뭍에서 사흘

냉이로그 2015. 11. 27. 08:15

 

 

 뭍엘 다녀왔다. 돌아오던 밤에는 공항 하늘에 비행기가 가득하다고, 공중에서 몇 바퀴를 돌며 기다리기까지 해야 했다. 제주는 비바람이 쳤고, 하룻밤을 자고 나니 감자네 집 마당에는 모래알 같은 싸락눈이 얼굴을 때렸다. 한라산 일대엔 대설경보라더니, 카페에 올라오니 모래알 같던 눈은 굵은 솜털의 함박눈으로 바뀌어. 아직 십일월인데, 첫눈이라니.

 

 뭍엘 다녀오니 제주도 겨울에 들어 있어. 아직 십일월이 다 가질 않았는데, 벌써 겨울이라니. 일주도로변에서 일을 한다는 말랴가 궁금해 전화를 넣었더니, 눈은 무슨 눈이냐며 비만 오고 있다던가. 제주는 그렇다. 바다 가까이와 한라 쪽 중산간은 이렇게 날이 달라. 하귀 하나로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가 만난 빵군과 라다도 눈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하귀에는 바람만 미친듯이 불어대.

 

 뭍에 다녀오고 마음이 스산하다. 아직 십일월을 충분히 느끼지 못했어. 십일월 끄트머리를 좀 더 붙잡고 싶은 마음. 나뭇잎이 떨어지는 달, 찬 바람이 시작하는 날, 아직은 겨울이라 하고 싶지 않은, 아직은 마지막이 아닌 달. 그런데 어느 새 십일월의 끝자락이라니. 뭍에 다녀오고 나니 몇 계단이 성큼 지난 것만 같아.

 

 

 

 

 1. 천안

 

 

 천안엘 올라갔다. 처음이던 청주공항. 감자의 아홉 번째 비행기. 말랴의 친구가 사무장으로 있는 <사이>라는 공간에서 준비한 그꿈들 북콘서트. 마을 협동조합에서 마련한 그 공간은 꽤나 매력적인 곳이었다. 공간 뿐 아니라 그 공간에서 사람들과 관계 맺고, 그 관계 속에서 일을 꾸려나가는 모습들이. 그리고 반갑고 고마웁던 얼굴들. 처음 만난 이들도, 누군가를 사이에 두고 건너서 알고 있던 이들도, 그리고 일부러 천안까지 찾아와준 오래된 얼굴들은 말할 것도 없이.  

 

 

 

 그리고 또다시 함께 한 시와 이모야.

 

 

 

 

 그날 참 많은 얼굴들을 만났다. 공간 사이의 사무장으로 그 북콘을 있게끔 한 셔미 님은 지난 여름 난장이공 카페에도 다녀갔던 말랴의 친구. 따뜻한 잠자리에 아침상, 그리고 그보다 더 따순 마음으로 챙겨주시던 케이와이씨의 표 간사님, 꽤 오래 전 관심있게 보아오던 청주의 공룡 활동가들, 그리고 한빛회의 장애활동가 형들, 이제야 얼굴을 보게 된 빈집의 람. 그리고 홍성에서부터 먼 길을 찾아와 준 울림이네 식구와 더 먼 길을 넘어온 보령 큰아빠까지.

 

 그 각별한 만남 가운데에서도 이 북콘 기획에서부터 진행까지 맡아 했던 희주라는 청소년은 특별하게 남아. 처음 그 아이가 콘티라는 걸 보내왔을 때부터 얼마나 놀라웁던지. 이걸 청소년 아이가 스스로 썼다니, 단지 문장의 어떤 것에서가 아니라 이 아이가 무엇을 보려 하고 있고, 어디에 마음이 닿아있는지, 그리고 그걸 누군가에게 건네며 대화하고자 하는 모습에, 도무지 어떤 아이일까 궁금했더랬어.

 

 아주 귀한 아이를 만났다.

 

 

 

 

 

 2. 영월

 

 

 천안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영월로 넘어갔다. 차를 운전해 움직였으면 그리 부담스럽지 않은 길이었지만, 기차역으로, 기차와 기차를 갈아타가면서 충청에서 강원으로 넘어가기에는 길이 쉽질 않아. 게다가 일곱달 째 접어드는 임부와 돌박이 아기에 짐보따리를 주렁주렁 단 채.

