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냉이로그 2013. 8. 26. 14:30




1. 

 그이를 만난 건 숭례문에서 일을 하던 2012년이지만, 그보다 몇 해 전부터 나는 김씨라는 이름으로 그이를 알고 있었다. 지금은 <한옥을 생각하다> 라는 이름으로 블로그 이름을 바꾸었지만, 그때만 해도 <엔지니어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라는 제목을 달고 있던.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보게 된 블로그였는데, 그날로 바로 즐겨찾기를 해놓고는 그이가 내어놓는 이야기들을 눈여겨 보고 있었어. 그런 거를 여기에도 적어놓은 일이 있는데, 날짜를 보니 그게
2009년이다. 당시에는 '엔지니어 김씨'로만 알 뿐이었는데, 숭례문 현장에 들어간 첫날, 연장 사진을 찍는 누군가의 등짝을 보고는, 바로 그 사람이 '엔지니어 김씨'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그즈음 그이는 <<한옥을 생각하다>>라는 놀라운 책을 세상에 내놓았는데, 마침 내 가방 안에 그 책이 있어, 그 자리에서 싸인을 부탁하던 것이 만남의 시작이었다. 그러곤 숭례문에서 함께 일을. 


2. 

 아마도 내가 그 엉아의 오랜 팬이었는지라, 틈만 나면 엉겨붙으려 해서이기도 하였겠지만, 술 좋아하고 말 어눌한 꺼벙이 스타일이어서 쉽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게다가 신기한 건, 내가 들어와 살고 있는 이곳 강원도 골짜기가 그 엉아가 나고 자란 고향이던 것. 아쉽게도 엉아가 영월에 내려오는 명절이면 내가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지라 동네에서 자리깔고 술을 칠 기회는 없었지만, 암튼 그 별것도 아닌 우연은 별스런 인연으로 이어지게 하였다. 


3. 

 사람 좋은 거야 둘째 치고, 이 사람은 내가 건축에 입문해서 만난 여느 선배 기술자나 연구자들로부터는 들을 수 없던 질문들을 던져주곤 하였다. 건축이 아니라 집을 논했고, 재료나 양식으로써의 집이 아니라 삶을 담는 그릇으로써의 집을 가까이 끌어당겨주었다. 써놓고 보니 너무 상투적인 표현. 건축 언저리에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하는 말, 삶을 담는 그릇. 다시 말해, 폼나게 말할 것 없이, 집이란 그저 짓기에 좋고, 살기에 좋아야 하고, 편안한 것이 제일이다. 생활에, 활동에, 몸에 맞는 집, 그래서 그 안에 사는 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집. 그게 아니라면 그 어떤 오래된 정의나 익숙한 개념에도 질문을 던진다. 폼나게 묘사하거나 그럴 듯하게 해석해놓은 어떤 것에도, 그게 정녕 몸에 맞는가, 생활에 맞는가, 그것을 짓거나 그것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방식인가, 에 합당하지 않다면 어설피 동의하지 않는다. 그게 아니라면 바닥부터 다시. 


4. 

 집안 벌초를 마치고 내려온 그이를 장릉 앞에서 만났다. 기왕에 만난 곳이 능말이었으니, 금몽암엘 함께 올라. 법당 툇마루에 앉았다. 햇살은 가을의 그것이었고, 그이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시원하였다. 그간 정리해온 것들로, 출간을 준비하고 있는 책에서 말해나갈 이야기. 한옥은 비씨다, 춥다, 불편하다, 그러니 재료를 어떻게 바꾸고, 시공에 신기술을 어떻게 도입하고.. 하는 그런 소화불량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땅에서 짓고 살아온 집들이 가진 빛과 그림자, 그 디엔에이에 정면으로 말을 거는 일. 진별리 고씨굴 앞에서 칡국수를 먹고, 모운동으로 올랐다. 내가 날마다 출퇴근을 하고 있는 그 길이, 그이에겐 어린 시절 추억이 오롯이 남아있는 길이라는 게 신기해. 내가 날마다 오르는 모운동 산골짝의 옥동광업소 역시 그이에게는 어린시절 큰아버지가 일하던 곳. 모운동 산방을 내려와 그이가 벌초를 하러 내려온 녹전을 지났고, 그 어린시절 걸어서 재를 넘던 육급이, 수라리재를 넘어 석항으로, 다시 영월읍으로. 

 
5. 

 시간마다 각 일 병씩, 세 시간만에 각 삼 병씩을 쓰러뜨리고 나는 그대로 녹다운. 아침에 일어나니 팔꿈치 여기저기가 까져 있고, 손가락도 어딘가에 찢겨 피딱지가 묻어 있는데, 눈치를 살펴 달래에게 물으니, 계단을 오르고 내리며 많이도 자빠졌다나 모라나. 아무래도 나는 술 좋아하기는 전과 같으나, 이젠 이기지를 못하는 모양이다. 여태 술이 깨지를 않아 머릿속이 왕왕거리고 있어. 그러나 왕왕 머릿속으로도 드는 생각은, 집짓는 동네에 들어와 그이를 만난 게 참으로 복이구나 하는 것. 게다가 다행스러운 것은, 그이가 기름기같은 것 전혀 걸칠 줄 모르는 꺼벙이 스타일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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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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