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굴 속의 시간 2010. 7. 1. 10:43

봉정사 (6월 14일)

봉정사에 갔던 날은 제법 날이 뜨거웠다. 몇 시간을 그 뙤약볕에 앉아 있었는지 모른다. 가지고 간 공책 한 권을 들고, 마치 무슨 스케치 나온 화가라도 된 양 극락전 건너편에 주저앉았다. 그린다고 애를 쓰며 그리지만 왜 그렇게나 자꾸만 엉망으로 나오기만 하는지. 그림을 잘 그리려면 자세히 봐야 한다고. 하지만 그리다보면 이쪽 저쪽 높이가 자꾸만 맞지를 않고, 처음 시작했던 거에 비해 이상한 비례가 되어 이리 찌그러지고, 저리 어긋나기만 하는 거였다. 나는 왜 그리도 비례감이며 균형감이며 부피감 따위가 꽝이기만 한지. 땀이 얼마나 나는지 머리에 쓰고 있던 운동 모자가 다 젖었다. 공책 위로 땀이 뚝뚝 떨어져 안 그래도 못 그리겠는 거 선은 더 엉망으로만 되어갔다. 가슴팍이 다 젖고, 등허리가 다 젖고, 아유 뜨겁기는 하고, 배는 고프고. 그래도 꿋꿋이 우기고앉아 되도 않는 선들을 그었다. 저걸 그려야만 일어선다 하면서. 그렇게 바깥에서 입면도 하나를 그리고 나서는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 법당 안에는 스님 한 분만이 염불을 외며 기도를 하고 있었다. 법당 내 사진촬영은 금지. 그 안에서는 정말 어쩔 수 없이 공책에 그림을 그리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건 뭐, 멀리 앉아서 내다보는 것도 아니고 고개를 쳐들어 천장을 봤다가는 다시 떨궈 선 하나를 긋고, 다시 고개를 쳐들어서는 다음 선을 찾고. 그런데 그것도 영 헷갈리기만 하여 조금 전 그었던 선이 어느 건지 그것조차 헷갈리기만 했다. 아니, 그런데 이건 또 뭐야? 앉아서 목탁을 치며 경을 읽기만 하던 스님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계속 절을 해대는 거다. 그냥 모른 척 하고 나 할 일이나 하자 하려니 아무래도 눈치가 보여 그러기도 쉽지가 않다. 그 스님이 뭐라고 할 것도 같고, 그 스님 아니더라도 정면에 앉아 있는 부처님한테도 자꾸 눈치가 보여. 그래서 스님이 절을 할 때라도 따라서 절을 하다가 그려야지 하는데, 그게 무슨 법칙인 건지 절을 한 번 하고는 잠깐 경을 읽다가 다시 절을 하고, 또 경을 읽고.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그 장단에 따라 절을 하다가는 눈치를 보고 연필을 잡으려 하면 다시 또 절을 하고, 절을 하고.가만히 앉아서그리려 해도 자꾸만 헷갈려서 되지가 않는 것을 엎어졌다 일어났다 하면서 그 그림을 그려보겠다 하고 있으니 도무지 정신 사나워서 할 수가 없는 것이다.혼자 웃음이 나기도 했다. 절을 하는 폼도 어벙한 것이,이거야 무슨 코메디 하는 거 같기도 하고. ㅎㅎㅎ. 그래도 좋았다. 사실 도면 그리는 거야 이미 있는 도면을 보고 그대로 베껴가며 그리면서 연습을 해도 그만이다. 그런데도 굳이 그렇게 해 보고 싶었던 거는 뭐랄까이 건물을 좀 더 육체적으로 느끼고 싶었달까. 인터넷에서 치면 수두룩 뜨는 사진들을 볼 수야 있겠지만, 나만의 서사를 가지고 싶었던 거.

부석사 (6월 28일)

부석사에서는 그림을 그려보겠다고 뙤약볕에 앉을 일은 없었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봉정사 극락전처럼 맞배집이 아니니 측면의 입면상에서 보나 도리, 대공이나 계량 따위의 부재가 드러나지를 않으니 말이다. 측면에서도 합각부와 기와지붕으로 다 덮고 있으니 가구구조를 볼 수 있는 곳은 내부에서 천정을 올려다 보는 것 뿐이다. 무량수전에는 스님 말고도 기도를 하러온 신도 몇 분이 더 있었고, 아무래도 큰 절이다 보니 무슨 접수를 받고 하는 보살 한 분도 책상을 놓고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지난 번 봉정사에서처럼 공책이랑 연필을 들고가 맨 뒷자리에 꿇고 앉아 천정을 보면서 하나하나 선을 그려보았다. 그런데 이게 되지가 앉는 것이 무량수전 내부에는 굵은 내고주들이 두 줄로 지나가고 있어 한 자리에서는 그 꼭대기에서 부재들이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중첩되고 있는지 같은 것들을 알아볼 수가 없는 거였다. 물론 도면이 있고, 머릿속에 그려지는 게 있기는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건 도면을 완성하는게 아니라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그려보고 싶었던 것이다.안 되겠다 싶어 살그머니 일어나 도면을 들고 다니면서 일단 하나하나 표시를 하는 것부터. 예배객처럼 두 손 합장을 하고 뒷꿈치를 들어 살금살금 걸어 계량과 인방들이 어떻게 결구가 되고 있는지, 측면 퇴칸에서는 외기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고 있는지. 그러다간 어느 구석에서는너무 욕심이 나 몰래 사진기를 꺼내기도 했다. 그런데 플래쉬가 안 터지게 하는 걸 할 줄 몰라서 그만 팡! 누가 뭐라고 그러지도 않았는데 괜히 혼자 굽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해 놓고는 다시 또 팡! 이번에는 제대로 조정을 했다 싶은데도 이 놈의 플래쉬는 왜 자꾸만 터지는지, 어이구야. 그러면서도 그 까치발로살살살 무량수전 안에서 두 시간을 넘게 휘젓고 다니면서 꿋꿋하게 볼 일을 보고 나온 것이다. ㅎ 아, 장하다.

봄, 여름 그 사이 / 박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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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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