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이로그 2008. 6. 26. 10:03

1. 임길택의 '소'

그래, 임길택 선생님이 쓴 <소>라는 시가 있었어. 오늘 아침 요사이 이계삼 선생이 쓴 글들을 찾아 읽다가 요번 우리교육에 썼다는 편지글 끄트머리에 인용해 놓은 걸 보고 다시 보게 되었다. 아프게 병들어 갈 수밖에 없는 소, 미친 인간들 짓으로 병이 들어 '미친' 소라는 이름까지 얻어야 하는 아프고 슬픈 소들. 어쩌면 이 아프고 슬픈 소들은 우리와 너무도 닮았다. 이 시를 패러디해 쓴 어느 여고생의 시는 너무도 정확하게 그걸 말해주기도 한다. 어디 '미친 교육'에 희생되는 아이들만 그러할까, '미친 경쟁'과 '미친 소비'와 '미친 개발'의 굴레를 스스로 무한재생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모습 또한 그러한 걸.


풀을 눈 앞에 두고도
이제는 먹지 못하는 소

우리에 갇혀
살만 쪄야 하므로
순해지는 약이 든
사료만 먹고
마른 볏짚만 먹고

뿔이 있어도
무얼 받아 볼 생각 못 하고
먹는 대로 살이 쪄선
어디로 가는 줄 생각도 못 하고

우리 너머 온통 푸른 풀 있어도
먹을 생각 못 해 보고
(1997년 6월 6일) 산골아이》(보리, 2002)

2. 김환영의 '소'

환영이 아저씨가 사는 가평 금대리, 이웃집 보희네 소는 별빛 아래에서 새끼를 낳았다 한다. 아저씨는 광장에는 나가지 않고 소만 본다고 했지. (물론 아저씨도 양초를 주머니에 넣고 기차에 올라몇 번이나 광장을 다녀가곤 했어.) 나 또한 자꾸만 소들이 눈에 밟혀. 석교리 마리아네 집으로 걸어내려가다 보면 길모퉁이에 소를 먹이는 집이 있다.덧댄 나무 외양간 너머로 소와 눈이 마주칠 때면 말할 수 없는 까닭에 마음이 뭉클해져. 너도 언젠가는네다리로 곧게 서지 못하고 픽픽쓰러지게 되려는지.그래도 고기를 뜯어 먹겠다고 불도져 같은 것으로 떠밀리고 뒹굴려 도살장으로 내던져지게 되겠는지. 아무 잘못 없는 너희들은 네 동족의 몸을 갈아 만든 사료를 먹기도 해야 하고, 그저 살이나 불려 고기만 만드는 일로 한 평생을 보내고만 있는 것인지. 어젯밤 이불을 뒤집어 쓰고 읽던 한 평생 소를 먹이며 소몰이꾼, 소싸움꾼으로 살아오던 이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봉섭이 가라사대)를 읽다 보니 거기에 '생구'라는 말이 나오는 걸 봤어. 예로부터소는 식구(食口) 다음간다 해서 생구(生口)라 한다던가. 아닌게 아니라 얼마 전 먹통 엉아와 함께 양양에서 속초, 고성 쪽으로오래된 한옥을 찾아다니면서도 집집마다 부엌 안으로 외양간을 들인 것을 보며 정말 한 식구처럼 살았구나 하는 걸 새삼 알게도 되었더랬으니.













3. 권정생의 '소'

할아버지만큼 소를 사랑해 글을 쓴 이가 또 있을까. 착하디 착하고 슬프디 슬픈 소의 한 생을 긴 이야기시처럼 들려주는 단편동화 ''가 그렇고, 넉넉하고 따사로운 품의 세상을 아름답게 들려주는 그림책 '황소 아저씨'가 그렇고, 할아버지를 닮은 '소' 연작시들이 또한 그러하다. 보릿짚을 깔고 보릿짚을덮고 보리처럼잠을 자.보릿짚 속에서 잠이 깨면눈물이 흐르는 거지. 무거운 짐수레에 네 다리가 무너져 내릴 것 같지만 그래도 우리 모두 힘껏 살자 말하며 가슴 속에 하늘을 담고 다닌다. 코뚜레에 꿰어 끌려다니면서도 소는 자유를 잃지 않으려 남을 절대 부리지는 않는다. 어디선가 소의 울음소리, 그 동무와 동생들의 울음소리가 자꾸만 들리는 것 같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한 해가 되던 지난 오월에 추모행사를 하면서 서예를 하는 남천 선생이라는 분이 글씨를 써준 것이 있다. 그 날 그 곳을 찾은 어린이들에게 할아버지의 글 가운데에서 마음에 드는 대목을 골라오면 그것을 붓글씨로 써 주는 것. 그에 나도그 글씨 하나 받고 싶어 오랫동안 줄을 섰어. 소 연작시 가운데 네 번째 것의 마지막 연, 마지막 세 행의 시구를 골라 놓고선. 오두막 방 안에 붙여 놓은 거라고는 저 글씨를 쓴 화선지 하나 뿐인데 그걸 보고 있노라면 자꾸만 슬픈 소의 눈망울이 떠오른다. 그래도 소를 닮고 싶어. 우리, 힘껏 살자

소는 온몸으로 이야기하면서 간다

슬픈 이야기 한 발짝 두 발짝

천천히 천천히 들려준다.

'냉이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화책 두 권  (0) 2008.07.03
기다리던 책  (0) 2008.07.02
촛불과 시스템  (7) 2008.06.25
북녘의 굶주림  (5) 2008.06.25
오두막에 돌아와  (6) 2008.06.24
Posted by 냉이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