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굴 속의 시간 2012. 6. 21. 08:23

1.

목조건축포럼에서 열리는 세미나가 있는 날. 그래서 지난 주, 숭례문에 들어가 일을 하기로 하면서 21일 하루는 부득이하게 하루를 빼달라고 허락을 받았다. 진작에 그 포럼에 참가하고 싶어 거기 교수님께 메일까지 보내어 참가 문의를 하면서 꼭 참석하기로 약속을 해두고 있던 터. 그 약속이 있은 뒤로 숭레문 현장에 일을 하게 되었으니, 일을 시작하면서 소장님께 양해와 허락을.

2.

오늘 포럼이 열리는 곳은 덕수궁. 그러자면 대한문 앞을 또 다시 지나치겠구나. 엊그제도 숭례문에서 밥집을 찾아 걸으면서도 얼마 걷질 않아 바로 대한문 앞이 나오기에, 이렇게 가까웠구나 싶었는데, 여튼 그렇다. 다시 그 천막 앞에 걸음이 멈춰지면 마음이 복잡해지려나. 그러나 오늘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퇴근 후 걸어서라도 한 번씩 들러 지날 만한 곳.

3.

일곱 시 반부터 일은 시작하지만 일곱 시까지는 닿아야 여유있게 준비를 할 수 있다. 일옷으로 갈아입고,안전화에 안전모도 챙겨쓰고, 담배라도 한 대 피운다음 육축 위로 올라가자면. 다섯 시 반 기상. 하루 아침을 안 먹고 갔다가는 둥는 둘 알았어 ㅜㅜ.

4.

현장에서 나는 목수도 석공도, 와공도 그 무엇도 아니, 그저삽들고 뛰어다니는 잡부. 메워라 하면 메우고, 떠내라 하면 떠내고, 골라라 하면 고르고, 박아라 하면 박고, 끌어라 하면 끌고. 오전 참 시간이 되기도 전에 거품을 물어. 하긴 아직 일에 적응도 되질 않았으면서 가자마자 저녁 시간을 술판으로 꽉 채웠으니, 그 꼴이야 안 봐도 비디오라. 그러다 한껏 달아올라 불구덩이가 되어버리는 오후가 되어서는 거의 뭐 켁켁.그러나 행복하다. 다섯 시 반에 일을 마쳐 간이 샤워장에 들어가흙먼지를씻노라면.

5.

이 현장은 전지역이 금연이라 담배를 피울 수 있는 때가 아홉 시 오전 참, 열한 시 반 점심 때, 그리고 세 시 오후 참 때 뿐이라. 어이쿠야, 그게 과연 될까 했는데 그것도 되더라니. 담배는 무슨, 얼음물이나 마음껏 들이킬 수 있으면 좋겠지. 아니 그도 아니고 시원한 바람 한 줄금이나 불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할 것 같아.

6.

석장님이 그러지. 기범 씨 힘들지, 막일부터 배워야 기술자가 되는 거야. 기술자 되기가 그렇게어렵지. 너무 힘들게 하지 말고 쉬면서 하고 그래. 할아버지 그 말씀 한 마디가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어. 그러나 어디 쉬엄쉬엄 할 수가 있나, 다들 땀투성이가 되어 바쁘게 치고 나가는데 그 뒤에서일을 대주질 않으면.

7.

아아, 맞다. 어제 오후에는 급하게 철물점에 가 사올 것이 있어 현장 문을 나가 남대문 시장으로 뛰어가는데 지하터널 앞에서 누군가가 아는 척을 하지. 어어, 누구더라누구더라 한 이삼초를 생각하다가, 아아 부여, 가마터, 가장 나이 어리던 제와장! 부여에 있으면서 전통기와 굽는 현장에서 며칠을 쫓아가 구경하면서 만나던 제와장 가운데 한 명이다. 안 그래도 그 전날 아침 제와장 전수조교와 통화를 하니 나흘을 꼬박 밤낮으로 기와를 굽고는 몇 달만에 처음으로 이틀씩 휴가를 주었다던데, 그 중 하나가 숭례문 현장으로 올라온 거였다. 자기들이 구운 기와가 어떻게 올라가는지 볼 겸 참아왔다고. 조금 있으니 그 어린 친구 말고 또 한 친구가 올라와. 서로 얼마나 반갑던지. 거기에서는 내가 구경꾼으로 그네들 현장엘 갔었는데, 이번에는 거꾸로 그 친구들이 찾아온 게 되었네. 그 친구들도 여기 계셨어요? 하면서 얼마나 놀랍고 신기해하던지. 정말로 반갑더라, 인연도 참.

8.

어제는 일을 마치고 수요일 저녁반 스터디가 있어 교실에 갔는데, 세 시간 동안 거의 눈을 뜨고 졸았던 거 같아. 어떤 질문이 오갔는지,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교실에 도착해 가방을 여니 공책 한 권 없네. 시큼하게 찌르는 땀내만 올라와. 가방은 늘 그대로이지만 이제는 그 안에 짬에 쩌는 속옷에 작업복, 완전 노가다 가방이지 모야. 처음엔 현장에 간이 샤워장이 있는 줄도 몰라 갈아입을 옷도 안 챙기고 그냥 갔다가 퇴근하러 나서면서 지하철을 어떻게 탈지가 젤로 걱정이더라니. ㅋ

9.

전화기는 새로 했다. 스마트 말고 그냥 전화주세요 했더니, 이제 그냥 전화는 효도폰 같은 그런 것 밖에 없다나. 화면에 숫자 크고, 단추 크고 좋지 뭐야. 그래도 그전에는 스마트폰이랍시고 한 번씩 메일이며 블로그를 딜여다보기는 했는데, 오늘처럼 이렇게 짬이 나질 않으면 전혀 그러지도 못하겠다. 집에 들어가 자기 전에도 컴퓨터를 할 뭐가 되지를 않으니. 그런데 뭐, 이제는 그래봐야 별로 답답할 것도 불편할 것도 없다.

10.

오늘 달래 생일. 일요일에 미역국을 끓여주고온 거,그걸로 땡.서운하자면 그럴만도 할 텐데, 안 그래 하니그게 고맙지 뭐야. 저녁에도 혼자 밥먹겠네 했더니, 오늘끄타면 분회 모임이 있다고, 그거 하고 나서사진박물관 앞 분수대에 선전전하는데나 가볼까 그런다면서. 거기 나가봤자 아직 친한 사람 하나 없을 텐데. 요즘 뭐 한 학급에 스물이 안 되는 학교들을 다 통폐합시키겠다 그런다나. 그럼 전교생 쉰 명 남짓인 얘네 학교도 다 없어지고 그러겠네.생일 추카해. 어쩌다 이런 넘을 골랐니.

11.

하하, 여기가 내가 출근하는 일터. 백수냉이 출세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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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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