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운트

굴 속의 시간 2010. 7. 11. 01:45

카운트

시험일까지 꼭 석 달이 남았다. 서른하루에 서른하루, 그리고 서른 날이니 아흔두 날. 고삼 때도꼽아보지 않던 날짜를다 세어보다니. 이제 서울로 수업을 들으러나오는것도 삼 주가 남았을 뿐이다.그렇담 금요일마다 집에서 나와 동강 다리를 건너 영월역에서 기차를 타고서울로오가는것도 그만큼이 남은 거로구나.

이월부터 시작해서주말마다 기차를 탔다.그렇게 타는 기차를 통학기차라 생각하고 나니 나름 설레기도 했다. 아, 기차 통학이라니. 마치 무슨 칠십 년대 빛 바랜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어떤 풍경처럼그야말로폭칙폭칙 통학 기차.서울로 올라오는 날이면기차에 올라눈을 씻어가며 모르는 말들을 찾았고, 일요일 밤 기차를 타고 다시 내려갈 때면알아보지 못할 글씨로필기한 공책을 펴보곤 했다. 물론 꾸벅 졸아버리기가 일쑤였지만.

그 길.기차를 타러 나가고, 기차에 내려 들어오며 일주일에 두 번씩 동강 다리를건너는 일은 정말 큰 기쁨이었다.강바람이라더니, 바람은 어찌나 시원하던지. 그리고강물은 얼마나 맑은지…….그러나강을 넘는 그 길이 좋았던건 단지시원한 바람이라거나 맑은 강물 때문만은 아니었다.수업 준비를 제대로 못해 걱정이 가득하면서도, 수업 시간 죽을 쑤고 내려오면서도 그래도 뿌듯함이 마음가득 있었기 때문이었다.썩 잘해내고 있다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공부하는 것이 즐거웠다. 공부하러 오가는 길이좋았고,돌아올 수업이 기다려지곤 했다.

석 달이 남았다 하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아니라고들 한다. 하긴 생각해보면 그렇다. 집 짓는 일 끝내고 여기에만 전념을 할 수 있겠다 한 뒤로 한 달이 지났건만, 그 한 달 동안 할 수 있던 건 얼마 되지 않았다. 한 달은 눈 깜빡 처럼 지나갔고, 앞으로 남은 한 달, 한 달, 또 한 달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간혹 내가 불안함을 숨기지 못해 조급함을 비출 때면, 떨어지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고. 붙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지, 남들 몇 년씩 해야 된다는 거 날로 먹을 생각이냐며, 위로를 해주어 고맙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좋은 결과까지 있기를 바라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각오는 이미 어느정도 하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쓴 맛 한 번 보겠구나, 쓴 눈물을 삼키는 법을 배울 수 있겠구나. 어떤 뼈저림 같은 것, 실패 같은 것, 제대로 한 번 배워보겠구나. 물론 그간 살아오면서 쓰라렸던 순간 없지 않았겠지만, 이런 시험 비슷한 어떤 관문 같은 것에서는 그래본 일이 아직 없었다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아니, 아예 그런 관문 근처에는 가까이 해 본 일이 없었다는 쪽이 더 맞는 말일 터.하다못해 재수를 해 본 일도 없고,운이 좋기만 해서인지 어디 공모전 같은 곳에서도 낙방의 고배 같은 건 마셔본 일이 없었다.이제야 비로소 쓴 맛을 제대로 보게 될 수 있겠다생각하면서 이미 마음 한 편에서는 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잘 감당해낼 수 있기를, 담담하게, 털털하게.

공부 자체로는 정말 재미있었다. 배우고 싶은 것이었고, 하고 싶은 것이었다. 알아듣고 쫓아가기가 남들보다 느려 더듬거리고는 있지만, 그렇구나 싶은 순간이 있을 때면 새로운 세계로 한 발짝 더 다가서는 듯한 그러한 기쁨이었다. 공부하는 것이 좋았고,이렇게 말을 하려니 우습기는 하지만, 공부하는 시간 말고는 어떤 것에도 마음이 끌리지가 않았다.시험이니 뭐니 그런 것 없이 그저공부 그 자체이기만 하다면즐거웁기만 할 거였다. 사실 뭐, 그랬으면 이만큼어떤 긴장이나 집중 같은 걸갖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시험이라는 것은 그자체로 어쩔 수 없이 얄궂은 것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그저 나 스스로에게 최선을 다했음에 부끄럽지 않고 싶을 따름이다. 그 결과를 떠나나 스스로 원해 무언가에최선을다했다 말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벅찬마음일 수 있겠는지.지난겨울 모임의 발표 시간새눈 엉아는그런 말을했다던가. 지금 내가 하는 공부가,공부를 한다는 것은, 이것이 혁명이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인데,과연 그러한지를괴로워했더라고. 엉아가 했다는 그 말을 빌면, 혁명까지는 잘 모르겠고,그저 내가 걸고 싶은 것은 이 공부가 감동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이것을 하고 있는 과정 자체에서, 그리고이 공부가 열어줄 어떤 세계라는 것이.아마 엉아가 했다는 그 말도 같은 말이었는지 모르겠다.

괜찮다. 어차피 나는 트랙 속의 경주마가 되고자 이 시험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 승부를 걸고 싶은 것이었다. 그러니 어떠랴, 나는 이미 충분히 즐거웁고 떳떳할 수 있었다. 앞으로 남은 석 달은 단지 하나의 매듭이 될 뿐이다. 물론 내가 이 분야의 학자가 되겠다는 것은 아니겠으나, 어차피 공부라는 것은 평생을 이어갈 일일 테니. 그런 의미에서 카운트 시작 D-92.

(아참, 강의를 듣고 돌아와 정리하면서 여기에다 올리던 기출문제 풀이 강의 노트들은 내려놓았다. 나로서야 그저 일상의 기록을 하듯 정리해가던 것이었는데, 그게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또는 잘 모르는 사람들로부터그것에 대해어떤 말이나 시선, 해석 같은 게 있다는 것을 건너 들으면서 솔직히는적잖이 당혹스럽기도 했다. 사실 이 공부라는 걸 하면서 가장 당혹스럽고 적응하기 힘들던 것이서로 자료나 노트 같은 것 보여주거나 빌려주는 것에 인색하고, 살벌하다 싶을만큼의식하는 분위기였는데……. 정말로,시험이라는 것, 그것도점수로 줄을 세우는 시험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제도일 수밖에없다는 걸 여실히 실감하고 있다. 인간의 마음을 피폐하게 만들어버리는.아, 그런데 어쩌다가 나는 지금그 한 가운데로 걸어들어오게 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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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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