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두막0605] 불땐 방
막 눈을 비벼 일어나려 할 때 먹통 엉아에게 전화. 아무래도 우렁이 상태가 좋질 않아 오후까지 둬서는 안 될 것 같다는 거였다. 그래 속초에 있는 풋사과 엉아네 학교로나가 우렁이를 받아왔다. 그러곤 샘골 논으로 올라가우렁이들을 넣어주었어.얘들이 논바닥을 기어 풀들을 먹는단 말이지, 그래많이 먹어라, 너희도 잘 살고 우리도 잘 살자. 날이 좋았으면 오늘도 엉아와 함께 산길을 오르려 했는데온 마을이축축하다. 오두막에 돌아와 밥을 앉혀 놓고는 불을 피웠어. 날이 궂으면서 엊그제부터 쌀쌀해, 방바닥이 찹다 했는데게을코 귀찮아그대로 버티고만 있었더니 이대로는 안 되겠어. 봄 사이에 집을 지으며 나온 나무 동가리들,따닥따닥살을 벌리며 잘도 탄다. 불길을 한참이나 일으켜 놓으니 처마 바깥에 놓여 낙숫물에 젖은 것들도 뿌지지 작은 거품을 뿜으며 잘 붙는다. 금세 아궁이 앞이 후끈할 정도로 훨훨 타. 불이 반쯤 담긴 솥들은 벌써 설설 끓으며 부엌 안을 부옇게 만든다. 오랜만에 헹주를 빨고 걸레를 빨아 부엌과 방을 훔쳐. 따뜻하니 좋고 깨끗하니 좋다. 손바닥 텃밭에는 벌써 상춧잎들이 쫙 펼친 부채처럼 넓게 커져 있어, 어서 뜯어 먹어야지, 부지런히 먹어도 녀석들을 못 따를 것 같으니 이것도 큰일이지. 비에 젖은 상춧잎들을 뜯어다 된장을 얹어 밥 한 그릇을 뚝딱. 방바닥도 뜨끈하니 아, 좋다. 상추를 먹어 그런 건지, 워낙에 게으른 피가 흘러 그런 것인지 이상하게 잠이 오네.
많이 안아주고 싶어요 / 비누도둑
잠깐 누워 있으려니우체부 아저씨 오도바이 소리가 들렸고, 누런 봉투 하나를 건네며 싸인을 받아 가. 아, 그거. 안이 형이 보낸 원고들이구나. 이게 웬 영문인지 요사이 시를 읽어 글을 쓸 일들이 자꾸만 있어. 먼젓 번 보내기로 했다가 빵꾸를 내고 만 것도 삶창이라는 잡지에 내가 좋아하는 한 편의 시라는 원고였고, 래전이 형 추모문집에 쓸 시평이라는 것도 그랬고, 이것 또한 그렇다. 얼마 뒤면 안이 형 동시집이 나오는가 봐. 거기 책 뒤에 붙이는 어떤 글. 봉투를 열어 보니 동시집 원고 말고도 시집 한 권이 더 있다. 지난겨울 두번째 시집이 나왔구나. 그러게, 첫 시집이 나와 좋아라아껴 읽던 것이 벌써 일고여덟 해 전이었으니……. 비를 핑계로 뜨끈하게 데워 놓은 방바닥을 뒹굴며 형의 시들을 읽었다. 그런데 시를 보다 보면 나는 정말 별로 좋은 독자는 못 되는 것 같아. 좋은 시를 잘 알아볼 줄 모르는 건지, 시집 뒤에 붙은 평론가들의 해설에 골라 말하는 것들보다는 그저 내 비슷한 경험이나 느낌을 주는 것에서나 더 좋아라 하니 말이지. 아, 나도 이런 적 있었는데, 하면서, 맞아, 정말 그런 것 같아, 하면서. 아님, 시인의 모습을 바로 앞에서 보고 있는 것 같은. 이런 시들.
