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을 걸려서야 써서 보낸 독후감.
[밀양을 살다 2] 할매의 무릎 맡 / 프레시안
봄이 시작할 즈음, 꽃보다 할매 라는 이름의 밀양 구술사 프로젝트 라는 것이 있다는 걸 알았다. 십 년 가까운 싸움, 그곳엔 그 사이 두 분의 어르신이 목숨을 잃었고, 송전탑은 하나 둘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껏 그 굽은 등으로 모든 것을 지고서, 움막을 지어 그 땅을 지키고 있는 할매와 할배 아지매들. 지난 겨울에야 그곳 움막을 찾았더랬다. 할매의 마른 눈물을 마주하는 그 앞에서야 마음으로 많은 약속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그러나 그렇게 단 하룻밤을 보내고 돌아와서는 그저 아프고 불편한 마음으로나 그곳의 소식들을 메일로 받아보는 것이 다일 뿐. 행정대집행이 닥쳐오고 있다는, 단 하루씩만이라도 돌아가며 지킴이가 되어달라는 외침이 속속들이 들어오고 있었지만, 그 다급한 타전들에 아무런 응답도 하지를 못해. 그러다가 보게 된 구술사 프로젝트를 보고 후원금을 조금 보낸 것이 계기였다. 그러곤 두어 달이 지나, 책이 곧 나올 거라 하였고, 프로젝트에 참여해 직접 인터뷰어가 되기도 한 사랑방 명숙 언니가 서평을 부탁하였고, 나는 자신이 없으면서도 못 한단 말을 세게 하질 못했다. 그렇게 하여 쓰게 된 독후감.
읽는 데만 해도 며칠이 걸렸다. 밤에 돌아와 할매 한 분의 무릎 맡에 있다 보면 잠이 들었고, 그러다간 서너 시간 뒤 알람 소리에 일어나 눈을 비비다 고작 몇 줄을 끄적이고 말아. 그렇게 여러 날 밤에 걸쳐서야 겨우 읽었고, 여러 날 새벽에 몇 줄씩을 끄적여, 약속 시간을 훌쩍 넘겨서야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글을 보낼 즈음엔 다시 그곳으로부터 다급한 메일이 속속 들어오고 있어. 그래서 숙제를 마치고 나서도 보내는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책 한 권을 읽어 이깟 글을 써서 보낸다는 것이 다 무언가 싶은.
그곳에는 지금도 굽은 등 위로, 우리를 대신한 이 싸움을, 당신의 생을 켜켜이 지고온 할매들이 있다. 그리고 그 할매할배들 앞에서 온전히 그것들을 들어주며 또박또박 받아적은 이들이 있었다. 그렇게 하여 이 책은, 읽는 내내 할매의 무릎 맡으로 이끌어주었고, 나는 서둘 수도 없이, 아주 오래 걸려서야 다 읽을 수가 있었다.
* 미류의 블로그에 보면 이 귀한 기록에 대한 서평들을 한 데 묶어놓은 것이 있기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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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을 살다>>를 읽고 - 할매의 무릎 맡
굽은 등으로 지고온 것들, 온전히 들어주는 이들
1. 듣는 책
이 책은 듣는 책이다. 그렇다고 하여 요즘 디지털로 만들어낸다고 하는 오디오북인가 하는 그런 것은 아니다.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겨, 구술기록자들이 또박또박 받아적은 글자를 읽게 되지만 그러다보면 목소리가 들려온다. 곱거나 나직한 여느 배우의 목소리가 아닌, 쇳내가 나고 투박한, 때로는 질박한 그곳 사투리가 귀에 설어, 몸을 좀 더 기울여 귀를 세우고 들어야 하게 되는. 그렇게 하여 어느덧 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매의 무릎 맡에 있게 되곤 하였다. 그곳은 지난겨울 하룻밤을 지새웠던 127번 움막이기도 했고, 군불을 지펴 이불을 덮어놓은 늙은 아낙의 오두막이기도 했다.
2. 스무 쪽
그래서였을까, 책을 읽다 잠들곤 하던 게 여러 날이었다. 아니, 어쩌면 나는 잠을 청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한 권의 책 안에는 모두 열다섯 편, 열일곱 분의 이야기가 있지만, 하루에 두 편 이상을 읽지 못했다. 스무 쪽 남짓, 한 사람의 생을 오롯이 펼쳐내기에는 결코 넉넉하다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스무 쪽 남짓, 편편의 글들은 그 한 분 한 분의 온기를 느끼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하기에 나는 스무 쪽 남짓의 그 한 생을 만나고 나면 책을 덮어야 했다. 종이로는 스무 쪽 남짓이지만 그 안에서 만난 생은 이삼십 분만에 젖어들었다가 이내 잦아들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직 나는 덕촌 할매의 무릎 맡을 떠나지 못했고, 현풍 아지매의 생을 만나러 가기에는 깊은 숨을 가다듬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내 나는 그 무릎 맡에서 잠에 들곤 하였다.
