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정사 답사

굴 속의 시간 2010. 6. 30. 23:23

봉정사 답사 (6/14)





안내판에 써 있는 것처럼 명옥대라는 정자 건물이다. 봉정사에 가면 매표소를 지나는 길 말고 다랑논을 타고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리 들어가다 보면 처음 만나게 되는 정면 두 칸, 측면 두 칸의 정자다. 안내판에 써 있는 것처럼 원형과는 많이 바뀐 모습으로 남아 있다 하였다.

봉정사의 불전 권역으로 진입하기 전에 하나의 관문처럼 서 있는 만세루이다. 누상, 누하주 사이를 마루 귀틀로 짜고 있어, 아랫층으로는 누하진입을 하게 되어 있다. 보이는 것처럼 정면이 다섯 칸, 측면은 두 칸이며다른 누각 건물에서 흔히 보이는 것과 달리 계자 난간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지붕의 처마도사래, 부연이 없는 홑처마.

만세루 밑으로 누하진입을 해 들어가다 보면 이처럼 계단을 오르면서 바로 보이는 것이 대웅전이다. 그 왼쪽으로는 화엄강당이 보이며, 그보다 더 왼쪽으로는 극락전이 있고, 고금당이 있다. 대웅전의 오른쪽으로는 요사채가 있어. 이렇게 봉정사는 만세루를 통해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권역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만세루를 지나서 나오는 하나로 트인 마당은 개방되어 있지만 각각의 성격이 다르고, 개방되어 있찌만 폐쇄적인 마당이다. 확연히 구분되지는 않으면서 성격에 의해 쉽게 넘어들지 못하는 영역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 이 봉정사 가람 배치의 뛰어남을 보여주는 거라 했다.



극락전부터 가서 보았다. 이 건물에 대해서는 그 동안 하도 많이 봐와서 그런지 보자마자 뭔가 강한 포쓰가 느껴진다.정면은 세 칸, 아주 전형적인 입면 양식을 보여준다. 판장문, 그리고 살창. 장대석 기단과 가운데 하나 있는 계단. 계단의 소맷돌은 기단갑석 높이까지 닿아 있다. 겹처마 맞배지붕이며 기둥 위의 주심포와 간포 자리의 복화반들이 눈에 띈다.

그러나 이러한 입면도 사실 해체 수리 이전에는 분합문을 달고 툇마루가 짜여져 있는 모습이라 했다. 조선시대에 고쳐놓은 모습인데, 해체를 하면서 인방에서 살창의 홈을 발견할 수 있었고, 문틀이 있던 부분에도 신방석의 흔적이 발견되어 살창과 판장문으로 복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장대석 기단이다. 세 단으로 쌓여 있고, 그 위에 기단갑석이 덮고 있는데 세 단의 장대석들은 윗단으로 갈수록 춤이 더 깊다. 조선시대에는 아랫단이 두껍고 윗단을 얇게 하는 조형미를 보이게 되는데 고려시대는 이처럼 반대로 되어 있다. / 기단 모서리 쪽에서 쇠시리 초각을 확인했다.

측면에서 봤을 때 기단 입면이 어떠한가를 보느라 찍은 사진.


측면이다. 보이는 것처럼 네 칸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가운데 어미고주가 높이 서 있고, 양쪽으로 내고주들이, 그리고 우주가 칸을 분할한다. 어미고주는 맞배지붕이 횡력에 취약한 것을 보강하기 위해 세운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처럼 측벽부에서는 대들보가 맞보 형식으로 구성된다. 고려시대 건물들은 측벽부의 가구구성이 내부의 가구구성과 동일하게 이어지는 것이 특징이지만 이 건물에서만큼은 다른 것이다. 가운데 어미기둥 뿐 아니라 내부에서는 전열의 내고주가 감주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리들은 외목-주심-하중-중-종도리로 모두 칠량의 구성을 하고 있고, 모두 둥근 도리를 쓰고 있는데 하중도리만큼은 약간의 역사다리꼴 방형의 부재를 쓰고 있다. 이 또한 맞배지붕의 취약한 횡력을 보강하기 위한 것. 맞보 위에서 중도리와 하중도리를 잇는 가로형 부재를 받는 부재 역시 복화반을 쓰고 있다. 내부에서는 전열 내고주가 감주되었다 했으니 그 부분 튀어나와 있는 내고주의 창방 뺄목은 모양만 갖춘 허두이다.




