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퍼졌다
우와, 이렇게 퍼져 버리다니. 안 먹던 술을 먹어 그런가봐. 하긴 꽤나 오래도록 안 먹고 있었으니까. 비몽사몽으로 겨우 눈을 떠 오이 갈아다준 거 한 대접을 먹은 거 같기는 한데 속이 뒤집어질라 해 더는 아무 것도 못 먹겠어서 이불 속에서 꾸부정 엎드렸다 누웠다 몸을 뒤집어 대는 호떡 놀이만. 다른 때 같으면 어떻게 속이라도 가라앉으려 해장할 국물이라도 찾았을 텐데 그마저도 못하겠는 거. 땀은 왜 이렇게 나는 거야. 잠에 들었는지, 잠이라도 자야 편하겠다 싶어 억지로 자는 척을 했는지 암튼 다시 엎어져 있다가는꿀물 한 사발에 다시 끙끙끙. 이런 때는 무조건 속을 비워야지, 아무 것도 먹지를 못하겠는 거야.
그러다가 아무 거나 손에 잡히는 동화책을 읽었다. 잘만큼 잤으니 더는 잠도 오지를 않는 게 그렇다고 몸은 일으켜지지가 않고 멀뚱히 눈을 떠 천정에 있는 벽지만 보고 있으려니 심심키도 했겠지. 글자 많은 책은 말고, 두꺼운 책도 말고, 다행히 그림이 많이 들어간 동화책들이 머리맡에 몇 권 있네. 더러 서울로 책을 보내주는 출판사들이 있어 그 사이에도 책들이 많이 쌓여 있었으니.
잘한다 오광명
그렇게 불량한 자세로 넘겨가며 읽기를 시작한 것이 우와, 좋아라. 끝내준다. 먼저 읽은 것은 백오십 살 먹은 콧수염 아저씨가 쓴 <<잘한다 오광명>>이었는데, 이건 전에 본 썩은떡보다 더 좋잖아. 이거 콧수염 아저씨가 알면 안 되는데, 아무튼 그 선생님이 쓴 동화를 읽고 이렇게 좋아라 하기는 처음이야. 교실 안에서 아이들 얘기, 맨날 시시껄렁 밋밋한 얘기들이기만 했는데 여기에는 완전 오광명부터 똥반장, 앞니 빠진 OO이와 썩은 떡,털보 선생님까지 캐릭터가 아주 반짝반짝하잖아. 억지로 재미있으라고 꾸며대는 것 같지도 않고,어떤 교훈 같은 걸 담겠다고 이야기를 구부러뜨리지도 않고, 그냥 요 녀석들이 노는 얘기만을 아주 담백하게들려주네.정말아이같아, 정말 요놈들 티격대는 모습이 꼭그런 것만 같아.문장도 예전에 보아오던 콧수염 아저씨 글이랑은 아주 다른 것만 같은 걸. 꼭써야할 말만으로도아주 또렷하게. 중간중간한 번씩 나오는 묘사도 꼭 그럴듯한 말들이야. 맞아,아이 녀석들 갑자기 모여들어 찧고 떠들 때는 벌들이 앙앙거리는 것만 같잖아. 콧수염 아저씨는 이제 어느 선을 넘어서게 되신 걸까. 아이들과교실에서 보내며 글을 써온 수십 년의 세월이 이토록가볍게아이들 마음과 생래를 들여다보게 된 걸까. 하하하,정말 재미있어. 정말거기에는 아이 놈들이 있단 말이지.
