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신

냉이로그 2012. 3. 13. 11:02


 


 


아직

 청첩장은 아직이니, 엄마한테는 진작에 필요하다는 걸 생각지 못했다.초하룻 기도 때나 한 번씩 나오는 분들이거나 무슨무슨 재일에나 얼굴 보게 되는 친구분들께는 그런 날에나 만나 청첩장을 건네어 혼사 얘기를 할 수 있겠다는데, 그냥 말로하는 거하고는 다르다는데. 그건 엄마 뿐 아니라 다들 그러실 텐데. 이번에 못 건네면 그 다음 혼사일 닷새 전에나 만나게 되는 분들도 있겠다는데. 미안, 엄마. 요번에는 그냥 말로 전하고, 주소 좀 전해달라 해. 그러나 그 분들 모두 글로 무얼 주고받는 일은 서툴어 그게 익숙하질 않다는 걸.



혼사

 처음에 날을 잡아 준비하기로는 식이니 잔치니 그런 것 없이 그저 양쪽 식구들 만나 인사 정도하는 것으로 하고자 했다. 아무래도 불편함이 없을 수 없는 집안 사정이 그렇기도 했고, 또 게다가 나 또한 이 늦은 나이에 혼례에 대한 환상같은 거 가질 나이도 이미 아니,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식을 올린답시고 알리고, 인사를 챙기고, 그에 따르는 적지 않은 풍습들을 최소한으로나마 갖추자니 아무래도 여간 민망할 일이 될 것만 같았다. 다행히 달래도 드레스에 대한 아쉬움 같은 것 없다 하고, 인사 정도로 할 수 있으면 더 좋겠다 하니 마음이 맞아 양쪽 어른들께도 그렇게 허락을 구했다.



 그런데, 형이 그런 말을 해. 엄마가 앞으로 살면서 축하받으실 일이 또 뭐가 있겠니. 이제 너 장가 들이는 자리 그것 하나 뿐이다. 함께 절에 다니시는 분들, 이웃 아주머니들. 그런 분들부르고, 그 안에서 아들 남은 것 하나 출가시킬 때까지 키우느라 애썼다, 고생했다, 덕담도 듣고, 축하도 받고, 흐뭇함을 느낄 수 있는 그것 하나 남은 것인데, 너는 엄마를 생각한다 하면서 그런 기회마저 드리질 않으려 하느냐. 내가 결혼할 때는 비록 엄마, 아부지 한 자리에 모시고 식을 올리지 못해, 그게 두고두고 한이 되는데, 너라도 꼭 그렇게 하면 좋겠다, 네가 당사자라 말하기 곤란커나 하다면 그것만큼은 내가 그리할 수 있도록 하겠다….



핑계

 그러게, 정말. 형 말이 맞구나. 그래서 형은 형이구나. 나는 가족을 핑계로, 오히려 엄마를 비롯하여 식구들을 위한답시고, 마치 내가 무슨 희생이라도 하는 양, 가족들을 위해 식을 올리지않으려는 것처럼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실은 그게 아닌 거였다. 그저 내 속이 시끄러워질 것이 성가셔 그걸 피하고자 했을 뿐. 겉으로 내세우는 말로야, 어머니 아버지가 따로 계시고, 그리고 또 새어머니. 혼주의 자리에 어머니 아버지가 함께 서신다는 건 단순히 잠깐 치르는 식장에서만 그러고 마는 것이 아니다. 양가의 상견례니, 함에 들어가는 사주단자니 예단 형식이니, 청첩에 들어가는 이름자리에, 하객을 맞이하는 일까지.그러니 어머니 아버지를 모시고 준비하는 일에도 속편하지 않을 일은 적지 않을 수밖에. 그렇다고 엄마없이 식을 올리거나 하고 싶지는 않아. 어느 쪽이되건 마찬가지로 어머니든, 새어머니든 이제는 모두 내 어머니들인데 한 분은 그 잔칫날이 가장 외로운 날이되어야 할 일. 안그래도 속 시끄러워지는 일 많은 게 결혼식 준비라는데, 그러다보면 서로 상처를 주는 어떤 말들이 나오게 되지는 않을까, 누군가는 또 속울음을 삼켜야되지 않을까. 아무래도 이 혼사 자리가 가족들이 흐뭇해하고 행복해하는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잘 덮고 지나는 어떤 상처들을 들추고 덧내게 되는 일이라면…하는 것을 걱정, 내세우면서 예식없이 치루었으면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러나 형 얘기를 듣고나니, 그게 아니었구나.나는 겉으로 식구들을 생각해 스스로 무언가를 포기하듯 말하면서, 엄마를 위해 나는 괜찮다 말하면서, 실은 내가 감당해야 할 어떤 것을 그저 피하고만 싶어 그랬던 거구나.엄마를 위한다면서, 거꾸로 엄마의 어떤 자리를 마련조차 하지 않으려 했구나. 아마 이 뿐만이 아니라 많은 경우 나는 그러했을 것이다. 엄마를 위한다면서, 무언가를 위한다면서, 또는 어떤 대의를 위한다면서, 그 때문에 내가 무언가를 양보하거나 내주는 척을 하면서, 실은 나 좋자고 그랬던 많은 것들. 나 자신조차 정말 그래서였던 거라고 착각하고 믿었던 그런 것들. 그러나 더 깊이 들여다보면 실은 내가 하기 싫어 그랬을 뿐이면서, 나 편하자고, 나 좋자고 그러고자 한 거였으면서.



