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할매

냉이로그 2016. 12. 15. 10:02

 

 

 올 들어 가장 춥다는 날, 새벽. 찌개 하나를 끓여놓고, 감자 먹을 반찬거리들을 해두고, 오늘은 일찌감치 서귀포엘 넘어가야 하는데 걱정이 스며들다, 며칠 씩 그대로 쓰고 있는 반찬그릇을 뒤적이다 문 앞에 놓여있는 상자 하나가 눈에 들어와. 어제 받아놓았다는 택배 상자. 오빠, 밀양에서 쌀이 왔어. 어젯밤엔 집에 들어오자마자 부엌에 붙어 서 있느라, 감자를 재우고, 차게 식은 밥에 국을 떠넘기곤 서둘러 잠자리에 드느라, 제대로 보지 못한 그 선물.

 새벽, 아침을 차려놓고 출근을 준비하기에는 여전히 허둥댈 시간이지만, 아직 세 식구가 자고 있는 그나마 고요한 시간, 가만히 상자를 열어보았다. 밀양에서 보내온 쌀과 조그만 기념 뺏지. 그리고 에이포 종이에 인쇄되어 있는 송년, 연하의 편지.   

 

 

 

" …… 이미 철탑이 들어서고 찬성과 반대로 나뉜 마을공동체는 여전히 어려운 일들로 가득하지만, 끝내 우리의 진실이 승리하리라는 가녀린 기대를 놓지 않고자 하였습니다. …… 불과 두 달 전만해도 수백만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압도적 찬성으로 대통령이 탄핵당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으리라고 누가 예측이나 했겠습니까. 질기게 버티고 싸운다면 끝내 승리한다는 믿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 2017년 이 캄캄한 나라에 희망이 깃드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우리, 200여 세대 반대 주민들에게도 무언가 기쁜 소식이 날아드는 한 해가 되도록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새해 건강하시고, 만복이 깃드시길 소원합니다. 늘 고맙습니다. 

 2016년 한 해를 지나며, 밀양송전탑 반대대책위와 주민들 드림"

 

 

 안 그래도 고요하던 새벽이, 더 고요해지는 기분이었다. 이 겨울 들어 처음 받은 송년과 연하의 편지. 무얼 했다고, 이 눈물같은 쌀을 보내어주시는가. 밀양이 그토록 짓밟힐 때, 그 굽은 허리로 용역과 경찰들 발 아래 능욕을 당할 때, 손 한 번 잡으러 달려가는 것조차 하지를 못하던 시간들.   

 

 쌀봉지와 함께 담겨있던 뺏지 하나를, 출근가방 한 귀퉁이에 달았다. 노란리본이 매달려 있던 자리. 이제는 꽃할매가 노란리본의 친구가 되어.

 

* * *

 요즈음 들어, 감자가 젤로 좋아하는 놀이는, 씽크대에서 쌀을 씻을 때, 의자를 딛고 올라 함께 손을 담그는 거. 쌀 붓는 소리만 나면 다다다다 달려와선, 컵을 쥐어들곤 쌀자루에서 쌀을 덜고, 물을 받아 쌀을 씻고, 다시 물을 받아 쌀을 씻고, 서너 차례 그러고 난 다음엔 밥솥에 붓는 거까지. 이젠 감자하고 같이 이 눈물같은 쌀을 씻어 밥을 앉히겠네. 감자야, 기억나니? 감자가 엄마 뱃속에, 아주 콩알만한 감자로 있었을 때, 할매들이 지키던 움막엘 갔더란다. 지금은 기어이 그 자리에 송전탑이 우뚝 서버리고 만, 그 눈물의 움집. 품자도 기억나니? 할매들이 제주에 내려오던 올 여름, 난장이공 카페에서 할매들 품에 안겨 웃고 좋아하던. 환하게 웃으시던 할매들 얼굴.

 이젠 감자하고 이 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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