출판기념회
두 번째 시집 내면
봄 가으내 부춧단 묶어 이고 제천장 가시던 어머니처럼
시집 한 보퉁이 싸 들고는 오일장으로 가는 거다
가서,
반 평 남짓 수상한 냄새 뽕뽕 풍기며
냉이처럼 자반고등어처럼 옷가지처럼
긴 하루 발 저리게 앉았는 거다
푸성귀 내음 생선 비린내 사람들 냄새
없는 것들 구석구석 찍어 바르고
기다리는 것도 없으면서 파리 떼나 쫓으며
거, 뭐 하는 거유?
분명 누군가는 한 번쯤 물어봐 올 때
죽도 밥도 찬거리도 되잖는 것,
그걸 뭐라고 해야 하나
다만 한 사내의 허기진 밥상밖에 되지 못한 그걸
환한 장바닥에 펴놓고
또 몇 년,
배부르게 뜯어 먹어보는 거다
어제 양양 장에 나가 쪼로록 앉아 있던 할머니들이 보여. 산딸기며 오디 같은 것도 무릎 춤에 한 줌씩 담아 놓고 앉아 계신 할머니들, 재피 잎 뜯어 온 거라고, 그 가루라고, 열매라고, 매운탕에 넣으면 향이 좋다고, 사가라고 그러시던 할머니, 감자 한 소쿠리에 상추 한 양재기 놓고 앉은 할머니……. 그 사이에 그 같은 모습으로 시집 한 보퉁이 쌓아 놓고 쪼그려 앉는 얼굴 시커먼 시인 아저씨라.웃음이 나, 좋아, 쓸쓸한 마음이 들기도 해, 글쎄, 그냥 자조하는 것만은 아닐 테지, 밥이 되는 시, 밥이 되는 글을 쓴다는 것,벌이로서 밥이 아니라그 자체로 밥이 될만한 것이기만 한다면그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이겠나 싶기도하니까. 그런 걸지 몰라, 어쩌면 마음에 대고 묻고 있는 건지 몰라. 정말 내가 쓰고 있는 시가 할매들 무릎 춤에 놓인 푸성귀들만 하기는 한 것인지,그러한 시를 쓰고 있는 것인지……. 그래, 장에 들고 나가라.이 시집 보니 그래도 되겠는 걸. 언젠가 꿈속에서 나도 동화책 한 보퉁이 들고 그 곁으로 나가지 뭐. 자리 한 뼘만 맡아줘.
그리고 이런 시에서 나는 또 형을 보는 것 같아 웃음이 지네.
문제 없는 시
이놈의 시들 참 순해 빠졌다 뿔이라면, 달팽이 뿔이다
적의라든지 불화라든지 하다못해 위악이라도 한 숟가락
들어 있어야 할 것인데,
내 시에는
미 제국주의가 없고 육자 회담이 없고 국가보안법이 없고 비정규직이 없고 청년 실업이 없고 사회적 자살이 없고 노숙자가 없고 성폭행이 없고 아동 학대가 없고 외모 지상주의가 없고 학벌주의가 없고 가족 이기주의가 없고 들끓는 질투와 원망과 불륜이 없고 하다못해
마누라랑 자식새끼랑 싸운 얘기도 없다
온통 들끓는 것들이 쑥 빠져 있다
올봄에도 내 시는
사람 목숨 지는 것보다 목련 지는 것만 아쉽다 했다
달팽이 뿔 좋다, 순해 빠진 뿔. 글쎄, 어쩌면 자조, 자기 위안일 뿐이다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이 시에서형을 보는 것 같아. 없다 없다 하면서이렇게나 지독하게 불화하고있는 것을, 달팽이 뿔, 그 순한 뿔이야말로우리가 찾아야 할 싸움의 무기라는 걸말해주는 것 같은. 이기는 싸움이아니라싸움마저보듬어 순한 것들만이 남는세상을 그리는, 목련 지는 것에서사람 목숨 지는 것을보는, 그런.
