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길 식구

감자로그 2015. 8. 19. 07:31

 

 

0. 일요일과 월요일 사이

 

 

 기차길옆 식구들이 제주에 다녀갔다. 큰이모랑 도르리들은 강정 평화센터 개관을 축하하는 걸개그림을 그리는 일로, 훈이 삼촌과 성수는 신부님 서각 작업대를 만들어드리기로 한 약속을 지키러. 그렇게들 강정에 내려온 길에 감자를 보러 난장이공 카페엘 들러.

 

 카페가 월요일에 쉬는 날이니 늦도록 긴 밤을 함께 하기에는 일요일이 좋겠다, 싶어. 강정에서 걸개를 그리고 난 식구들이 김영갑 갤러리로, 월정으로 바람을 쏘이러 나갔다 하기에, 부러 내려온 낮은산 아저씨와 조팀장도 그리로 넘어가. 그래서 낮은산 아저씨가 훈이 삼촌이랑 성수를 데리고 감자네 난장이공 카페로 돌아왔을 때는 문 닫을 시간이 지나고 밤 열 시가 넘어. 그러고는 문닫은 카페에서 새벽을 맞아.

 

 

 

 

1. 훈이 삼촌

 

 

 

 

 무엇보다 훈이 삼촌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물론 그 사이에도 지난 여름 사각형 갤러리에서 그꿈들 원화전시회를 할 때도 만났고, 올 봄 북콘서트 때에도 공부방 아이들이 공연을 해주어 그때도 만났지만, 그렇게 만날 때는언제나 아이들을 챙기는 일들로 바빴으니, 마음을 놓아가며 가만히 이야기를 나누거나 그럴 형편은 되지가 못해.

 

 수연 이모가 아픈지 벌써 일 년 반. 수연이모도 훈이 삼촌도 그 마음이, 그 시간이 어땠을지. 오히려 안부를 묻기가 더 어렵기만 했어. 엄살이란 걸 모르는 훈이 삼촌은, 이모의 안부를 물을 때면 매번 경과가 좋다고, 좋아지고 있다고, 걱정어린 마음에 오히려 안심을 주기만 했어. 그랬으니 훈이 삼촌을 좋아하는 낮은산 아저씨도, 부러 비행기를 타고 제주까지 날아온 거. 두 번의 수술,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게 된다는 어떤 선택에 대한 후회나 안타까움. 훈이 삼촌은 진작에 감히 그 너비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형이지만, 몇 해가 지나 나누게 된 속깊은 이야기들에 더욱 깊어진 두께를 느껴.

 

 잘 이겨낼 것이다. 훈이 삼촌이기에, 그리고 수연 이모이기에, 그 곁에 공부방 아이들이 있고 공동체 식구들이 언제나 함께 하기에, 꿋꿋이 이겨낼 수 있을 거라 믿어마지 않는다. 그럴 수 있을 거야.

 

 

 

 

 

 

2. 성수

 

 

 

 그날 밤, 훈이 삼촌과 오랜만에 속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던 거에 더불어, 정말 좋았던 건 성수를 만난 일이었다. 물론 성수를 알아 지내어온 거야 여서일곱 해가 되고 있지만, 나는 이날 밤에야 비로소 성수를 새로 만난 것 같았어. 처음 성수 얘기를 전해듣거나, 성수를 소개받고, 성수의 안부를 들을 때마다 이모에게 듣던 얘기는 언제나 "공부방에 너랑 똑같은 애가 있어. 하는 짓도, 말하는 것도, 어벙에 꺼벙, 남들 하지 않는 실수를 연발하는 어리버리……" 그런 식의 묘사만으로도 물론 단박에 정이 가는 아이이긴 했다. 마음이 여리고 순한 이 어리버리꽈 인간들을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ㅋㅋ

 

 그런데 이날 밤, 새벽이 이윽해지면서 성수의 직장 생활 이야기며, 일을 하며 겪고 느끼는 얘기들을 들으며 나는 몇 번이나 감동이 오곤 했다. 정말로 예쁜 아이구나.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움직이는 화면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는 성수는, 최근 <<전태일평전>>을 읽었다며, 그 시절 청계천의 미싱 시다들의 모습과 지금 또래 청년들이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 하나도 다르지 않다던. 단지 그 시절의 미싱이 아니라 마우스를 만지고 있을 뿐.

 

 성수는 말이 가볍지 않았다. 조심스러웠고, 그 나이에 어울리는 겸손과 자의식까지 배어 있었다. 그 겸손이나 자의식이란 것도 지나치거나 넘치면은 몸의 솔직함을 벗어나는 거라 자연스러워보이지 않는 걸진데, 성수의 말과 표정에서 느끼는 그것은, 그런 것과는 다른, 아주 예쁜 그것이었어.

