27. 04:05

기차를 탔다. 이번에는 영월에서 서울가는 기차가 아니라 정선, 고한, 태백, 도계, 삼척, 동해를 지나 강릉으로 올라가는 기차다.양양가는 길.사잇골에 집지을 날이 머지 않았다. 함께 일할 목수 친구들과 양양에서 만나기로 하고 강릉가는 기차를 탔다. 아니,시간에 늦어 부랴부랴 달려나가 막움직이기 시작한 기차를 쫓아가 뛰어 올랐다. 표를 끊을 틈도 없었고, 그렇게 기차에 올라타서야 역무원에게 말을 해기차표 값을 내었다. 그것 놓쳤으면두 시간은 넘게 기다려야 했으니, 휴우, 숨 넘어가는 줄 알았다.마지막인가 하면 다시 눈이 내리고, 이게 끝인가 하면 다시 폭설.영동과 강원 산간에다시 폭설이라더니 영월을 지나 정선으로 가면서굵은 눈발이 내렸다. 열차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는 기차간에서나마 모자란 공부를 때우겠다고 책을 폈지만 눈이 책으로 갈리는 만무했다. 예뻤다, 예쁘게도 눈이 내렸다. 열차 안에는 승객이 거의 없었고, 나는 좌석 두 개를 마주보게 하여 발을 뻗고 앉아 창밖 눈발을 보며 도시락통에 담아온 딸기 꼭지를 따 먹었다. 기차를 탈 때면 언제나 좋지만 눈이 펑펑 쏟아질 때만큼 좋은 때는 없다. 그 눈발을 뚫고 칙칙폭폭. 딸기가 있어 더욱 좋았다. 그리고 그곳, 어떤 그리움과 어떤 상처, 어떤 불편함과 어떤 소중함을 함께 떠올려주게 해주는 곳으로 가는 기차였기에 더더욱.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열차간에서 내다보는 창밖은 하얀 눈송이들이 가득했는데 어느 순간 하얀 거품들이 펄쳐졌다.정동진이구나, 아, 바다다. 또 어떤 기억에 빠져드는 사이 이내 기차는 강릉에 닿았고, 목수 친구들이 역 앞에 나와 있었다.

제재소에 찾아가 물목표를 가지고 견적을 넣었다. 생각보다 많이 안 나와 다행이다 싶었다. 마침 그곳에는 우리가 치목하는 동안 머물 수 있는 숙소도 공짜로 쓸 수 있고, 밥도 한 끼에 이천오백 원으로 먹을 수 있다 하니 여러가지 조건들이 좋았다. 치목은 다음 달 십오일부터 하기로 했다. 끌과 대패에 녹은 슬지 않았을까. 이제 곧 일이 시작된다.

낙산에는 이미 친구들이민박집을 잡아놓고 있었고, 함께 목수학교를 다닌 형님 한 분도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자연스레 술자리가 시작되었다.퇴근을 한 밥풀엉아가 와서 앞으로 일정과 준비해야 할 일들, 조정하고 결정해야 할 것들에 대해 긴 이야기들을나눴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막연하고 흐릿하던 부분들이 하나하나 가닥이 잡혀나갔다. 술자리는 깊어졌으나 나는 기특하게도 한 잔도 마시지를 않았다. 그런 날, 그런 자리에서 술 한 잔을 하지 못한다는 건, 아니 안 한다는 건 괴로운 일이다.그러나 한 방울도.그러곤 오늘 아침부터 일찍 움직이며 현장에서 조립할 동안 묵을 숙소를알아봤고,집지을 터에 가서 다시금체크해야 할 것들을 확인했다.초석을 알아보러 석재상에 들렀고, 기초를 알아보려설비업자와만났다. 함께 다니는 친구들이 있어 미더웠고,호 형이 있어 또한 든든했다.



양양엘 다녀왔다. 그저 목수로만 다녀왔다. 술을 한 방울도 넘기지 않았고, 그리운 얼굴들도 가슴 안에다 꾹꾹 눌러두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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