측면에서야 어차피 좌우대칭으로 구성이 되어 있으니가구 구조를 좀 더 크게 보느라 반만 잘라 찍은 것. 종도리부터 주심도리까지 이어지고 있는 솟을합장재도 한 번 더 확인. 이처럼 종도리에서 주심도리까지 솟을합장재로 잡아주고 있는 건물은 봉정사 극락전이 유일하다.

주초석을 본다. 자연석의 덤벙주초도 아니고 완전 가공석도 아닌 반가공석을 초석으로 썼다. 덤벙주초가 아닌 반가공 초석을 썼기 때문인지, 아무튼 이 건물에서는 하인방들이 기둥에서 서로 주먹장 결구를 하고 있다. 조선시대 이후로 지어진 건물들에서는 쌍장부촉으로 인방을 결구하는데 주먹장을 썼다는 것은 기둥들을 세운 뒤 하인방을 끼우는 순서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인방 부재를 놓고 그 위에서 기둥을 내리끼워야만 할 수 있는 방법. 때문에 이 건물을 완전해체하려면 혹은 새로이 조립을 하려면 일반적인 목조건축물의 시공 순서와 달리 잡아야만 한다. 다른 고려시대 건물들도 이 방식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것들은 아직 완전 해체를 해보지 않았기에 알 수는 없다. 어쨌든 이 건물에서는 그것을 확인.

건물의 뒷면이다. 양 퇴칸에는 개구부가 없고 가운데에만 판문이 있다. 여기에도 외목도리 위에는 작은 연목 받침이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에서는 그 받침목이 선자연 구간에 이르러 갈모산방과 이어지지만, 이 건물은 맞배지붕 건물이니 선자연 구간이라는 게 있을 수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건물을 한 바퀴 돌아 왼쪽 측면부 모습. 저 앞으로 보이는 건물은 고금당이다.


공포부. 헛첨차는 없고 주두 위에서부터 소첨차의 십자결구로 시작해 올라간다. 그러나 보방향 대첨차와 결구하는 것은 도리방향의 인방재이고, 그 위에서 보머리와 도리방향 대첨차가 결구한다. 그 위로 출목 쪽에서는 단장혀와 함께 외목도리가 걸리게 되고, 주심선상에서는 승두라는 받침재가 걸린 뒤 그 위로 주심도리와 주심도리의 단장혀가 걸린다. 다시 말하면 봉정사 극락전에서는 가로재로 봤을 때 창방-소첨차-인방재-대첨차 식으로 하여 첨차와 인방재가 교차하여 올라가는 방식인 것이다.

우주 쪽의 공포부다.창방과 뜬장혀, 도리 뺄목들이 나가다 끝이 나는 지점이다. 그러한 가로 인방재들 사이에는 우주의 공포를 이루는 가로 소첨차와 대첨차들 역시 그 뺄목들이 나가는 것과 잘 어울리고 있다. 특히 대첨차 같은 경우는 그 밑의 뜬장혀 뺄목보다 조금 더 나가게 하기 위해서 소로 한 단을 더 길게 낸 모습이다.

사진기를 잡아당겨 좀 더 크게 찍은 것. 주두와 소로의 굽은 안으로 오목한 내반곡을 지녔으나 굽받침은 없다. 첨차의 마구리면은 사절되어 있지 않고 직절되어 있고, 밑면은 연화두형 초각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양의 주두나 소로, 첨차의 양식은 통일신라 유물인 안압지 유물과 비슷하다. 또한중국의 9세기 당나라 때 만들어진 남선사대전에 쓰인 주두, 소로 양식과 비슷하기까지 하다. 그래서봉정사 극락전의 건립연대를 더 높게 생각되게끔 하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13세기 초에 건립했을 거라 보고 있음.

주위를 빙빙 한 바퀴를 다 돌았다. 사진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연목 위의 평고대 초매기는 부연 착고까지 한 부재로 되어 있는 통평고대라는 점, 막새 기와의 마구리가 직절되었고, 치미가 짧다는 점 또한 염두에 두며 봐야 할 것들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스님이 기도하는 것 끝나는 틈을 타서 몰래 들어가 찍은 사진. 스님이 기도하고 있는 동안에는 들어가서 옆 자리에 앉아 공책에다 그림을 그리느라 그렸는데, 얼마나 힘이 들던지. 모이 한 번 먹고 하늘 한 번 보는 병아리처럼 선 하나 긋고 천장 한 번 보고…… 그러다가 스님이 일어나 절을 하기 시작하면 따라서 절을 하고, 스님 염불 외는 동안 잠깐 짬을 봐서 또 다시 선 하나 긋고 천정 한 번 보고……. 그렇게 애를 먹어가며 알아볼 수 없는 그림을 그리다가 스님이 나간 사이 몰래 사진을 찍었다. 물론 여기도 사진 촬영 금지 ㅠㅠ 씨씨티브이가 여기저기 있었으니 나의 범행은 다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어쨌든.