 

 이야기를 나누는 중간 근이 이야기를 하기도 했어. 아, 그래!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기시감 같은 건, 근이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이로는 근이가 세 살 밑이겠구나. 올 봄 기차길옆작은학교 정기공연 때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지. 기뻤다. 성수와 근이, 정말 좋은 또래 청년으로, 형 아우가 되어갈 수 있을 것 같아.

 

 

 

 

3. 기차길 식구들.

 

 

 감자네 집은 손님을 여럿 치를 형편이 되질 않지만, 카페가 있어 다행. 그날 새벽을 함께 한 낮은산 아저씨랑 훈이 삼촌, 성수는 난장이공 다락방에 잠자리를 두어. 다음 날은 카페를 쉬는 월요일, 강정에서 큰이모와 도르리 친구들, 낮은산 조팀장이 난장이공으로 넘어와.

 

 마음 같아선 카페도 깨끗이 해놓고 시원한 음료부터 식사, 안주 같은 것들을 한 가지씩 다 차려 내놓고 싶었건만, 카페가 쉰다고 해서 거를 수 없는 아침 감자 빨래에, 대충 급한 장만 본다 해도 어쨌든 다 떨어진 재료를 사다놓기도 해야 했고, 그러는 동안 마냥 기다리라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쉽지만 청소도 되지 못한 카페에서 음료 몇 가지를 내놓는 것 밖에 ㅜㅜ

 

 

 

 감자야, 기차길 누나들이야. 세상에나, 깜짝 놀란 건, 이 아이들이 기껏해야 열여덟이거나 스물셋 아이들인데도, 어쩜 그리 아기를 잘 보는지. 이 초보 엄마아빠가 지난 열 달을 꼬박 매달려 겨우 알 것 같은 손길들이 이미 이 아이들에게는 있어. 공동체의 힘이라는 게 얼마나 커다란 건지를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그곳의 아기가 더 어린 아기들을 보고, 동생들을 돌보고, 또 더 어린 아기와 아기가, 아이와 아이가, 그 아이가 자라 이모삼촌이 되고, 그 이모삼촌의 아기를 아기였던 그 언니형아들이 돌보고……. 사람을 짓는 일, 사람을 키우는 일, 사람과 사람이 기대어 사는 일, 끝내 내가 너의 언니가 되고, 네가 다시 더 어린 아이들의 언니가 되어주는 일.

 

 

 

 감자는 성수 형아에게 꽂혔네. 성수 형아가 쓴 모자가 좋아. 날이 다시 저물고 공항에서 헤어질 때까지 그렇게 성수 형아의 품에 안겨.

 

 

 

 

 

 

 큰이모는 그동안 쓴 책들 가운데 몇 권을 난장이공에 갖다 주기도 했어. 낮은산에서 낸 책들이야 다 꽂혀 있지만, 아빠가 영월 집에 두고 온 터라 챙기지 못한 다른 책들 몇 권. 감자는 얼마나 더 있어야 이모야가 쓴 책들을 읽게 될까 ^ ^

 

 

 

 벌써 십오년이 넘었구나. 아빠가 이모를 만나고, 기차길옆공부방을 만나고, 그렇게 손잡아 지내온 것이. 그런데 이제는 아빠보다 엄마가 이모야를 더 좋아하네. 이모야를 공항에서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엄마가 하는 얘기 감자도 들었겠네. "김중미 선생님은 정말 볼 때마다 마음을 편하게 해주시고, 얘기나누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져." 알고보면 엄마도 나름 까칠한 언니라 누군가에게 이렇게 후한 점수를 남발하진 않거든.

 

 

 

 그런데 모니모니 해도 감자가 정말로 기다리는 건 하준이랑 예준이, 이람이 같은 공부방의 갓난아기 동무들인지 몰라. 글쎄, 올 가을엔 인천이랑 강화의 공동체 애엄마들이 제주에 내려올지 모른다 하니, 그때를 기다려봐야겠네. 올 봄에만 해도, 감자네 식구가 한 번 인천에 올라가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카페란 걸 하게 되고 나니 아마도 그럴 수는 없을 거야.

 

 감자네가 난장이공 카페를 맡아 하기 시작한 뒤로 세번 째 맞는 정기휴일날, 기차길 이모야랑 형아누나들, 그리고 새끼개 삼촌이 다녀갔어. 그리고 그 식구들을 만나러 저기 멀리에 낮은산 식구까지. 어쩐지 이날 만큼은 여기가 제주가 아니라 다른 어디인 것만 같더라. 안그래도 훈이 삼촌이 계속 그말을 하곤 했어. 난장이공 카페에 들어서던 순간부터, 이건 뭔가 비현실적 공간인 것 같다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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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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