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주에 내려와 이곳 소길마을에 조그맣고 예쁜 집을 빌려 지낼 수 있었던 건, 피네 아저씨가 들이네에게 부탁을 하면서 그리되었던 거. 제주에 내려오기 전까지는 들이네와 전혀 아는 사이가 아니었어. 피네 아저씨가 들이네에게 골칫거리 하나가 제주로 가게 될 건데 어디 지낼만한 집이 있는지를 알아봐 달라 한 거였고, 들이네 식구들은 피네 아저씨 아우가 온다니까 처음 만난 날부터 잠자리를 내어주더니, 마치 피네 아저씨를 대하듯 그 정성으로 이 골칫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꼬박 일 년이 지나도록 더할 수 없는 정과 성으로 감자네의 큰집 식구가 되어주어. 달래는 벌써 몇 번이고 들이네 식구의 정성에 눈물을 보이곤 했어.
들이아빠와 소줏병을 비울 때면 더러 피네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곤 했어. 우리 사이에는 피네 아저씨가 있었으니, 그렇게 셋이 만나지 못하고 있는 걸 늘 아쉬워하면서. 들이아빠가 이렇게 좋은 아우를 만들어주어 고맙다 하면, 피네 아저씨는 난감해하면서 그 문제아를 던져주기만 해놓곤 한 번 다녀가지 못하고 있다며 미안해하곤 했어. 마치 처치곤란한 골칫거리를 짐짝처럼 보내어놓고 맡아달라고 한 것처럼 말이지 ㅠㅠ
암튼 그렇게 들이아빠와 둘이 만나도 피네 아저씨까지 셋이 있는 듯, 그렇게 일 년을 지내던 끝에 요 얼마 전 세월호 관련 일을 보러 피네 아저씨가 제주 섬으로 입도를 하게 된 거. 작업은 하루 일이었지만, 그러고 난 뒤 아저씨는 닷새를 더 머물어. 이틀 뒤에는 우렁각시 언니까지 내려오면서 들이네와 감자네, 보령 식구는 모두 모여 내내 붙어 지내면서 명절같은 오박육일을 함께.
들이아빠, 그러니까 레기덩 형님은 피네 아저씨가 내려오니 마치 그 앞에서 초등 오학년 아이처럼 어찌나 귀여운 모습이 되던지. 피네 아저씨는 중학생 형아 쯤이라 할까, 레기덩 형님은 반 걸음 뒤에서 중학생 형아를 쫓아다니는 오학년 짜리 아이. 나는 모 삼학년 쯤 되는 막내처럼 까불기만 했을 거라는 건 안봐도 비디오 ㅋㅋ
언젠가 레기덩 형님은 툴툴대기도 했어. 자기한테 감자 큰아빠라 하더니 피네 아저씨를 보고도 큰아빠, 낮은산 아저씨가 왔을 때도 큰아빠, 보는 사람마다 큰아빠라 그런다면서 말이지 ㅎㅎ 어쨌든 피네 아저씨가 내려왔으니 뭔가 호칭을 나누느라 레기덩 형님은 소길큰아빠, 피네 아저씨는 보령큰아빠라 하기로 하였는데, 이게 웬걸. 하하, 피네 아저씨는 시종 큰아빠가 아닌 할아버지 포쓰를 보여 ㅋㅋ 그리하여 호칭은 자연스레 정리.
"감자야, 보령큰아빠 왔다!" / "와아아, 보령할아버지다!"
감자, 프리지아, 할아버지 아기띠, 장난꾸러기 큰아빠.
보령큰엄마도 이십년만에 제주도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어요.
아저씨가 제주에 내려온 셋째날. 소길리에서는 그 전날 밤, 들이네 집에서 모여 타일에 그림을 그린 뒤, 이야기꽃술꽃으로 새벽 다섯시까지 열심히 달려. 아침엔 제주에서 작업한 타일들을 배에 싣고 올라갈 임정자 선생님께 전해야 했으니 눕자마자 등을 떼어야 했어. 임선생님은 배를 타고 떠나서도 강진, 해남을 거쳐 강원도까지 계속 이어지는 타일작업 일정.
하가리에서임선생님을 배웅한 뒤 잠깐 들러본 곽지 바다. 하늘빛도, 물빛도 얼마나 예쁘던지.
다시 저녁이 오기 전까지, 잠시라도 짬을 내어 눈을 좀 붙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침에 주인집 할머니가 문 앞에 배추 몇 포기를 뽑아다 주고 가셨는데, 피네 아저씨가 그걸 보곤 감자네 집 김치를 담가주겠다고 해. 으아앙, 김치 담가주는 건 좋지만 일단은 한 숨 자자, 는 게 내 마음이었지만, 아저씬 멸치액젓과 생강, 쪽파, 수육거리 고기를 사러 기어이 장을 보러 나섰어 ㅠㅠ 그리하여 우리들의 삼시세끼가 시작.
피네 아저씨 음식 솜씨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김치담그는 걸 실제로 눈앞에서 보며 나는 감탄에 감탄이었다. 이야아, 아저씨 정말 멋지다, 이십 년 가까이 보아온 중에서 젤로 존경스런 모습. 이 모습을 보던 달래는 삼시세끼 찍는 거 같다면서, 피네 아저씨가 꼭 차승원 같다며 행복한 감탄.
그렇게 우리 남자 셋은 따땃한 제주 봄볕을 맞으며 감자네 마당에 앉아 두런두런 수다를 늘어놓으며 배추를 다듬고, 양념을 버무렸다. 마치 여느 집 마당의 아즈망들이 그러한 것처럼.