3. 무릎 맡
곡절이 많고, 굽이가 깊다. 억울한 세월이 길었고, 한이 깊었지만 그런 굽잇길 가운데에서도 기뻤던 생의 순간을 들려줄 때가 그지없이 좋았다. 그도 아니어서 생의 기쁨이랄 것 하나 없는 신산한 삶이기만 하였더라도, 그 세월을 돌아보는 애잔한 목소리에 평안이 느껴지는 순간들을 만났다. 그 고단한 삶 앞에서 감히, 평안이라는 말을 써도 될까. 아마도 그 평안은, 할매들이 내 속을 이야기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들어주는 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들어주는 사람,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 손을 잡아주고 함께 눈물을 흘려주는 사람. 눈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할매들 무릎 맡을 찾은 구술기록자들은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할매들은 그 고단한 삶을 살아오는 동안, 당신 속에 있는 얘기를 온몸으로 들어주는 이를 처음 만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누구도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을 때, 우리는 아프다. 그 이야기를 들어드리고자 어떤 이들이 그 무릎 맡을 찾았고, 그이들이 받아적은 것을 읽는 내내 나 또한 그 무릎 맡으로 가 있게 되곤 하였다.
4. 들어주는 일
들어주는 이가 없을 때, 우리는 외롭다. 아주 대단한 분쟁이나 갈등이 아닐지어도, 언제나 그렇다. 아니, 어쩌면 나날이 살아가는 일상에서 더 그러한지도 몰라. 묻히거나 무시당하고, 막히거나 그저 순종해야만 하고, 그러다보면 가슴에 쌓여 어디로도 흘려보내지 못할 말과 말들. 말은 그저 말이 아니라 사연이다. 흘려보낼 수 없어 꾸역꾸역 맺힌 것들은 쌓이고 쌓여 가슴에 한이 된다. 들추어내고자 하면 별 것도 아닌 것 같은 사소한 것들, 그러나 셀 수 없이 이어지고 되풀이된 그것들은 이미 권력 관계를 증거한다. 우리가 숨막혀 하는 것은 별 것도 아닌 것 같은 사소한 그것들이 아니라, 그 권력 관계라는 것을. 하물며 그 고단한 세월을 등에 지고 살아온 할매의 삶에 배어있는 사연들이야.
들어주는 일이야말로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봉사라고 했다. 그 누군가의 말을 듣는다는 건 서러움을 듣는 일이고, 바람을 듣는 일, 끝내 그이의 존재에 공감을 하는 일. 그러나 지금 세상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사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너무나 힘겨웁다. 돈과 권력을 중심에 놓고서, 편리와 합리, 효율만이 우선시 되는 세상에서 저마다의 사연이나 서러움, 바람 따위는 방해가 되기만 해. 듣기는 하되 들어주지 않는 일이 다반사이며, 더 많은 경우는 아예 귀를 막고 들으려 하지도 않는.
저 나무의 사연을 알고 나면 함부로 베어낼 수가 있을까, 저 강줄기가 품어온 사연을 알면 그토록 쉽게 파헤칠 수가 있을까, 저 골짜기의 다람쥐와 아기 까마귀, 노루의 사연을 알고서도 겁없이 메워버릴 수가 있을까, 저 국경선 너머 마을에 사는 백성들의 저녁 기도와 아침 밥상을 알고서도 포탄을 쏘아올릴 수가 있을까, 저 화악산 아랫자락에서 부락을 이루어 살아온 할매 할배가 살아온 세월을 알고서도 마구 짓밟아 파헤칠 수가 있을까.
그래서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는 일은, 어쩌면 그이의 삶을 함께 '들어'주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혼자 들기 무거운 그것을 함께 들고 가는 일. 하기에 누군가의 삶에 연대를 한다는 말도, 그 시작은 그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에서 비롯할 것이다. 진정을 다해 그 사연에 귀를 기울여 들어줄 때, 비로소 그 삶을 함께 들고 갈 수 있게 되는 것. 그러니 들어준다는 건 그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며, 그 전부인지도 모르겠다.
5. 굽은 등
열일곱 분의 할매와 할배, 아지매들. 그이들의 무릎 맡에서 스무 쪽으로는 당치도 않을 무거운 삶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팠다. 부끄러움이야 온전히 내 몫이니 그것을 엄살처럼 내보이는 거야 부질없는 짓임을 잘 안다. 그 부끄러움을 넘어, 진정으로 아프게 들려오던 것은 마지막 사력을 다하고 있는 할매들의 목소리. 이 싸움을 꼭 이겨낼 거라고, 고향을 삶을, 지켜내고야 말 거라는, 할매 아지매들의 목소리가 육성으로 들려와.
