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이 형
글을 쓰기로 했다. 시평이라니, 시를 모르는 내가 그 일을 맡은 건 단지 래전이 형 일이기 때문이었다. 무어 잘 된 글을 쓰겠다는 생각 같은 건 아예 없이 그저 래전이 형 일이기에, 래전이 형을 기억하고 기리는 새기는 일에 보탬이 될 거라 하기에 앞뒤 가리지 않고 약속을 했던 것이다. 학교에 기념사업회라는 것도 있고, 해마다 형이 간 일은 학과나 단과대학, 총학생회에서도 가장 마음을 써 준비하는 날이 되어 오기는 했지만 어느덧 학교라는 곳도 그러한 준비가 쉽지 않게 되었나 보았다. 형을 기억하는 이들, 이미 졸업은 물론 그날에서 이십 년이나 멀어진 선배들부터 나서 연락 닿는 이들부터 뜻을 모아 올 이십 주기를 준비하고 있다 했고, 형이 남긴 유고 시집을 중심으로 해 책 한 권을 준비한다 했다. 형을 기억하는, 그리고 지금을 살아가는 글들을 모으고, 형의 유고 시집에 있던 시들을 다시 추리고 모아내는. 거기에 시평이라는 것을 맡아 놓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나는 지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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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나는 형에게 숱한 약속을 하곤 했다. 약속이었는지, 다짐이었는지, 아님 무언가 붙잡아 매달리고 싶은 어떤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스무 살이 되어 대학이라는 곳에 가 지하 학생회실 벽에 커다랗게 붙어 있는 영정으로 처음 만난 형과 형의 시. 형을 알고 싶었던 것이 어쩌면 팔십년 대를 알게 했는지 모르고, 형의 그 무언가를 이해하고 싶었던 것이 운동이라는 것을 넘어 인간이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알아가게 했는지 모른다. 해마다 유월이면 형이 남긴 겨울꽃 향기가 무겁고도 괴로웠다. 그러곤 차츰 열사라는 이름의 액자에 가둬진 형이 아니라 작고 작으며 여리디 여린 한 인간, 배짝 마르고 큰 키에 어눌한 말씨, 고집스런 형의 삶을 더 가까이 알아가고 싶었다. 형이 살던 고향 집, 경기도 화성을 다녔고, 그곳에서 다리를 쓰지 못해 앉은뱅이 걸음으로 농사를 짓는 아버지와 형이 가고 난 뒤 한 번도 방 안 불을 끄지 못한 채 주무시는 어머니를 만났다. 형이 나고 자란 방에서 이불을 얻어 잠을 자면서, 아버지와 어머님의 밭에 들어가 할 줄 모르는 농사일을 거들면서 형의 이야기를 얻어들었다. 그리고 형의 둘째 형인 래군 형을 만나 그 시절 형들의 삶에 닿고 싶어했다. 지금은 래전 형의 몫까지 더한 듯 지금껏 현실 싸움의 가장 끄트머리를 걷고 있는 래군 형……. 글쎄 어느 때부턴가 나는 래전 형과 래군 형을 한 사람, 같은 사람으로 착각을 한 듯도 해. 대학생활과 그 뒤 방황의 몇 해까지 해서 십 여 년에 래전 형이 있었다면, 어쩌면 나는 그 뒤로 래전 형을 잊어 래군 형을 보고 있었는지도 몰라. 학교를 그만 두고 나온 어느 해에는, 햇볕이 들지 않는 골방에서 꼭꼭 처박혀 있는 것으로도 내 안의 어떤 것으로부터 다 달아나지를 못해 보따리를 싸들고 서신에 있는 형의 고향집, 부모님만 있는 그곳으로 찾아가 지내기도 했지. 농삿일이라는 거 아무 것도 할 줄 모르지만 그냥 밥만 먹여주고 재워주세요, 여기에서 일하면서 지내고 싶어요……. 그러곤 아버님을 따라 포도밭으로, 깨밭, 콩밭, 고추밭, 고구마 밭에서 할 줄 모르는 일을 해질녘까지 하며 지냈다. 지금은 산골에 들어와 살고 있으면서도 아직 엄두가 나지 않아 관리기나 경운기에 손도 못 대고 있지만 그 때는 로터리치는 기계를 배워 골을 타기도 했어. 좀 더 있으면 경운기, 트랙터도 니가 하면 되겠구나 하면서 아버님 허허 웃으시기도 하셨는데. 그래, 아버님은 단 한 번도 래전 형 말을 꺼내지 않았어. 어쩌다가라도 물으려 하면 고개를 돌려 입을 굳게 다물기만 했지. 어머니는 이 얘기 저 얘기 참 많이도 했는데. 그럴수록 나도 애교를 떨며 어린 시절 형의 일들을 더 물어 듣곤 했어. 마음으로는 어머니께 이런 부질없는 약속을 하기도 했어. 어쩜 형에게 한 약속이었는지도 모르겠네. 막내로 지내겠다고, 어머니의 빈 가슴, 형의 빈 자리에 살아가려 한다고……. 하긴 어머니도 그런 말을 참 자주 하곤 했으니까. 래전이, 아니 어머니 발음으로는 내전이였지. 우리 내전이허구 닮았어, 이렇게 비쩍 말라가지고는 엄마한테 애교도 얼마나 잘 떨고 그랬는지 몰라……. 그 포도밭, 형의 고향집에 찾아간 지도 벌써 여섯 해가 되어가나 보다. 전쟁터에 갔던 어느 해, 그 해 봄에 다녀온 뒤로 한 번도 찾지를 못하고 있었으니.