바로 무친 겉절이에 참기름과 깨가루를 살짝 무치니 그 맛이 얼마나 좋던지. 음식 맛에 관해서는 한 치의 아량이 없는 달래도 맛있다, 맛있다 우적우적쩝쩝. 막걸리를 배달해와야 했고, 저녁 술상을 위해 한쪽에서는 수육을 삶아. 고기 비린내를 빼느라 마늘과 커피가루를 넣고 삶은 수육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비계를 먹지 않는 달래는 그것마저 맛이 있더라며 감탄이었다. 하하, 장난꾸러기 레기덩 형님은 그 사이에 감자를 그려 김치 위에 올려놓아 ㅋㅋ
넷째날, 피네 아저씨와 우렁각시 언니 둘이서만 제주를 느낄 시간을 주자고, 저녁에나 모이자고 계획을 세웠건만 그러기에는 하늘이, 햇살이 너무도 좋았다. 아니, 날이 좋았다는 건 어쩌면 핑계, 우리는 다 같이 따라붙고 싶었고, 모두 함께 소풍을 나가고 싶었다. 심지어는 그 멀리까지는 아직 감자를 데리고 가기를 망설이던 달래가 먼저 기저귀 가방을 챙겨.
감자야, 여긴 제주섬 동쪽이야. 어마어마한 할아버지 나무들이 있는 숲길.
감자로서는 첫 소풍인 셈. 겨울을 보내는 동안에는 아직 집 밖에 나서기에는 한참 갓난아기였고, 게다가 겨울 찬바람은 어른이라도 피하고만 싶은 거. 그러나 감자는 그 사이 다섯 달 아기가 되었고, 게다가 이젠 따스한 봄볕에 봄내음이 시작하고 있어. 숲길 사이로 감자를 안고 걷는데 얼마나 좋아하던지. 마치 자기 발로 걷고 있기라도 한 듯, 두 팔과 다리를 휘젓고, 눈동자를 반짝이며 봄의 초록을 겨워하였다.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이렇게나 좋아할 줄이야.
우리는 가장 촌스러운 관광객의 포쓰를 다 따라하기로 하였다. 줄을 서서 단체 사진도 찍자, 돌아가며 가족 사진도 찍자, 하나둘셋에 뜀뛰기를 하면서도 찍을까 ㅎㅎ
감자네 식구도.
보령큰아빠네도.
아즈망들이랑 감자.
아방들이랑 감자.
감자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감자어멍과 감자아방은 이 명절같은 날들을 충분히 즐기지 못했을 거. 날마다 새벽까지 이어지던 술자리, 그 시끌시끌한 속에서도 감자는 잘 놀다가 가만히 잠이 들곤 했다.
게다가 아빤 날마다 밤늦도록 술을 먹느라 상태가 메롱메롱이지, 엄마도 역시 잠이 모자라지. 실제로 감자를 낳고, 그런 자리에서 술을 마시거나, 날마다 감자를 안고 집밖으로 나가거나 하는 일은 지금껏 없었다. 일부러 피했고, 엄두가 나질 않았어. 그러니 감자어멍과 아방으로서는 큰 용기에 모험과도 같은.
아빠는 또 밤새 술을 먹을 건가봐 ㅜㅜ
들이누나한테 안아달래야지 ㅎㅎ
감자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그 다음 날 오전들은 한 개도 남아있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상이 나를 지켜준다 그랬던가, 그렇게 날마다 새벽이 기울어서야 술자리를 정리하면서도, 다음 날 아침이면 어쩔 수 없이 번쩍번쩍 눈을 떠. 적어도 기저귀 빨래를 미룰 수는 없으니, 감자 맘마까지 건너뛸 수는 없으니.
고맙게도 감자는 명절같던 그 오박육일 내내 잘 놀고 잘 웃고 잘 지내주었다. 다음 날 아침에 깨어 부시시한 아빠 얼굴을 보고나면 저렇게 웃어주어. 별로 울거나 보채는 일이 없어, 어쩌면 이리도 순할까 하는 사람들 말에, 우리는 늘 대답하곤 했다. 엄마아빠가 늙었다는 거 알고 도와주는 거 같아요 ㅎㅎ 그리고 하나 더 보태면, 아빠가 술꾼이라는 걸 벌써 알아버렸나 봐요, 하하하.
보령큰엄마큰아빠가 올라가던 날. 한무데기의 사람들이 공항으로 나가려 집 앞 정낭으로 돌아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감자어멍은 눈물이 나더라고 했다.
공항으로 배웅을 나갔다 돌아오는 길, 레기덩 형님과 나는 이 멍멍함이 얼마나 오래일까를 얘기했다. 한 일주일은 있어야 이 허전함이 덜해질까, 앞으로도 한동안은 두 사람이 계속 곁에 있을 것만 같은데. 지난 엿새는 마치 하룻밤인 양 잠깐이었던 것도 같다가 한 보름은 되는 양 오랜 시간인 것도 같은.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 집에 돌아와 앉아 전화기에 찍어놓았던 사진들을 하나하나 넘겨보는데, 벌써 또 일년은 지난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해. 그렇게 보령의 큰집 식구들이 다녀갔다. 감자네 집에서는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보령큰아빠가 담가주고 간 김치를 아직도 끼니마다 우적우적 퍼먹고 있어. 이 집에 누가 다녀가긴 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