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리는 화가이며, 노래를 부르는 뮤지션이며, 그리고 공방을 하며 도자기인형을 만드는 제주 동쪽에 사는 친구의 집, 선흘에 다녀왔다. 겨울 어느 날, 그 친구들은 제주 서쪽 감자네 집엘 다녀갔고, 그 얼마 뒤 감자의 백일 선물로 자신들이 만든 도자기로 모빌을 선물해 주었어. 그러곤 봄이 오면 꼭 감자랑 함께 동쪽으로 놀러오라 초대를 하면서. 그리고 어느 봄날, 감자네 식구들은 동쪽 친구의 집엘 다녀왔다.
감자네 방 한 구석에 걸어놓은 모빌. 감자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
오랜만에 친구네 블로그에 들어가보았더니, 그때 감자를 위해 모빌을 만들던 작업 노트가 사진들이랑 함께 올려져 있어. 한동안 업데이트가 없어 방문이 뜸했는데, 어머나 이걸 이제야 보았네. 어쩌면 좋아, 이 작업노트 아래로 고마운 마음 한 글자 적질 못하고 있었으니.
얼마 전에 태어난, 친구의 아이를 위해 만든 분홍 돌고래 모빌입니다.
마침 돌고래 머리처럼 맨들맨들한 연분홍색 조개껍데기가 있어 함께 달아줬어요.
돌고래들이 함께 물살을 헤치며 헤엄치는 모습을 상상하며 만들었습니다.
아기도 새로 만난 이 세상에서 친구들과 함께 즐겁기를,
항상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민은 그림을 그린다. 그런데 고향인 제주에 내려와 지내면서부터는 아마도 그림그리는 일보다는 인형을 만들어 굽는 일을 더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아. 요즈음은 한참 올 6월에 있을 인형 전시 준비로 아주 바쁘다고 해. 거기, 그꿈들 원화전시를 처음 열던 합정동의 벼레별씨 까페, 사각형 갤러리에서.
민은 나와 동갑내기 친구. 그 전에는 작업 때문에 짧게 만난 일이 있었다. 창비아동문고 출간 100호 기념선집에 들어가는 단편동화 한 편에 민이 그림을 그렸더랬어. 외방리 석고개에 살던 때였고, 그때 민이 석고개엘 다녀갔어.
제주에 내려와 지내면서, 게다가 첫 일터가 거문오름 쪽이 되면서 또치언니에게 얘길 듣기는 했다. 민이 거기에 살고 있다고, 냉이가 일하러 가는 바로 그 가까이에서 공방을 하면서 도자기 인형을 굽고 있다고. 하지만 그때가지는 아직 짧은 인연의 기억 뿐이라 스스럼없이 연락하고 찾아가기에는 어색함이 많았다. 하물며, 나같은 젬병의 주변머리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 암튼 그렇게 소식만을 알고 지내고 있었는데, 제라진 갤러리 오픈 행사에 가서 얼굴을 보았다. 하하, 지금 생각해 보면 오글거림이 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서로를 불러.
그 뒤로 제라진에서 <<그꿈들>> 전시가 준비되고, 그 전시의 기획과 실무를 민이 맡아 하게 되면서 더 만나고, 의논을 나누고, 밥을 같이 먹고, 감자 소식을 전하고……. 해가 바뀌던 무렵까지도 'OO씨' 하는 호칭으로 존댓말을 놓질 못해. 새해부터는 말을 놓자고, 약속과 다짐을 하고는, 처음엔 그게 잘 되질 않아, 한동안은 국어책을 읽는 것 같은 어색한 반말이었지만, 언제부터였더라. 으응, 이제는 어색함없이 그냥 친구.
민은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은 강정을 찾는다고 했다. 특별한 일이 없다고 하여 발길이 뜸해지기 시작하면 점점 잊혀지게 될 것만 같다며, 스스로에게 하는 약속처럼 적어도 한 주일에 한 번 이상은, 강정엘 가고 있다고. 그곳엘 가서 평화지킴이들이랑 드로잉 모임을 갖거나 저마다 서로의 취미나 재능을 나눌 수 있는 일이라도 소소하게 함께 모여 나누는 걸로나마, 강정을 저버리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평화를 지킨다는 건 끝내 일상을 지키는 거에 있다는 걸 알기에.
제주가 고향인 민은, 강정 뿐 아니라 너무도 빨리 변해버린, 그리고 변해가고 있는 제주가 아프다고 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아픈 곳, 거기.
경도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민과 함께 '모습'이라는 공방에서 도자기 인형을 만들어. 그러나 내게는 그림그리는 사람, 도자기 인형을 굽는 사람보다는 노래하는 뮤지션으로 더 또렷하게 그려지기만 해. 그건 어쩌면 내가 곡을 쓰고 음악을 하는 이에 대한 어떤 동경이 있기 때문일까. 소리를 다룬다는 것, 노랫말이 없더라도, 어떤 음과 박만으로 내 감정을 전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부럽기만 한 일인지. 게다가 그 아름다운 음과 박에 노랫말까지 실어 흐르게 할 수 있다는 건.
