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칠일

품자로그 2016. 3. 31. 06:46

 

 

 봄이 되었고, 감자네 집 마당에는 이름을 묻고 싶은 꽃들이 한참이다. 간밤에 분 바람에 목련은 벌써 다 떨어져버렸어. 일을 마치고 부지런히 달려 집에 오면 아직 마당엔 볕이 남아있어. 이번 한 주는 감자가 마당엘 나가 놀지 못했네. 월요일, 어머니가 병원 치료를 받느라 서울로 올라가시고, 감자와 품자를 혼자 도맡아서 보아야 하는 달래는 정말 안쓰러울 정도. 산후도우미 분이 아침 아홉 시부터 저녁 다섯 시까지는 신생아 목욕이며 기저귀 빨래를 도와주지만, 도우미 분도 퇴근하고 나면 그야말로 달래 혼자 감자 품자를 감당해야만 하는. 그나마 두 아기 가운데 하나가 잠이라도 들어주면 좋으련만, 대부분은 품자가 달래 품에 안겨 젖을 빨고, 엄마 품을 내준 감자가 눈물이 글썽한 얼굴로 엄마와 아가에게 매달리고 있어.

 

 감자야, 아빠랑 양배추 밭에 가서 놀으까!

 

 

 

 

 

 품자를 보더니 신부님은 지 애비하고 똑같이 생겼다 하시고, 두희 샘은 아가 발을 신기해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해.

 

 

 

 이야아, 감자 형아는 지구별에 와서 일 년이 되었을 때 신부님을 만났는데, 품자는 스무하루가 되는 날 신부님 품에 안겼네 ㅎ

 

 

 

 

 신부님은 몇 번이고, 나도 엄마가 이렇게 키웠겠지, 엄마가 나도 이렇게 키웠을 텐데, 하는 말씀을 하셨다. 여든이 다 되신 신부님, 신부 서품을 받은지는 오십 해, 안 그래도 지난 주 서품 50주년을 기념하는 금경축미사가 있기도 하였는데, 갓태어난 아가를 내려다보는 신부님은 당신의 생이 아련하기만 한 것 같았다. 

 

 신부님의 사제 생활 오십 년은 그냥 오십 년이 아니라 그 험한 길 위에서 싸워온 오십 해. 지금 강정의 이야기를 하시다가도 평택이며 용산을 돌아보았고, 그 여느 때보다도 지치고 아득한 얼굴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다 신부님 앞에서 찾아 읽은 시가 있었어. 신부님의 금경축미사 때 송경동 시인이 즉석에서 써서 바쳤다는 그 헌정시. 감자를 안고서,

 

 감자야 들어봐. 여기에 나오는 달이 할아버지거든. 아빠가 읽어줄게.

 

 

사람들이 쓰러진 거리 위에

마지막까지 서 있던 달

사람들이 끌려간 공장 마당에 마지막까지 떠 있던 달

포크레인 위에 올라 있던 달

구치소 창살 안에 갇혀 있던 달

모든 파헤쳐지는 슬픔 위에

아픔 위에 고통 위에 설움 위에

분노 위에 떠 있던 달

평택 대추초교 지붕 위에 떠 있던 달

용산 철거민 망루 위에 떠 있던 달

천년의 강 위에 떠 있던 달

강정 구럼비 바위를 끌어안고 울던 달

콘크리트 바닥 위에 쓰러져 신음하던 달

 

그러나 세상의 평화는 지지 않으리

그러나 평등의 노래는 그치지 않으리

우리는 하느님을 몰랐지만

신부님을 만나며

가난한 자들의 하늘을 보았으니

신부님을 따라 걸으며

정의로운 자들의 하늘을 보았으니

세상의 복음을 알았으니.

 

 

         - 송경동 시인의 칼럼 가운데에서 (2016.3.29 / 경향신문)

 

 

     

 

 아닌 게 아니라 신부님이 너무 힘들어하시고 답답해하시니, 오두희 샘이 어디로든, 강정 바깥으로 신부님을 모시고 나가고 싶어, 감자네 집에 가자고 이끈 거였다. 그런데 어떻게 마음을 풀어드려야 할지, 어떻게 위로를 드릴 수 있을지, 어떻게 잠깐이나마 내려놓게 해드릴 수 있을지, 내 주변머리로는 그런 걸 잘 할 줄을 몰라. 오히려 강정은 어때요? 마을 분들은 어때요? 그렇게 소장이 접수되면 그 이후로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앞으로는 어떻게 하려 하고 있어요? 하면서 안 그래도 답답하고 막막한 가슴에, 자꾸만 더 그 얘기를 묻고만 있어 ㅠㅠ 잠시라도 강정을 잊자고 감자네 집엘 찾았는데, 또 그렇게 강정 얘기를. 

 

 

 

 그래도 아가들은 신부님께 위로를 드릴 수 있었을까. 주변머리없는 아빤 골치아픈 얘기를 자꾸만 더 하게 하고 그랬지만, 감자가 있어, 품자가 있어 웃는 숨을 쉬게 해드릴 수 있었다면.

 

 

 

 두희 샘은 묻곤 했다. 기범 씨는 강정이 뭐를 했으면 좋겠어요? 어떤 거를 해봤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없어 ㅠㅠ 내가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어. 자주 만나요, 자주 보면서 아무 얘기라도 자주. 그러다 보면 뭐라도.

 

  지난 해 말에 사랑방 미류가 난장이공에 다녀가던 때, 그제서야 두희 샘이 벌써 환갑을 맞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세상에나, 벌써 그렇게 되었다니. 신부님이 계신 자리마다 언제나 그림자처럼 곁을 지켜오신, 그야말로 현장의 궂은 일을 도맡아해오고 있는. 언젠가부터 두희 샘을 보면 마음이 더 저릿했다. 어떻게 그리 살아오실 수가 있었을까, 그러나 곁에는 늘 신부님이 계셨기에, 신부님 걱정을 먼저, 신부님 안부를 먼저, 신부님의 외로움과 고단함을 먼저 생각하느라, 두희 샘이 홀로 감당하고 있을 그 외로움에 대해서는 살피지를 못하던. 신부님을 달이라 말하던 시인의 시를 소리내어 읽으며, 두희 샘에게는 무어라 말하면 좋을지를 생각했다. 그 달과 그 달의 곁을 지키는.  

 

 오늘은 두희 샘이 많이 웃어 좋았다. 얘기를 많이 나눌 수 있어 좋았다.

 

 

  

 실은 오늘이 달래와 품자에게는 삼칠일이 되는 날. 흉내라도 내느라고 새벽에 일어나 밥을 짓고 나물을 무쳐 삼신할머니에게 올리는 삼신할미상을 차리기도 하였네. 삼신할머니 고맙습니다, 우리 우슬이도, 지슬이 형아처럼, 고요하고 평화롭게, 많이 웃는 아가로 자라게 해주세요. 건강하게 자라게 해주세요.

 

 

 

 품자는 좋았겠네. 아침엔 삼신할머니한테 인사를 드렸는데, 저녁엔 할아버지신부님이 찾아와 안아주셨어 ^ ^

 

 

 

 품자가 나온지 세이레가 되던 날, 감자품자네 집에는 귀한 손님들이 다녀갔다. 지치고 가난한 마음, 평화라는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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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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