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살문

냉이로그 2013. 4. 27. 10:09




 생전 처음 타본다는, 강릉에서 영월까지 기차를 타고 남순이가 내려왔다. 키가 더 큰 것 같아, 백팔십오가 되었다나. 중간고사를 보느라 힘들었다는, 녀석과 기차역 역 앞에서 밥을 먹고, 집에 들어와 따뜻하게 웃고, 보드랍게 떠들다가, 소주 두 병에 내가 먼저 아웃! 

  요 며칠 다시 억시게 노가다를 뛰면서 여기저기 알이 배겨. 그러나 몸이 고단해도 새벽에 눈이 떠지는 건 이미 몸에 배어버렸어. 녀석이 오면 어디를 같이 갈까, 무슨 구경을 갈까, 하고 고민을 해보기도 했지만, 그러나 굳이 어딜 가고, 뭐를 하고 그러는 것보다 제일은 집에서 뒹굴거리는 거. 늦게까지 실컷 자라, 자고 나서도 뒹굴거려라. 영월읍내는 오늘 단종제가 열리고 있어, 당시 행렬을 재현한 사람들이 행진을 시작하고 있다. 북소리, 소고소리가 둥둥동동. 말을 탄 호위병에 창을 든 무사,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여러 복색의 사람들이 꼬리를 잇고 있어. 남순이는 아직 쿨쿨쿨. 이따 느즈막히 일어나면 점심 때 쯤 게으른 베짱이처럼 설렁설렁 장릉으로 산책이나 나가보자.
 
 지난 주엔 날씨가 얼마나 요동이던지, 하루에만 해도 노란 햇님에, 밀려오는 먹구름에, 다시 햇님, 햇살과 빗방울이 나란히, 그러다간 천둥에 번개, 휘청거릴만큼 불어대는 비바람, 그러다가 또 햇님. 아이고 정신없어라. 그러다가 저녁 퇴근하는 길 하늘에는 이쪽 반은 비구름, 저쪽 반은 햇님이더니 어마어마한 무지개가 반원을 그렸다. 처음에는 그냥, 무지개다! 했는데, 내가 탄 차가 그 무지개에 점점 가까워가는 거라. 점, 점, 점, 점 가까워지더니 그 무지개 아래로 쑥 지나가게 되는 거라. 세상에나! 이 신비로운 느낌이라니, 신나고 짜릿한 기분보다는 오히려 어떤 장엄같은 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게 한 번이 아니라, 어제 영월로 올라오는 길에서도 또다시. 제천을 지나는 즈음에서 우박같은 비가 쏟아지더니 다시 파랗게 개이는 하늘, 그 길에서 한 번 더 커다란 무지개, 이번에도 내가 달려가는 방향에 정면으로 서 있는 거였다. 다시 또 그 무지개 다리 아래를 향해 차를 몰아. 이걸 어쩌지, 그 전까진 상상도 해보지 못하던 걸 두 번이나! 눈 앞에 펼쳐진 저 커다란 무지개, 그리로 달려갈수록 점, 점, 점, 점 가까워져, 그러곤 그 아래를 통과하는 그 짜릿과 장엄의 순간. 나도 모르게 나는 그 때마다 숨을 고르고 골라, 마음으로 읊조리곤 했다, 오래된 나의 기도들.  






 창호에 있는 조각을 보면 개구리에 물고기, 게와 물새, 동자승과 용 같은 것들이 숨은그림찾기처럼 새겨져 있어, 웃음을 자아내게 해.



 여긴 지난 주부터 당분간 일하게 된 조용하고 조그만 절. 아마 이쪽 일을 하는 이들이 아니라면 성혈사 라는 절은 꽤 낯선 이름일지 모른다. 하긴, 이 고장 사람들도 그게 어디에 있는 절이냐며 되묻곤 했으니. 나 역시 이 즈음을 지나면 부석사나 소수서원 같은 곳엔 일부러 찾아다니곤 했지만, 바로 그 가까이에 있는 이 절엔 여태 한 번도 가보질 못해. 그러다 문화재보수 공부를 하면서야 비로소 이 절을 알게 되어, 실측조사보고서에 있는 도면들과 해설을 보며 꽤나 오랜 씨름을 하던 기억이 있다. 

 위에 있는 사진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나한전의 어칸 창호. 창호의 살대가 아름답기로야 정수사도 좋고, 내소사도, 동화사도 좋지만, 여기에 있는 창호는 그것들과는 또 다르다. 딱 봐도 비례감 없이 가 찜빠가 나 있는 모양. 잘 보면 여기에는 창방 아래 상인방도 없이, 기둥 옆에 문선도 없이 문짝이 달려있다. 궁판은 한 뼘 이상은 잘려나간 것처럼 짱뚱하다. 다름이 아니라, 이 문짝들은 다른 건물에 쓰던 것을 옮겨왔기 때문. 창건년대는 신라시대라 하지만, 상량문 기록으로 확인할 때 이 건물은 명종 때 초창한 것. 그러던 것이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그 뒤로 팔십 년이 지난 인조 때 다시 중건했다 하는데, 그렇담 당시 어려운 처지의 중건 과정에서 다른 건물에서 쓰던 창호를 가져와 달았을 가능성이 크다.

 아마 이 창호가 들어갔던 원래의 건물 가구는 기둥 높이가 더 컸으며 주간 거리도 더 길었을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문선과 문인방을 짜고 그 안으로 문짝을 달았을 것이고, 아래쪽 궁판의 춤은 지금 것보다 두 배는 더. 거꾸로, 이 건물의 가구 입장에서 보자면, 기둥에는 상방을 꽂기 위한 장부 홈을 낸 것을 나무 토막으로 막아놓았고, 주선을 달았던 흔적도 있으니 여기에는 이보다 키가 낮고 폭이 좁은 창호를 달고 있었다는 거. 

 집에 돌아와 예전에 한참 씨름하며 공부했던 자료를 찾아보니, 이 건물 하나에만 해도 엄청난 이야기가 담겨 있어. 그땐 달달 외다시피 했을 텐데, 어쩜 이렇게도 하얗게 날아가버리고 말았을까. 그래도 색색가지 펜으로 그림을 그리고 메모를 달아놓은 거를 다시 보니 새로 기억들이 떠올라. 이 건물에는 저 창호에 대한 것 뿐 아니라 기둥부터 창방, 평방에 대공과 들보, 서까래에 박공, 그리고 공포의 짜임, 마루 구성까지 그 하나하나마다 이 건물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들이 있는 거라. 처음 이 건물를 뜯어보며 눈이 커져 신기해하면서 이런 모양새로도 구성을 하는구나, 이렇게 흔적을 찾아가는구나, 다른 건물을 보더라도 이런 곳들을 잘 봐야 하는구나, 싶어 가슴뛰던 기억이 다시 살아나. 

 아마 앞으로 한동안은 이 작고 조그만 절에 올라가 빡신 노가다를 하여야 할 것 같다. 비록 나한전, 저 건물을 직접 만지는 공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틈 나는대로 다시 올라가 도면에 노트하고 그려본 것들, 직접 하나하나 더듬어 확인해보고 싶다. 도리방향 세 칸에 보방향 한 칸, 삼량을 올린 작디작은 저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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