보의 단면은 역항아리 형태. 대들보 위에서 종보까지는 복화반이 있고, 그 복화반 위에서 하중도리 받침으로 나가는 계량과 첨차가 포를 짜면서 종보를 받아, 그 종보 위에서 중도리 장혀와 중도리가 얹혀진다.

그리고 종보 위에는 다시 복화반이 놓이며 그 위에 뜬장혀가 지나가며 그 위로 종도리 장혀와 종도리가.

거의 비슷한 사진이긴 한데, 종도리부터 주심도리까지 이어지는 솟을합장, 그리고종보 마구리며 계량들의 초각, 하중도리 밑의 계량과 초공의 초각, 대들보 위 주심도리를 받는 승두의 위치까지한 눈에 들어올 수 있게.

닫집의 모습이다. 다포로 짜여있는 모습. 아직 이 닫집의 연대가 확인되고 있지는 않지만 이것이 만약에봉정사 극락전 건립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거라면 우리 건축사에서 다포집의 기원을 달리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근거가될 수도 있다. 일제시대에 일본 사람들에 의해 정리되어 여지껏 그대로 내려받고 있는 한국 건축사에서는 원 간섭기에 이르러 비로소 다포 양식을 배우게 되었다고 했는데, 그것을 뒤집을 수 있게 될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 닫집이 표현하고 있는다포 양식을 보면 아주 고식의 수법으로 되어 있고 그 문양들도 투각한 당초 무늬 청판이나 상대 갑판 밑 복련 양각, 창방과 인방 사이 투각한 모란 당초문 초각 같은 것이 아주 고식이다.

이제 극락전에서 나와 대웅전. 그래봐야 바로 옆 건물이나 다름없는 거리이다. 아까 만세루를 지나면서 나오는 마당이 개방되어 있으면서도 각각의 성격에 따라 권역이 구분되어 있다고 했는데, 극락전과 대웅전은 병렬로 나란히 있으면서 화엄강당이 그 사이를 갈라주면서 각각의 마당이 따로 형성되는 것이다. 이 사진에서 보면 대충전의 추녀 밑으로 살짝 닿으며 내려오는 지붕이 있는 것이 화엄강당. 극락전은 불상을 사이에 두고 대웅전 건너편에 있다.

이처럼 봉정사는 대지가 넓지 않아 건물들이 밀집해 있는 편이다. 이런 사찰의 문화재 같은 경우에는 시공을 하게 될 때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보수 공사를 하면서 인근 문화재를 다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대웅전 건물 같은 경우만 하더라도 화엄강당의 지붕과 서로 간섭을 하고 있어 섣불리 손을 대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이런 경우에는 인근 문화재에 충분히 보양 조치를 해주어야 하고, 특히 기초나 지정 부분에 손을 대게 될 겨우 이웃한 문화재의 기초에 영향을 주지 않게끔 해야 한다.

추녀 밑에서 올려다 본 사진. 외2출 내2출의 초기 다포 양식을 보여준다. 살미 방향의 대첨차는 강직한 형태의 쇠서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보머리는 삼분두로 초각이 되어 있는 게 보이고, 극락전처럼 주심포 건물에서는 보이지 않던 평방 부재가 보인다. 그리고 평방 위에서 귀한대를 받아주는 이방도 눈에 띄고.

봉정사 대웅전의 가장 큰 특징인 커다란 합각부이다. 거의 측면 벽부 넓이 만큼이나 합각이 넓다. 합각이 크다는 말은 합각부가 조성되는 지점이 퇴칸의 중간보다 훨씬 바깥, 측면 벽부까지 내밀고 있다는 뜻인데 실제로도 이 건물은 합각부가 측면의 기둥열 위에서 조성되는 것이다. 아직 충량이라는 부재가 등장하지 못한 데다가 이 건물에서는 이주법이 적용되고 있기 때문에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쓴 것처럼 귓보를 쓸 수도 없다. 그러니 측면에서 외기도리를 지지해줄 수 있는 구조를 만들지 못하는 것인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합각부를 측면 벽부까지 빼고, 측면 기둥열 위에서 합각을 구성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측면에는 주심도리를 온전히 쓸 수도 없었고, 주심도리 대신 합각부를 지지하는 역할까지 동시에 해주는 방형의 부재를 받쳐놓았다.