형의 이십주기를 준비하는 선후배들에게는 미안.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 그래도 어떻게든 써 보겠다고 형의 유고시집을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며 그 시절과 그 시절로부터 이어온 지금까지의 어떤 시간들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적어도 지금 나는 형에게 집중을 할 수가 없는 걸. 억지로 써댔자 아마 그건 정말 글을 만들어내느라 이리저리 내 마음에 없는 말만을 짜집어 그럴싸한 분위기만 풍기는 글만 쓰고 말 거야. 그런 글을 쓸 수는 없잖아. 할 수 없이 이것도 끝내 못할 거라는 문자 한 통만을 보내놓고 말았어. 래전이 형에게 미안하지는 않아, 외려 일을 준비하고 있는 선배들에게 실망을 준 것이 마음에 걸릴 뿐이야. 그래도 그 '시평'이라는 걸 써 보겠다고 형의 유고시집에있는 시들을 읽으면서 몇 편접어놓은 것들은 있었어. 이런 시들.
어머니 말씀
어떡할려고 그러니 이노무 새끼들아
난 어떡하라고 두 형제가 다 유치장에 있어
나와라
나와서 이야기 좀 하자
어떡하란 말이냐 얘들아
노량진 유치장에 면회오신 어머님
나이 오십에
칠십 나이 겉늙은
할머니 주름이 가득한
어머님
(어머니가 참 많이도 얘기하셨어. 그 때 형들이 유치장을 번갈아 들락거리고, 번갈아 강제징집을 당할 때, 둘 다 유치장에 들어 이 창살에서 저 창살로 아들들을 만나러 다녀야 할 때, 그리고 끝내 형의 소식을 들어야 했을 때. 이 시를 보면어머니 주름이 자꾸만 생각난단 말이야. 내전아, 내군아 하시던.)
아버지의 고독
1
죽기 전에 내 땅에서 배불리 먹을 쌀이나 있었으면
밤낮없이 논바닥 밭이랑을 기고
여름이면 참외 토마토
짬나면 똥장군도 져보며
유리알길 미끄러운 겨울날
뻥튀기리어카를 끌었던
아버지
2
"이젠 땅도 있고 집도 있어요
편히 쉬면서 사세요."
"아니야
나는 못배웠어도 느들은 배워야 해
배워야 농사를 짓지 않지. 지겨워."
또다시 삽을 싣고
경운기를 몰았지
자식놈들 둘씩이나 대학 보내고
함박만큼 벌어진 입, 다물지 못하시며
그래도 다칠세라
"절대루 데모하면 안돼
데모는 빨갱이들이나 하는거여."
3
"래군이가 구속됐데
어제 저녁 테레비에도 나온 걸."
창문에서 뛰어
(미완성)
(아버님은 형 얘기를 전혀 않으시지. 마석 모란 공원에도 발길을 아주 않으셔. 아니, 아주 말씀을 하실 때도 내게 아들이 둘 뿐이다라 하곤 하시니까. 어느 날 페트 병으로 받아온 술을 마시면서 아버지가 머슴살며 고생하시던 얘기를 들려주셨어. 그리고 뻥튀기 장사를 하던 때 얘기, 기어이 내 논을 사게 되었다며 흐뭇해 하시던 얼굴. 일 밖에 모르고, 유독 초저녁 잠이 많은데 비해 새벽잠이 없으시다는 아버님은 새벽 세 시부터 손전등을 켜고 논에 들어가곤 했다 하셨지. 해지고 저녁 밥을 들고 나면 바로 잠에 들곤 했어. 일 밖에 모르던, 일 뿐이던 분.)
