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둥절

굴 속의 시간 2012. 6. 14. 01:02

오전엔 부여에서 정림사지복원을 위한 국제학술심포지엄. 점심을 먹고바로 숭례문으로 올라오니 당장 내일부터 일할 준비를 하라고. 이걸 어째, 부여로 다시 내려가 남은 일들이 이틀은 더 있고, 나는 아직 옷가지조차 제대로 챙겨나오질 않았는데.어떤 때는 기약없이 기다리게만 하여 진이빠지게 하더니, 또 이런 때는 이렇게급작스럽게불리곤 한다.그러나 찬밥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라는 걸. 그것도 석장님이 거둬주려고 일부러 자리를만들어주신 거. 오늘 새벽 다시 부여로 내려가 가마터에서 제와작업에 참여도 해보고, 익산 쪽 현장 답사들까지는 마치고, 담담날로 영월에 가 짐을 챙겨 올라오기로 했다. 이젠 정말 아주 나와 지낼 생각을 하고 짐을 싸야 해.

숭례문에는 기와가 올라가기 시작이다. 기와 올리는 걸 보러 이층 처마 위로 올라갔더니, 역시 이번에는 기와이기 인간문화재인 이근복 어른이 제자들과 직접 작업을 하고 있어. 혹여라도 일에 방해가 될까, 먼 발치에서 조심조심 지켜보는데, 번와장님이 환하게 웃으며 맞아줘. 그러지 말구, 이리 가까이 와서 보라구. 사진기 가져와서 찍어가지 그러잖느냐구. 웬걸. 주머니에 똑딱이 카메라가 있기는 했지만 조심스러워 꺼내지도 못하고 있던 터였다. 정말로 그래도 돼요? 그 꼭대기에 올라가 봐도 돼요? 사진두 찍어도 돼요? 일할 때는 추상처럼 엄하다는 소문을 진작에 듣고 있었기에 조심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그게 아니잖아. 당신이 먼저 둘이 함께 사진을 찍자 하시기도 하고, 구석구석 찾아 살펴주며 이곳 숭례문에서 이뤄지는 기와이기법들을 하나하나 들려주는 거라. 세상에, 어떤 보고서나 논문에서도 본 적이 없던 실제 지붕 위의 이야기. 번와장님은 기왓장과 그 아래 보토, 그리고 그것들이 목구조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하는 얘기들을 할아버지가 손주를 앞에 놓고 옛이야기를 들려주듯, 푸근하고도 재미나게 들려주었다. 세상에나, 번와장님과 함께 그 알매흙들을 밟고 다니며 그 구석구석이 어떻게 놓여지는지를 들을 수 있었다니.

그 분들은 모두 세상에 단 한 분씩인 분들이다.암것도 모르는 이 얼띤 애를 거둬주고 계신 이의상 석장님, 어제그제 가마터에서 뵈었던 한형준 제와장님, 그리고 오늘 숭례문 꼭대기에서손을 잡아주던 이근복 번와장님.해가 지고 수요일 저녁공부가 있는 교실로 가면서도 내내 어리둥절하기만 했다.그 분들 모두 그공정에는홀로 맥을 잇고 계신인간문화재 어른들.한꺼번에 그 분들 곁에서 이렇게. 그러니 어찌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가 있어.

새벽길로 다시부여에 가 있어야 한다.그러곤주말에는 짐을 모두 챙겨 올라와야 해. 침착해야 한다,이런때일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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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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