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시청 후기

냉이로그 2017. 4. 20. 10:58

 

 

0.  지긋지긋하던.

 

 늘 그래왔다. 하지만 그래도 그땐, 극우들에게 정권을 넘겨주지 말아야 한다는 일말의 다급함, 절실함에 호소하곤 했다. 그래놓고는 이른바 '통큰단결론'을 내세우며, 진보정당을 향해서는, "미안하지만 이번 한 번만큼은 성에 차지 않더라도 민주당을 찍어달라, 어쨌든 저 극악무도 세력만큼은 막아야 하지 않겠나" 라며 읍소를 하기도 하고, "극우세력에게 정권이 넘어가면 표를 분산시킨 진보정당 책임이다"며 협박을 하기도 하면서. 내가 투표권을 갖기 시작하던 때부터 스물다섯 해 동안 선거 때마다 들어온 그 소리, 지긋지긋하던.

 

 

1.  그래도, 그땐 백 번을 양보해.

 

 그래, 백 번을 양보해, 그게 차선이건 차악이건, 수구꼴통들이 쥐고 흔드는 것만큼은 막아보자던 그 진정만큼은 전혀 이해 못할 바는 아니겠다. 물론 그 과정에서 얼마나 야비하고 비열하게, 진보정치 세력을 숨막히게 하였는지는 더 말하고 싶지도 않지만, 백 번을 양보해, 그 절박함마저도 깡그리 부정하지는 않아.

 

 

2.  홍준표를 조롱하지나 말던지.

 

 하지만 이게 뭔가. 압도적인 지지, 최소한 극우들이 정권을 재집권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그네들은 니편 내편을 가르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성찰도 없어. 홍준표가 유승민을 보면서, "주적은 저긴데 왜 자꾸 나를 불편하게 하느냐, 이정희를 보는 것만 같다" 고 말을 할 때마다 다들 얼마나 웃어대었나. 그 모습을 보며 조롱하고, 뭐하는 거냐, 막 던진다, 코메디냐, 웃어대었지만, 실은 민주당을 지지한다는 이들도 똑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어. 심블리가 문후보에게 정책 검증을 들어갈 때마다, 왜 우리 문후보를 괴롭히느냐고, 적폐세력을 공격해야지, 왜 문후보를 물어뜯냐고. 스탠딩 자유토론이 있던 지난 밤, 토론을 마치고 인터넷에 들어가 보았다가, 내가 딴 세상에 살고 있는 건가 싶은 기분이 들 정도. 

 주적은 저긴데 왜 나한테 그러냐던, 홍준표를 조롱이나 하지 말던지. 뭐가 다른가. 적폐세력들이나 까고 흔들어야지, 왜 우리 문후보를 건드리느냐는, 그 말이. 당신들이 그토록 비웃는 홍준표의 그것과 어디가 달라. 정말 모르는 걸까, 홍준표를 손가락질 하면서, 홍준표와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걸.  

 

 

 3.  이렇게 대답하면 집토끼가 달아날까, 
      저렇게 대답하면 산토끼를 다 놓칠까.

 

 최소한 문 지지자들이었다면 그럴 줄 알았다. "우리 후보에게 질문이 몰려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당황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거나 "그 많은 질문들에 제대로 대답했더라면 그야말로 '준비된' 후보임을 부각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쉬웠다" 거나. 그러나 그네들은 그저 남탓으로 일관. 그것도 가장 만만한 진보정당의 후보를 향해 거침없는 비난을 쏟아내면서.

 정말로 그네들이 지지하는 중도개혁의 후보라면, 얼마나 좋은 기회였나. 선명한 진보의 스탠스를 보이는 심블리와, 또한 숨기지 않고 보수우파를 자임하는 유승민이 질문을 던질 때, 그이가 정말 중도개혁의 자기 철학이 있었다면, 자신은 극단에 서지 않은, 현실가능한 개혁을 어떠어떠하게 추진하겠다, 라고 보다 더 어필할 수 있질 않았겠나. 하지만 이른바 '준비된 후보'에 '촛불 후보'임을 자임하는 그이는, 그저 눈치만 볼 뿐이었다. 사드 배치, 주적론, 국가보안법 폐지, 노동악법 등의 질문들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면 보수표를 잃게 될까, 이렇게 말을 하면 진보표가 떨어질까. 최대한 어정쩡하게, 최대한 뭉뚱그리며. 후보는 도망가려고만 했고, 지지자들은 왜 자꾸 우리 후보만 괴롭히냐며 남탓만을 하고 있어. 