오늘은 기쁜 날
그러곤 한 권 더 손에 잡은 것이 어저께 낮은산에 갔다가 따끈따끈 새로나온 거라며 받아 들고 온 책.영모아줌마가 쓴 <<오늘은 기쁜 날>>.솔직히 말하면 제목이 이게 뭐야, 하기도 했어.말갛게 아름다운 그림에 이끌려 책장을 한 장 한장 넘기는데, 어, 이거장면마다 내 몸이 담가지는 것 같아. 오늘은좋은 날, 오늘은 기쁜 날, 오늘은행복한 날 같은 말들이마치되풀이하는 싯구처럼 첫 문장에 놓여 있는데그장면 장면이 하나도 허투루 되어 있는 것이 없어.한두 번쯤은 어, 이거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들지 않은 것도 아니야. 슬프면 슬프다고, 아프면 아프다고말하게 해주어야 하는건 아닌지, 무조건 자꾸만 좋은 날이라고, 기쁜 날이라고, 행복한 날이라고우겨대라 하는 건 아닌지. 자칫 현실에 대한 그 어떤 순응 같은 것을 가르치는 건 아닌지,슬퍼하는 속에서 얻게되는 평온이랄지, 아프다 말하는 것으로 그리게 되는 어떤 희망이랄지그러한 것들은지워낸 채무조건 긍정만을 가르치는 건 아닌지…….잠깐 그런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다시 책장을 넘겨 읽어가다 보면 나는 또다시 새로운 장면에 빠져들어아이의 슬픔이 자욱하게 내 몸을 감겨드는 것 같았다. 아, 이런 거였어. 어떤 역설 같은 것. 이야, 이 쉽고 깨끗한 말들로, 아이의 모습을 잔잔히 그려주면서, 이 아픈 아이의 슬픔을 읽는 이로 하여금 감겨들 수 있게 하다니.넘어가는 장면마다 아이는 끊임없이 오늘은 기쁜 날이라며, 좋은 날이라며 그러니 울어서는안 된다며 끝끝내울음을 참아 살아내고 있지만, 어디에도 징징거리는 말투는 하나 찾을 수 없지만, 작가는 아이의 슬픔을 오롯이 그려내어 주고 있었다. 너무나도 말갛게, 아이 마음 속에 있는 '착하기만' 한 목소리로.그래, 이것을 쓴 영모 아줌마의 책들도 빼놓지 않고 다 읽었을 테지만 나는 이만큼이나 좋은 적은 없었어.
그림들
우연스럽게도 두 책의 그림은 다 한 작가가 그렸다. 윤정주 언니 그림이 훌륭한 거야 그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 책들에서는 완전 쩔게 되는 걸. 어쩜 이 언니 그림들이 아니었으면 오광명도 기쁜날도 이만큼이나 좋지는 않았는지도 몰라. 윤정주 언니 그림들이야 처음 볼 때부터 그 얼마나 재미있고, 웃기고, 신나고, 까불어대고, 들썩들썩했었나. 오광명 이 녀석의 심퉁불퉁한 얼굴, 썩은 떡의 새침한 얼굴, 그러면서도 고 녀석들이 나름 수줍어하고, 뭔가 비밀스런 감정을 가질 때면 그 웃겨버리는 캐릭터 안에 그것을 담아. 오광명에서는 이 화가의 그러한 그림의 맛이 아주 꼭지점에 서 있는 것 같다면 기쁜날에서는 아주 새로워. 그림작가 이름을 보지 못했더라면 이 언니의 그림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만큼. 까불까불한 장난기는 아주 쏙 빼 버린, 착하게 착하게만 그린 그림들. 책장을 넘기면서 장면마다 내가 아이의 슬픔에 빠져들 수 있었던 건, 어쩜 반 이상은 그 그림들 때문이었어. 그림에 대해 잘 몰라 그 느낌을 어떻게 말해야 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림이 없는 자리에서 더 큰 외로움의 목소리를 듣게 하는 그런 그림들.
기대어 잠든 아이처럼 / 산울림
므흣한 생각
아, 술 먹고 뻗어, 이불 속에서 뒹굴면서, 그냥 만만한 책이나 술렁술렁 보자 하고 집어든 두 권의 동화책이었는데, 나는 정말 운이 좋았다. 아주 끝내주는 책들이야. 조카 녀석 아까 전에 학교에서 돌아오더니 삼촌, 오늘 저녁 먹고나서 자전거 타러 가자아아아! 하고 졸라대고는 태권도 한다고 나갔는데, 잘 됐다. 오늘은 아무래도 녀석 자전거 꽁무니 쫓아 뛰어다닐 컨디션이 되지를 못하는데, 이 동화책들을 읽어줘야지. 마침 오광명 이 녀석이 진우랑 같은 학년이네. 아마 기쁜날에 나오는 아이도 진우 나이 쯤 되었을 거야. 이 동화책들 덕에 오늘은 좋은 삼촌 노릇 한 번 할 수 있겠는 걸. 하하, 생각만 해도 므흣이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