둑
어머니 입원해 계신
육인용 병실이 좁아 새벽이면 로비에 나와
소파 잠을 자곤 하였다
어느 날 새벽이었다
누군가 내 왼쪽 어깨를 떠들어서는
무언가 푹신한 것을 고이고 있었다
떨어지지 말라구
놀라 눈 떠보니
건너편 소파에
먼저 잠들어 계시던 아버지셨다
마흔 다 된 자식이
야전침대 폭은 되는 소파에서 떨어질까 봐,
당신 이불돌돌 말아 둑을 쌓으시던 거였다
으응, 병원 로비의 그 소파들. 봤어, 커다란 병원에 가 있는 동안 밤이면 외래 환자들이 접수를 하느라, 수납을 하느라 줄줄이 기다리고 앉았는 그 소파들. 날이 어둑해지고 외래 환자들 진료가 끝나는 시간이 되자 하나둘 그 소파에 자리를 잡아 가방을 머리에 베고, 홑이불을 덮어 잠자리를 준비하더라.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 체면이고 뭐고 없이 그렇게라도 몸 누일 곳을 찾아 아슬아슬한 잠을 자며 누군가의 곁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 포근했겠다, 이불 돌돌 말아 기대게 해 준 그 둑이.
물건들
겸손해,
한나절 자료 출력하는 낡은 프린터에 대고
아내는 연방 또 그 정 깊은 소리다
삐걱거리는 것만 빼면
처음 왔을 때 그대로
변심을 모른다 더운밥 지어
한 입 떠 넣어주고 싶다
아내 뒤에서
쌀독 플라스틱계량컵 수도꼭지 전기밥솥 나무주걱 밥공기 밥상 숟가락 젓가락 들
주워섬기다
무엇 하나 함부로 부릴 게 없는
한 사내를 깨닫는다
겸손해.
문득 생이 외로워온다
형수가 하는 말이 재미있다. 충주로, 엄정으로 술 받아 놓으라고, 쳐들어 갈 거라고 엄포만 놓고 있던 게 벌써 몇 년이야. 사흘이건 나흘이건 한 번 단단히 마셔보자 해 놓고는 아직 한 번도 못 가. 가끔은 형수하고도 대작을 하는가. 이렇게 말해놓고 또 몇 년 뒤가 되어 아직도 못 가봤구나 할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단단히 마시자고, 아니, 겸손하게.
시인의 경제
시인이라고 꼭 가난하게 살란 법은 없고
살림 팽개치고 시 씁네 써서
반드시 좋은 시가 써지는 법도 아니지만
말하자면 그 반면의
어떤 경제적 상한선 같은 것도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지난 겨울 아내가 반백만 원짜리 가죽잠바를 나 입으라고 사왔을 때 아내의 그 분에 넘치는 사랑에 대고, 이게 시인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해! 호사에 겨운 분노를 뱉은 적이 있다 입든지 갈라서든지 맘대로 해! 아내는 아내대로 쥐뿔도 없는 시인의 쥐뿔을 두 손으로 꺾으려 들었던 것이고, 결혼해서 단 한 번도 변변한 경제를 일군 적 없는 나로서는 다음 날 군말 없이 그 반백만 원짜리 가죽잠바를 걸치고 출근을 하였다
인구 이십만의 중소 도시이기는 하지만 시가(市價) 팔천만 원하는 서른두 평 아파트에, 배기량 이천 시시 자가용을 끌면서, 거기다 시골에 작은 작업실까지 갖추고 산다는 것은 아무래도 영혼의 언어를 만지는 직업과는 거리가 먼 것 아닌가 싶고 또,
몇 해 전까지 연봉 십만 원짜리 시 원고료 생활자로서 누리던 은은한 쥐뿔의 당당함을 등지고 논술이다 책 읽기다로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불안을 뜯어먹으면서 이렇게 가외의 경제를 쌓아 올리다가는, 영영 사태의 핵심을 내 이득을 제외한 자리에서만 말하게 될 것 같아, 적이 두려워졌던 것이다
가난하다고 해서 꼭 반듯하다는 법은 없고
배부르다고 해서 반드시 어긋나는 것은 아니지만
시가 써지지 않을 때는
과분한 경제가 내리누르는 영혼의 가위눌림
한도 초과의 경제를
부른 배 쓸어내리며 꺼어억!