 문이나 안이나 다를 바가 없어. 한심하기 짝이 없더라. 저런 자들이 1, 2등을 달려. 그이들 가운데 이 나라의 대통령이 나온다니. 한심을 넘어 절망. 국가보안법 철폐에 대해 우물우물 답을 하지 못하는, 북한이 주적이 될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을 하지 못하는, 햇볕정책에 대해 달아나려고만 하는, 자신이 내놓은 공약과 정책이 어떤 근거와 경로를 통해 수립되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의 행적과 발언에 대해 책임을 지지 못하는,  그저 그이들의 머릿속에는, 이렇게 대답하면 호남표가 날아갈까, 이렇다 말을 하면 겨우 끌어모은 보수표가 떨어질까, 오로지 그 고민밖에는 어떠한 철학도 소신도 없는.

 

 

 4. 우리는 한 팀이 될 수 없다.

 

 한심과 절망의 마음으로 티비를 끄고 인터넷에 접속했을 땐 더욱 바닥을 치게 되어. 심블리에 대한 증오와 공격은 도를 넘어. 왜 문을 도와 팀플레이를 하지 않느냐는, 왜 문을 건드리느냐는, 익숙한 그 말들. 선거 때마다 진보정당을 향해 한나라의 이중대, 새누리의 이중대라며 손가락질을 해대던 그 논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질 않아. 단 한 번이 있었다면, 이정희처럼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러 출마했다며, 다까끼마사오를 들먹이며 문의 편에서 팀플레이를 해준다 싶을 때가 아니고선.

 언제까지 그럴 참인가. 극우꼴통과 접전을 벌이며, 현실가능한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자던, 미안하지만 최악만큼은 막아보자며 읍소를 하던 그 세력은, 압도적 지지를 받는 상황에서도, 진보정당을 향해 자신들의 조연 역할만을 충실히 해주기를 기대해. 삼십 년 가까이, 파이를 키워 진보세력의 공간을 넓히자던 그들의 논리는, 언제나 진보의 싹을 죽이며, 진보세력의 위상을 왜곡시키는 결과만을 낳고 있었다. 그래도 늘 차선과 차악의 절박함을 들먹이며 양보를 강요해온 그이들이, 약하고 힘없는 이들이 합리적 의심과 질문을 내놓는 것마저도 용납하고자 하지를 않아. 

 트위터니 댓글이니, 그런 곳들에 올라오는 토론 후기들은 가관이었다. 일대사 토론 속에서 문 후보만이 품격있는 토론을 했다는 말까지 보며 빵 터져버려. 그 어정쩡과 어물쩡, 쩔쩔매며 동문서답만을 일관하던 그이를 보며 어떻게 그런 식의 평을 할 수 있을까. 삼성동 자택 앞에서 "우리 박근혜님은 오로지 나라와 국민만을 바라보며 사심없이 일을 했다"며 울먹이던 친박 지지자들과 뭐가 다른지. 정말 의아하기만 하다. 사람이란 그런 걸까. 나 또한 지금 그러고 있는 걸까. 내 눈에 보고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대로만 듣는, 끝내 내가 믿고 싶어하는대로만 믿는, 그러곤 그게 사실이라 여기게 되는.  

 더는 그러지 말기를. 당신들과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한팀이 될 수 없다.

 

 

 5. 언제쯤.

 

 지지후보 또는 진영을 정해두고, 이 편인가 저 편인가 하는 걸 기준삼는다면 그건 앞뒤가 뒤집어져 있는 거. 우리에게 기준이라면, 내 삶의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해주는 가, 하는 것. 이 헬조선의 세상에 대해 무얼 어떻게 하겠는가, 수저론의 세상을 어떻게 바꾸어내겠는가, 내 삶의 평화, 이 땅의 평화를 어떻게 지켜내겠는가. 당신이 지지하는 후보에게 이 질문들을 던지는 게, 그렇게도 불편한가. 그가 말하는 개혁이 무엇이며, 그가 가진 전망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듣고싶다는 게 그렇게도 불편한가.

 선거란 지지후보를 못박아두고, 그 지지후보를 무조건 감싸거나 그 지지후보의 꽁무니를 쫓는 것이 아니. 선거는, 내 삶의 요구에 응답하는 세력을 찾는 일이며, 내 삶의 요구에 정직하게 투표하는 것. 언제쯤 우리는 그런 선거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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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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