손씨
잠자리에서 듣는 소리가 있다
삐꺽거리는 발판
한 발이라도 헛디디면
곧 생활이 무너진다
가는 통나무 몇 개, 철사에 의지하고
넘어지면 안된다
내년이면 막내가 중학교 가고
큰 놈이 대학엘 간다
그놈들만은 이 발판을 타면 안되지
넥타이 매고 푹 파쿧힌 회원의자에
빙빙 돌아가는 그런 꿈을 꾸며
오늘도 손씨는 발판을 탄다
발판보다 더 삐꺽거리는 관절의 마찰음을 내며
수 십 년 타온 발판이
자식을 생각하면 높아도 낮게 보인다
(투사니 열사니 하는 말에서 왠지 형의 노래들은 무언가 결의를 일으키고신념을 다그치는가쁜 숨소리가앞서 있을것만 같지만, 아니 나는 이 시에서 형의 얼굴을 다시 보는 것만 같아. 형의 싸움은 가난에 대한 연민이었어, 사랑이었어. 그 사랑을 견디지 못해 싸움판에 나선 거였는지 몰라.)
밤이 새도록 불을 켜두는 이유
밤이 새도록 나는
내 방의 불을 꺼버릴 수 없음니다
그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요
겨울에서 봄으로 가던 날
그는 이 방을 떠났읍니다
주렁주렁 매달린 연륜의 끈을 자르고
열 두 시간 노동에 시달려도
십 만원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노동자가 되어
조그만 전셋방을 떠났읍니다
폐를 갉아먹는 실밥부스러기나
뼈를 삭히는 독향이 좋아서는 아닙니다
조악한 노동조건과
저임금이 좋아서는 더욱 아닙니다
그저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웃고 함께 울고
함께 싸우기 위하여 간다고만 했읍니다
아침이 올 때까지
나는 내 방의 불을 끌 수 없읍니다
그가 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졸리운 눈 부비며 신새벽에
또는 어두운 밤에 비틀거리면서라도
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오기까지 내 방의 불을 꺼버릴 수 없읍니다
창문의 불빛을 보고 날아드는 불나비처럼
불나비를 부르며 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를 읽다가도 나는 다시 어처구니 없게도 어머니를 생각해. 형을 보내고 난 뒤 하루도 방에 불을 끄지 못하고 잠드신다는 어머니, 지금이라도 불쑥 엄마, 하고 부르며 막내가 문 열어 들어올 것만 같다던 어머니. 그래, 나는 사실 형을 잘 알지는 못하는 걸. 어머니를, 아버지를, 그리고 래군 형의 기억과 싸움으로 형을 알아 만나고 있는 게 다였을 테니 말이야.)
패랭이의 노래
밤이 모질어도
꽃을 피워야만 한다
여린 숨결 한 조각
가쁜 신음까지도
아직 동트지 않은 새벽에
꽃으로 피워야만 한다
황토밭 머리 한구석에
미처 눈감지 못한 넋들의
서러운 부활을 위해
꽃이 되어야만 한다
배징개의 정기와
밤이슬만으로 자라나
이 역겨운 새벽에
꽃으로 피어야 한다
때꼴산 뒤에 숨은 햇살
마음껏 끌어올리는
온실의 카네이션보다 고운
꽃을 피워야만 한다
(그리고 형은 언제나 이 패랭이 꽃의 모습이었고,)
冬花
당신들이 제게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아는 까닭에
저는 당신들의 코끝이나 간지르는
가을꽃일 수 없읍니다
제게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아는 까닭에
저는 풍성한 가을에도 뜨거운 여름에도
따사로운 봄에도 필 수 없읍니다
그러나 떠나지 못하는 건
그래도 꽃을 피워야 하는 건
내 발의 사슬 때문이지요
겨울꽃이 되어버린 지금
피기도 전에 시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한 향기를 위해
내 이름은 冬花라 합니다
세찬 눈보라만이 몰아치는
당신들의 나라에서
그래도 몸을 비틀며 피어나는 꽃입니다
(겨울꽃이었어. 몸을 비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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