역겹게 시비하여 보는 것이다
이 시를 읽은 느낌 - 아저씨 부자구나, 하고 웃었어. 하하.놀리는 건 아니니 삐치지는 마. 가난하다는 것과 가난하게 산다는 것, 그리고가난을 지킨다는 것이 어떻게 다른가 하고 생각을 하고 있어. 아무튼 먼저 그리 화를 내고 나섰으니 쥐뿔은 잡힐만도 했다 싶네. 풉. 그리고 나선 몇 편을 넘어가다 이런 시를 읽었지.
영세자영업자로 살다
아들놈 유치원 원비 좀 어떻게 해보려고 면사무소에 갔더니 담당이 월수입을 묻겠지요 그래, 가물에 콩 나듯 하는 원고료에 지방 라디오 방송 출연료를 얹으니 어림잡아 월 십오만 원, 연봉 한 백오십만 원 정도 되겠다니까 그이는 나만큼이나 난감한 눈빛을 위아래로 비추더니 직업 분류 칸에 이렇게 써넣는 것이었습니다.
영세자영업
내 직업의 정체를 사회적으로 번역하면 아마 영세자영업, 이 비슷한 것이 되겠구나 싶었는데요, 감면 대상 저소득 확인서 받아 가슴에 품고 면사무소를 나서자니 영세한 내 노동의 밤들이 축축한 땀내를 풍기며 뒤따르는 것이었고요, 어쩌면 꽃씨가 담긴 봉투처럼 달강달강 앞장서는 것도 같았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다시 쓰리게 웃다가 그럼 아파트에 이천씨씨는 또 뭐야, 하면서 형수 등골이 휘겠네 하면서 또 한 번을 웃고나서 쓰려. 지난 주 춘천에 잠깐 들렀다 선옥 언니를 만나 저녁을보내던 때,그 아줌마 막내가 학교에 써내는 종이에 엄마 직업을 '일용직잡부'라 적더라는 말이 떠오르기도 하대.그거야 입 건 그 아줌마가 맨날 돈없다, 돈없다 하면서먼저 그리 말을 했으니막내 아이 그 소리를 기억해 그리 쓴 거였겠지만 말야.그 비슷하게 나도 맨날 하는 소리가, 저는 그냥 백순데요,했더랬지.이게 뭘까, 그냥 징징거림만은 아닐 텐데. 시를 쓰는, 글을 쓰는 노동을 얼마나 긍정할 수있는 건인지, 시집 해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정말 그러한지. 아니, 그건 결국 놓지 말아야 할 질문이기만 한 것인지.
이렇게 내게 더 먼저 다가온 시들을 몇 편골라 읽고 보니공교롭게도 시 쓰는 일이거나 시인으로 살아가는 일에 대한 시들인 것 같네. 이런 거야 시집 한 권 안에 어쩌다 나오는 것들이기만 할 뿐인데 말이지. 아마 그냥 나는 오랜만에 닿은 소식에, 시를 읽으면서도 형이 사는 모습에 더 궁금해 그러지 않았나 싶어. 얼마 뒤 묶어낼 거라는 동시집 원고는 찬찬히 읽을게. 시에는 영 맹이기만 한 내가 그것들을 읽고 뭐라 쓸 수 있을지 못내 불안하겠다 싶기도 하네. 뭐, 어쩌겠어. '시맹이 보는 시'라 제목을 붙여 쓰면 그나마 감안이 되려나. 아, 동시집에 넣기로는 그건 너무 고약한 말이겠구나. 아무튼, 기대는 하지 마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