 

 피네 아저씨가 청주역까지 태워다 주어. 서둘러 움직인다 했는데도, 역 앞에서 담배 한 대 나누어 피우는 시간도 빠듯했어. 하룻밤을 함께 보냈다고는 하지만, 왠지 잠깐 스쳐 만나고 헤어지는 것 같은 아쉬움. 가족같은 사람이라는 말이 모자랄 때가 있다. 피네 아저씨가 그래.

 

 청주역에서 제천역까지 충북선 기차를 타고, 제천역에서 영월역까지 영동선 기차를 갈아타.

 

 

 이야, 드디어 감자도 영월 집엘 가보게 되는구나.

 

 

 감자야, 거기가 정말 우리집이야. 감자도 엄마 뱃속에 있을 땐 엄마랑 둘이 아홉 달을 살았어.

 

 

 무리한 일정이긴 했지만, 이렇게라도 영월 집엘 들러가지 못하면 또 언제 가볼 수 있을지를 몰라. 내년 봄 품자가 태어나고 나면, 그러고나선 품자가 감자만큼 크기 전까진 일부러 시간을 내기란 어려울 거. 그래서 이번 뭍길에 영월엘 들러가기로 한 거였다. 나로서는 일 년 반이나 지나 이제야 겨우 가보게 되는 길.

 

 

 그렇게 하여 우리는 뭍에 올라간 이튿날, 영월로 넘어가. 얼마나 반가웁던지. 그 사이에 아주 조금 달라진 것들이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요즘 변하는 속도에 대면 영월은 그대로였다. 그 조그만 읍내도 그대로, 그 조그만 읍내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도 그대로, 그리고 물론 어느 쪽으로 고개를 들어올려도 구름이 걸려 있는 산새도 그대로.

 

 집도 그대로일까. 그렇게나 오래 비워두고 있었는데, 우리 집도 우리가 떠나올 때 그대로일까.

 

 

 

 

 

3. 서울

 

 

 사흘 째 되던 날은 서울로. 영월에서 미처 챙겨오지 못한 짐은 택배를 싸서 제주로 보내어 놓은 뒤, 그 다음 네 식구는 기차를 타고 청량리로, 청량리역에서 엄마를 만나, 엄마를 모시고 다섯이서 함께 김포공항으로, 그러곤 비행기를 타고 제주로. 서둘러도 시간에 쫓겼고, 아기와 임산부와 노인과 주렁주렁 짐보따리로는 매번 다음 교통편을 놓치게 될까봐 애써가며 종종걸음을 해야 하던.

 

 사흘 째 저녁, 할머니를 모시고 제주로 내려오던 공항 수유실에서. 감자는 자꾸만 아빠 얼굴에 안경을 나꿔채 가네. 그러고는 아빠 얼굴에 다시 씌워준다는 게 자꾸만 아빠 눈을 찔러 ㅠㅠ

 

 

 그러나 걸음이 더 무거웠던 건, 형이 얼마나 슬프고 외로울지를 모르지 않기 때문. 엄마가 얼마나 아프고 힘이 들지를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엄마는 제주에 내려가고 나면 서로 움직이기만 해도 어깨가 부딪힐 좁은 집에서 감자를 보다보면 그 마음을 잊을 수 있을지 몰라. 하지만 형은, 든자리는 몰라도 난자리는 클 수밖에 없다고 엄마가 없는 빈방을 보며 얼마나 마음이 무너져내릴까. 그토록이나 애써왔는데, 애써온 그것마저도 모두 부정되는 것처럼 느끼게 될 그 괴로움을. 아니, 엄마라고 어찌 마음이 편할 수가 있겠는지. 평생을 그렇게 억눌린 마음에, 말보다 울음이 먼저 나오기만 하는 그 깊은 마음의 병을.

 

 그렇게 꼬박 사흘을 뭍에 다녀왔다. 아마 그 사흘 가운데 반은 비행기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러 가거나, 기차를 타거나 기차를 타러가거나, 전철을 타거나, 누군가의 차에 실려가거나 하면서 무언가를 타고 움직이는 시간이었던 것도 같은. 검은 밤이 되어 제주에 닿으니 비바람이 불어대었고, 하룻밤을 자고 나니 모래알 같은 눈이 얼굴을 때려, 솜털같은 함박눈이 펄펄, 이 섬은 어느덧 겨울이 되어 있었다.

 

 십일 월이 이렇게 가고 있다. 붙잡고만 싶은 십일월.

 

 

 

 이런 사진도 있었더랬네. 공간 사이 바닥에 써 있던 글귀, 그 바닥에 앉아 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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