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이

냉이로그 2016. 3. 7. 05:12

 

 

 벌써 한 달 너머 중문에 있는 폭포로 일을 하러 다니고 있다. 평화로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다보면 창천삼거리라는 데가 나와. 거기에서 왼쪽으로 돌면 중문, 오른쪽으로 돌면 안덕. 나는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고 서 있지만, 눈길은 오른쪽으로 난 길을 보곤 했다. 저기, 조금만 더 가면 명숙이 누나네 집이 있는데.

 

 하지만 그렇게 일을 다니면서 아직 한 번도 들러보질 못해. 일을 마치고 나면 땀투성이에 거지꼴이 되어. 어서 집에 가고 싶은 마음 뿐. 어쩌다 그러지 않은 날이라 해도 배가 불러가는 달래가, 감자를 안고 씨름하고 있을 거 생각에 쉽게 마음을 내지 못해.

 

 그러다가 어느 하루였다. 오전 중 작업을 하고 오후에 들어 비가 쏟아지던 날. 작업자들도 점심을 거르면서 일을 마무리짓고는 다들 철수했고, 나는 혼자 남아 비를 쫄딱 맞아가며 현장을 정리하고 나서던 길. 아침에 집을 나설 때부터 이날은 안덕에 들렀다 와야겠다 하고는 누이네 집으로 차를 몰았다. 지난 해, 난장이공 카페를 맡아서 하면서 낮은산에서 어린이책들을 한 권씩 모두 보내주었는데, 그 책들을 누이네 아이들에게 갖다주어야지 하고 있었던 거. 어차피 감자네느 영월 집에 그 책들이 모두 있으니, 누군가에게 주어야지 했던 건데, 누이네 소연이랑 호경이가 떠올라. 하긴 뭐, 누이도 난장이공 카페를 시작할 때 보리에서 낸 책들을 그만큼이나 많이 보내주기도 했는 걸.

 

 

 집에 없으면은 툇마루에 책만 살짝 놓고 와야지 하였는데, 마침 누이가 집에 있었다. 점심 먹을 때가 좀 지나긴 했지만, 누나도 아직이라 하였고, 그럼 우리 국수라도 같이 먹자 하고는 점심밥을 먹으러.

 

 우리는 칼국수에 파전, 막걸리까지 한 잔을 하였다. 나는 그동안 누나에게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하던 그런 얘기를 꺼내어 하기도 해. 시집간 누나를 보며 안타깝고 속상한 그런 마음, 누날 생각할 때마다 내 마음이 그랬다는 걸. 그런 마음이 드는 걸 느끼면서, 나 스스로에게 놀라기까지 했다. 아아, 이런 거구나, 시집간 누나 생각에 그런 마음이 든다는 게, 정말 내가 명숙이 누나를 그렇게 여기고 있었구나, 그동안엔 나도 몰랐는데.

 

 하지만 내가 속상해하던 건, 다 내려놓을 수 있었다. 언제나 밝고 씩씩한 얼굴, 어쩌면 나는 그런 누나 모습을 보며, 누나는 왜 그렇게 밝은 얼굴만을 할까, 그렇게 보이려 애쓰는 걸까, 하는 마음을 갖기도 했던 거 같아. 그래서 더 속상해하면서.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걸. 누이의 얘기를 들으며 낙천이라는 게 어떤 건지를 비로소 알게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누이 안에 있는 자존감이라는 단단한 힘. 어린시절의 행복, 그게 한 인간에게 얼마나 커다란 힘을 갖게 하는지. 아마 그런 얘기야 글이나 말로 적잖게 보거나 들어왔겠지만, 누나 얘기처럼 절실하게 들리기는 처음이었어.

 

 감동스러웠다. 며칠이 지나도록 새록 다시 들려오곤 하던, 누이가 들려주던 그 얘기.

 

 

 밥만 먹고 헤어지기가 아쉬워, 우리는 찻집으로 자리를 옮기자 하였고, 누나가 가끔 가보았다던 대평리 바닷가의 어느 전망좋은 카페를 찾아갔다. 

 

 와우, 이런 데가 있다니!  

 

 정말 오랜만에 누나의 수다를 들었다. 책모임 하는 얘기, 소연이 호경이 키우는 얘기, 최근 보았다던 그림책 얘기, 누이의 마음 속에 그리움으로 있는 글과그림의 선생님들 얘기, 그리고 내게는 매형이다 싶은 형님 얘기까지.

 

 고마워요, 누나. 나한테는 누나가 몽실언니로 남아있다는, 그말은 정말이었어. 작가학교에서 누나가 몽실언니를 강의하면서, 장면장면을 얘기하던 그 생생한 얼굴을 잊을 수가 없어, 그리고 내가 제주에 내려오던 첫 해, 연락도 없이 누나네 집에 찾아갔을 때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 쓰고 감자 알을 고르던 시골아낙 같던 누이 모습도. 아마 그때 각인이 되었던 것 같은. 아, 누나는 정말 몽실언니가 되어 살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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