더듬어보듯이 건물 한 바퀴를돌아보다가 눈이 간다 싶은 곳에 사진기를 댄 거였다. 기와 마구리가 사절된 것, 치미가 길다는 것.바로 전에 봤던 극락전의 기와하고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대웅전의뒷면이다.이 건물도 건립연대를 여말선초로 보고 있으니 고려시대 입면 양식과 아직은 비슷하다. 측면도 세 칸이었으니 세 칸, 세 칸의 팔작지붕 건물.

측면에서 좀 더 가까이 당겨서 찍은 공포부 모습이다. 사실 봉정사 대웅전의 공포부를 이해하는 것은 이렇게 바깥에서 보는 모습으로는 모자라다. 봉정사 대웅전은 가구 구조의 특성상 전면의 어칸부와 퇴칸부, 그리고 측면부의 공포 구성이 저마다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 전면의 주상포는 외2출목에서 보머리(헛보)가 외목도리를 받고, 주심선에서는 대들보에 주심도리가, 그리고 내목도리는 대들보 위의 계량 위에 걸리는 모습이다. 그에 반해간포에서는주심도리가 대들보 대신 주두를 거꾸로 뒤집어놓은 듯한 부재 위에 있다. 그리고 측면부에서는 아예 주심도리가 없고, 주심도리 역할을 하는 방형의 부재가 보머리(헛보)위에 놓여 있을 뿐이다.이렇게바깥에서 보기에는 그저 다 똑같아 보이는 모습일지라도 그 구성들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까지 보고 있어야 한다.




정면에서 보는 모습, 그리고 이 건물을 설명해주는 안내판이다. 지난 해 국보로 승격되었다던가. 이것으로 봉정사 대웅전에 대한 사진은 더 찍은 것이 없는데, 그 까닭은 이건물의 구조나 특징이 그만큼 별 것 없기 때문이 아니라 사진으로는 찍을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앞서본 봉정사 극락전도,비슷한 시대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부석사 무량수전도 내부에서 천정이 노출된 연등천정을 하고 있기에 상부가구구조를 확인할 수 있지만, 이 건물은 천정에 반자를 가설했기 때문에 기둥 위가 어떻게 구성이 되었는지는 오로지 도면과 보고서에 입각해머릿속 상상으로 구성해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건물이 왜 중요하지 않겠는가,앞서 말한 합각부의 구성이 벌써 그러하며 비슷한 방식으로 추녀를 설치하고 있지만 부석사 무량수전과는 또다른 방식으로 하고 있다는 점, 기둥열에 이주법을 씀으로 해서 갖게 된 평면상의 특징…….





바로 위의 사진으로 보면 극락전 바로 앞에 봉정사 삼층석탑이 있고, 그 왼쪽으로 있는 건물이 고금당이다. 지금은 스님들의 요사채로 쓰고 있다고 하는데, 말 그대로 '옛날의 금당'이라는 이름을 봐서는 원래 고금당이 주불전이었을 거라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던가. 시간이 지나면서 사세가 확장되면서 중심 건물이 이동해 독립된 권역의 건물들이 옆으로 지어진 걸 수도 있다며 말이다. 그런데 어쨌든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이익공양식이니 조선 중기는되지 않았을까 싶고, 기와에서도 확실히 양식을 보이고는 있다.

그리고 봉정사 삼층석탑.






화엄강당 역시 이익공 양식의 건물로 보물 지정이 되어 있다. 그러고보니 봉정사에는 국보이거나 보물이 아닌 건물이 없네. 어쨌든 봉정사의 배치를 떠올릴 때 이 화엄강당이극락전 권역과 대웅전 권역을 분리시켜주고 있다는 것은기억해야 할 일이다.




이렇게 바깥에서 찍은 사진이야 별 볼 일 없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참 예쁘고 아늑한 건물. 대웅전에서 나와 요사채를 지나 오른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이 영산암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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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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