경의 노래를 처음 들은 건 지난가을 제주에서 열린 프린지페스티벌의 어느 소극장. 곡을 쓰고, 노래를 부른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처럼이나 목소리만으로 시가 되고, 노랫말까지도 이미 시가 되어버린, 그런 무대를 보게 될 줄이야. 그날로 바로 경이 짓고 부르는 노래에 충성도 높은 지지자가 되었다.
제라진 갤러리에서 그꿈들 원화전시를 준비하고, 한 달이 넘는 전시가 시작되던 무렵, 경은 음반을 내게 되어 서울로 녹음을 다닌다고 했다. 그러곤 제라진 그꿈들 전시를 여는 행사에서 노래를 불러 그 고요한 떨림으로 갤러리를 채워주어. 이내 앨범이 나왔고, 첫 단독콘서트가 소극장에서 있었어. 그러나 12월 20일, 경의 콘서트는 제라진 그꿈들 전시의 두 번째 행사와 같은 날인 바람에 그날은 리허설만 볼 수 있었을 뿐. 신기하기도 하지. 육십 일을 갓 넘긴 감자를 안고, 무대에서 바로 앞에서 리허설을 보고 있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울어대던 감자가, 흘러내오는 노랫소리에 울음을 뚝.
봄날, 친구네가 사는 집에 초대를 받아 다녀오던 날 우리는 그 전까지는 경험해보지 못한 호사를 누리기까지 해. 민이 경에게 요즘 새로 만들었다는 노래를 청했고, 경은 방에서 기타와 악보를 가지고 나왔다. 그렇게 하여 가지게 된 우리들만을 위한 조그만 무대. 카펫 같은 담요가 깔린 나무마루, 온기가 남아있는 화목난로, 그이들이 손수 만든 인형들로 꾸며진 뒷벽. 서너걸음밖에 떨어지지 않은 그 앞에서 경이 걸상에 앉아 노래를 불렀고, 그 앞에서 우리는 담요를 깔고 앉았다. 민도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는 새 노래.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당신, 귀를 기울여보니 너무 많은 소리들이 쏟아져내려. 쏟아져내리는 건 어쩌면 내 마음일까, 어쩌면 당신도 아무 말 하지 않는 내게서 쏟아져내리는 소리를 듣는 건 아닐까.
기타를 배운 건 몇 해가 되지 않는다지, 그것도 알음알음으로 물어가며 거의 혼자 배우다시피. 곡을 짓고 쓰는 것도 따로 배우질 않았다는데, 그런데 어쩜 이런 노래를. 그렇다면 나 같은 애도 그럴 수가 있을까, 노래는 안 되더라도 곡을 짓는다는 거. 아마도 다음 생으로 미루어야 할 평생의 꿈이기는 하겠지만.
경의 노래는 이제 음원으로도 들을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멜론 같은 데서 다운받을 수도 있게 한 거.
봄이 되었다. 제주에는 손꼽히는 아기자기 벼룩시장이 둘 있다는데, 그 하나는 섬의 동쪽 세화리 바닷가에서 열리는 '벨롱장', 그리고 또 하나는 섬의 서쪽 장전리 하루하나 까페에서 열리는 '반짝반짝착한가게'. 그러나 일 년이 넘도록 어느 곳도 제대로 가보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민과 경은 그동안에도 달마다 한 번씩 하루하나 벼룩시장엘 나오곤 했었다는 거. 모습공방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온 도자기인형들. 아, 그랬구나. 거기라면 감자네 집에서 한 걸음이면 닿는 곳, 왠지 혼자서는 쑥스러워 가보지를 못하고 있었는데, 친구들도 좌판을 펼친다는 걸 알았다면 진작에 갔을 것을. 하지만 겨울 동안은 벼룩시장도 방학에 접어들어, 봄이 오면 다시 시작을 한다 하였는데, 꽃삼월이 되면서 마지막 주말에 장터가 다시 열릴 거라고.
감자네가 갔을 때는 이미 장터가 북적이고 있었어. 그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 길가에는 얼마나 많은 차들이 줄을 잇고 서 있었는지. 가까이멀리 제주에서 찾아온 이들부터 멀리에서 여행온 사람들도 일부러 찾아 모여드는.
마당 한 켠 햇살 좋은 자리에 모습 공방의 도자기 인형들도 예쁘게 놓여져 있어.