생을 다 걸고 계신 그 분들의 목소리를 무릎 맡에서 듣고 있으면서도, 송전탑이 다 들어서고야 만 모습이 어슴하게 떠올려지기도 한다는 건, 이 얼마나 예의없는 짓이란 말인가. 기어이 그 하늘, 그 머리 위를 가로지르며 쏘아질 수백 킬로와트의 무시무시한 것들. 그러나 나도 모르게 그런 장면이 그려지곤 하여 몸서리가 쳐지곤 하였다. 이러면 안 되지, 그런 생각 따윈 해서도 안 된다,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할매들은 그 모든 것을 등에 지고 있었다. 고향의 산천을 등에 지고 있었고, 그 땅에 세우겠다는 송전탑과 그 하늘을 가로지르겠다는 765KW 전류를 지고 있었다. 온갖 패악질을 서슴지 않는 한전 직원을, 경찰 병력을, 용역깡패를 그 작은 몸뚱이로 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싸움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저 멀리 불빛 휘황한 도시 자본의 불빛과 그것을 지탱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 강요하는 핵발전의 경고까지도, 당신들의 그 굽은 등으로 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는 일은 없다. 사연을 '들어'주는 일이, 두 팔을 맞잡아 그 삶의 사연을 함께 '들어'주는 일이 되는 것처럼, 어쩌면 그 무언가를 온전히 등에 지는 것으로, 그 자체로 그 싸움을 이겨낸 것인지도 몰라. 온몸으로 '지고' 있기에, '지지' 않을 싸움. 이렇게 그 땅의 할배 할매 아지매들은 그 싸움의 모든 것을 온 몸으로 증거하고 있다.
6. 뒤안 길
지난겨울 비탈의 움막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올 때 뵈었던 희경 할매의 등허리가 생각나. 기역자를 닮은 할매의 굽은 등을 보며, 삼십 킬로밖에 되지 않는 몸으로, 그 무거운 것들을 켜켜이 진 채로 가파른 뒤안 길을 오르던 그 뒷모습. 할매의 굽은 등 위로는 아스라히 쌓여 있었다. 송전탑 따위는 가히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높이 쌓아올려진 것들. 슬픔이며 분노며, 외롭고도 무자비했던 싸움의 순간순간들, 그리고 끝끝내 지켜야 할 그곳의 조그만 우주. 할매의 굽은 등이 지고 있는 그 끝에는 하늘이 있었고, 이내 그 하늘이 부릅뜬 눈으로 내려다보며 물었다. 너, 너도 저 할매의 굽은 등 위를 타고 앉아 누르고 있지는 않은지. 아니라고 잘라 말할 수가 없어. 자본과 문명의 그물 속, 편리에 길들여진 내 삶이 저 할매의 굽은 등을 더욱 짓눌러왔다는 것을.
7. 지고가다, 들어주다
꽤나 오래 걸려서야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때로는 손을 뗄 수가 없어 단숨에 다 읽어버렸다, 하는 말이, 한 권의 책에 대한 대단한 찬사가 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이불 속에서 품으면서 그렇게나 여러 날이 걸려 한 분 한 분의 무릎 맡에 가 있을 수 있던 것이 그지없이 고맙고도 좋았다.
할매와 아지매, 할배들을 만나 이야기를 받아적은 구술기록자들은, 그야말로 당신들의 이야기를 온전히 받들었고, 받아적었다. 그 누구도 이 싸움을 알려 가르치고자 들지 않았고, 손을 잡아달라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그저 한 분 한 분의 무릎 맡으로 이끌어 데려다줄 뿐.
이야기를 들려준 할매와 아지매, 할배들 역시 있는그대로의 생을 내보일 뿐, 그 이상 어떤 것도 과장하거나 감추거나 설명으로 부연하지를 않는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지고 온 세월을 그대로 들려주었고, 당신들이 등에 지고 있는 이 싸움을 딱 당신들의 목소리에 실어 들려주었다.
온몸으로 그곳의 생을 지고 온 분들, 게다가 이 땅을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짐까지도 고스란히 그 굽은 등에 지고, 지지 않을 싸움을 해오고 있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등에 지고 온 것들을 온전히 들어주는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이들이 있어, 나는 그 무게를 등에 지고 있는 분들 무릎 맡으로 갈 수 있었고, 밀양 너머의 밀양 이야기에, 송전탑 너머의 송전탑 이야기에 마음을 적실 수 있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남은 질문 한 가지. 지금 내가 먹고 입고 타고다니는 것들이 과연 송전탑의 그것인지, 아님 사력을 다하는 움막의 그것인지. 최소한 그 굽은 등이 지고 있는 무게에서 내 삶이 저지르는 것만큼이라도 덜어들여야 하는 것은 아닌지.(2014. 5.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