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현장엘 나가게 되었다.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이 익숙한 풍경, 그러나 이건 모운동 산방에서 내려다 본 풍경이 아니다. 여기는 전라북도 무주, 덕유산 봉우리에서 이어지는 능선. 영월에서 출발, 무려 네 시간을 달려갔건만, 그곳 풍경은 날마다 오르던 모운동에서 내다보던 풍경과 많이도 닮아 있었다. 생전 처음 밟아보는 땅, 그곳에서도 해발 구백의 산꼭대기에 현장이 있어. 이거, 산이라는 걸 잘 알지 못하는 애가, 어쩌다가 이 산골짝에서 저 산골짝으로, 그렇게 산꼭댁만 타고 다니며 지내게 되어 버렸는지, 그저 혼자 웃음이 났다. 이렇게 산꼭댁을 옮겨다니며 지내다보면, 언젠가는 아주 미덥고 든든한 친구를 얻게 될 수 있으려는지. 산이라는 친구.
일을 시작할 준비를 하며 현장 답사로 다녀온 길. 마침 그곳은 함께 간 길목수(아니지, 지금은 어엿한 길소장)가 어린 시절을 뛰놀던 그 산이었다. 모운동 산마루에서 내다보면 그 밑으로 달래네 학교가 보이듯이, 저 위에 있는 사진 풍경에는 길목수가 다닌 중학교가 내다 보이는. 국민학교 때부터 소풍 때마다 이 산을 올라, 오르는 내내 어린 시절 이야기를 쉬지 않더니, 과연 도면과 지적도 없이도 샛길과 샛길로 나있는 현장을 바로 찾아내었다. 하하, 엊그제는 영월 산마루를 돌며 구석구석 김씨 엉아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더니, 오늘은 무주 산꼭대기엘 오르며 길씨 엉아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고 있어. 둘 다 돼지띠, 이 엉아들 덕에 이 판에 들어와 나는 비틀거리면서도 그나마 중심을 잃지 않고 있다. 아무튼 이렇게 하여 다시 현장에 나갈 준비를 한다. 책상에만 앉아 있어 몸이 뻑뻑해질 즈음, 다시 안전화에 끈을 묶어. 게다가 저처럼 아름다운 곳에 현장이 있으니, 그 또한 얼마나 좋지 아니한가. 물론 현장이라는 데가, 차를 대놓고도 가파른 산길을 삼사십 분은 올라야 하는 곳이니, 물 떠다 대는 일만 해도 만만치 않은 노가다가 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걱정은, 저 멀리 낯선 고장, 그것도 저 높은 꼭대기에 쳐박혀 지낼 생각을 하니, 땀흘릴 일보다 외로울 일에 슬몃 겁이 나기도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