아, 그리고 하루하나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수니 언니도 까페 문 앞에 좌판을 벌여놓고 있어. 옷걸이에는 언니가 입던 옷들. 달래는 수니 언니가 입던 멋진 코트를 단돈 삼처넌에 득템을 하고 만족만족대만족. 안그래도 임신 전에 입던 옷을 하나도 가지고 내려오질 않아 입을 옷이 마땅치 않다며 어쩌지, 하고 있던 차였는데, 이렇게나 마음에 드는 옷을, 그것도 수니 언니가 입고 지내던 ^ ^
세상 구석구석에는 솜씨 좋은 이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까페 마당 한가득 펼쳐놓은 갖가지 물건들은 여태 구경도 못해본 것들이 많아. 솜씨 좋은 공예품들부터 정성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을 먹을거리들까지. 어느 가게나 북적였지만, 민과 경이 구워서 만든 도자기인형 가게 앞엔 사람들 발길이 끊이질 않아.
모습 공방의 도자기인형들 한쪽에는 경이 내놓은 음반도 수줍게 놓여져 있어. 그 곁에 조그맣게 노래가 흘러나오게 했으면 더 좋겠건만, 벼룩시장 마당에선 미리 신청하고 참가하는 뮤지션들의 공연이 짬짬이 있기도 하니, 예정된 공연에 방해가 되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며 그냥 조용히 음반만 올려놓아.
한 시간 넘게 벼룩시장 구경을 하고 있을 때였나, 감자는 맘마를 먹어야 했고, 그래서 감자와 감자어멍은 장삿집 주인 자리를 꿰차고 앉아.
수니 언니 옷걸이는 금세 동이 나버린 것 같아. 하긴 내 몸에 맞지 않더라도 오랫동안 좋아해온 뮤지션이 쓰던 물건, 몸에 지니던 거라면 그냥 간직하려고라도 줄을 서서 사고 싶어하겠지. 그런데 이날 달래는 완전 신났지 모야. 저런 걸 지갑이라고 하는지 핸드백이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암튼 수니 언니가 달래를 살짝 불러서는 저 핸드백 같은 지갑을 선물로 주어. 달래 얼굴은 완전 ^________^ 이렇게 되었어.
그래서 우리도 수니 언니에게 보답도 할 겸, 친구네 인형도 소개하고 싶어 모습공방 좌판 앞으로. 수니 언니가 고른 건 산호 목걸이.
달래는 수니 언니 옷을 입고, 수니 언니는 친구들이 만든 산호 목걸이를 걸고, 감자와 함께 사진을 찰칵. 으아앙, 그런데 감자는 너무 오래 바깥 바람 속에 있어 그랬는지 잠투정이 살짝 시작하고 있었어 ㅠㅠ
그런데 감자 눈앞으로 돌고래 목걸이를 흔들어주니 다시 웃음을 찾아. 감자야, 이 이모야랑 삼촌이 돌고래모빌 만들어준 이모삼촌이야. 감자가 좋아하는 돌고래모빌 ^ ^
섬의 서쪽 감자네 집 가까이 장터에서 반갑게 만난 뒤, 그 다음 주엔 감자네 식구가 섬의 동쪽 돌고래 이모삼촌네 집으로 넘어갔어. 물론 닷새가 열흘이 되고, 열흘이 보름이 되고, 보름이 한 달이 되어가고 있는 근이 삼촌도 함께. 그러니까 섬의 서쪽 중산간 마을에서 섬의 동쪽 중산간 마을로.
선흘에서 돌아오는 길, 우리 넷은 입모아 얘기를 해. 어디 다른 세계엘 다녀오는 거 같아. 그런 델 한 번도 가보진 않았지만, 동유럽이나 북유럽 어디 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 그 이웃집엘 다녀오는 것 같다고. 농사꾼이건 목수를 하건 저마다 악기 하나 쯤은 연주를 하기도 하고, 시를 사랑하고 그림을 좋아하는. 그래서 이따금씩 한 집에 모여 그이들만의 소박한 음악회를 열거나 함께 시를 감상하고 철학을 논하기도 한다던, 그런 풍경 속.
좋았다. 두 사람의 취향이나 성품이 그대로 배어 있어 삐걱이면서도 아늑한 돌집이 좋았고, 인형을 만드는 두 사람의 등짝이며 표정 같은 걸 그대로 상상할 수 있을 것만 같던 공방 작업실도 그랬고, 두 사람이 살아온 시간들이 징검돌처럼 놓여있는 여행길에서 하나둘 모아온 물건들마저도. 그리고 무엇보다 한 손에는 자유로움을, 또 다른 손엔 아름다움을 놓지 않고서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참 좋았다.
유월에 있을 전시 준비로 요즈음엔 하루 열여섯 시간씩 작업을 하고 있다는데, 전시를 마치고 나서 조금은 여유로울 수 있을 때, 그때 다시 찾아가 봐야지. 아마 그 전에 강정이든 장전 벼룩시장이든 다른 자리에서 또 만나기야 하겠지만. 암튼 그때 다시 찾아가게 되면, 그땐 저 아늑한 작업실에서 더 놀라운 작품들이 태어나 있겠지. 그러면 그땐 경의 노래를 더 많이 불러달라고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