준비

 그리하여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역시 최소한으로 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러나 또한 어른들 서운하지는 않게 하려니 소소한 일들이 적지 않았다. 상견레 인사를 가졌고, 사주단자를 갖춰 함을 준비했고, 유기그릇에 찹쌀과 팥알을 담아 예단을 준비했다. 가락지가 손가락에서 따로 놀았고, 넥타이도 맬 줄을 모르는데 양복이란 것을 맞췄다. 한복 바느질 집엘 가서 몸 길이를 쟀고,한옥마을에 가 식올리는 마당을 빌렸다. 많은 걸 생략한다 하고는 있지만, 그러자니 생략하는 것도 또 그게 일이 되고 말아. 둘만의 일이 아니고 보니 이쪽저쪽으로 허락을 구하고, 마음 서운치 않도록 풀어드리는 게 더 어려운 일이기도 하였으니.



난지

 한동안은 난지도가 나보다 더 바빠 보여, 한옥마을은 문화재로 보호되고 있어 그 안에서는 식사가 안 된다 하여 밥집을 알아보고 다녔고, 멀리서들 올 텐데 차 세울 곳도 없어 주차장을 빌렸다. 그리고뒤풀이를 할만한 너른 맥줏집까지. 식장과 식당, 주차장과 뒤풀이 장소까지 하나같이 제각각이니, 촌에서 오는 분들 불편하겠다며 그에 대한 세심한 준비는 나보다 녀석의 머릿속에서 더 꼼꼼히 움직였다. 후배들 누구에게 부탁하여 안내를 돕게 해야겠다며, 식당에선 밥그릇에 술병 숫자를 누구에게 부탁해야겠다며, 뒤풀이 맥줏집 준비를 어떻게 해야겠다며 내가 생각지 못한 것들로 더 바빠.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난지도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신랑이 가마타고 들어갈 때 그 앞에서 목각새를 들고 들어서는 기럭아범 .어째든 녀석과는 찐하게 어떤 의식을 치루고 있는 중이다. 형, 나 그날 울지 몰라. 하하, 글쎄, 급기야 이 녀석이 내 팔뚝을 나꿔채 식장 밖으로 달려나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라도 할까.아무튼 난지도는 그 말고도 식장에서 하객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뭔가 볼 거리를 준비하겠다느니, 두 사람은 웨딩사진도 안 찍었으니 어렸을 때 사진들부터 쭉 보내줘라, 프로젝트를 설치해 영상으로 성장기를만들어 틀겠다거나, 하객들이 둘레둘레 앉아서 읽어볼 수 있게 조그만 신문 형식의 소식지를 만들겠다거나, 일찍이 그 기획안까지 만들어 보내왔고, 몇몇에게는 이미 청탁을 시작했다고도했건만, 미안하게도 그만 다 말리고 말았다. 당사자들이야 민망할 수밖에. 혼례식장에 서는 것만 해도 민망 가득인데, 남들 다 하는 결혼식 유난떠는 것 같고 그래서 견딜 수가 없겠다며. 그러나 그 지극한 마음이야 얼마나 고마운가.



불쑥

 소소한 일들이거나 나름 건너야 할 절차들로 벌써 두어 달 전부터 바빴으나, 마음에 고맙게 자리한 이들을 찾아 연락을 넣거나 하는 일들은 아직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일상으로 만나는 자리, 연락이 오가고 있는 자리에서나 띄엄띄엄. 두 해만에 찾은 글과그림 언니엉아들이 환하게 축하해주어 기뻤다. 목수 친구들은 기꺼이 가마를 들어주겠다고 나서주었다. 날을 받자마자 권사님과 찌질이 형제들과 한 밤을 보냈고, 정기공연이 겹치면 어쩌나 걱정이던 기차길은 다행인지 뭔지 그 다다음주로 공연이 미뤄졌다. 아이들이 노래를 불러주겠다고 해, 그러니 이 주례없는 전통혼례에 아이들 노랫가락이 그대로 주례사가 되겠구나. 그 어떤 주례사보다 맑고 깨끗한, 그래서 더욱 무겁게 마음에 새겨질. 하루 전 날 미리 올라올 거라는 울진 바닷가친구들 숙소를 잡아놓았고,석고개 큰 소 갑식이 엉아는 소 목청으로 축하해유우우를 길게 뺐다. 이제는 일부러 먼저 전화를 넣고 연락을 하기는 해야 할 텐데, 그러나 막상 떠올리자니 내내 고민스럽고 머뭇거려지기만 한다. 마음에 소중하게 떠올려지는 이들은 달리 말해 마음으로 깊은 빚을 지고 있는 고마운 얼굴. 고마움과 소중함에는 언제나 그 같은 무게로 어떤 미안함이 같이 있기에, 벌써 몇 해가 지나고, 또 몇 해가 지난 그이들에게 청첩의 일로 연락을 하기에는 용기가 나질 않아. 뻔뻔하게도 불쑥, 아무래도 이건 못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살림

 늦은 나이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혼사는 혼사고, 살림이라는 말 앞에도 '신혼' 자가 붙는다. 살림 준비랄게 뭐 있나, 그저 각자 자취해 살면서 쓰던 숟가락, 밥그릇 한 데 모으고, 너무 낡거나 넘치는 건 내놓고 모자라는 것 몇 가지 마련하면 되겠지, 싶었는데 내 살림을 돌아보니 제대로인 게 하나 없다. 다들 누가 이사나갈 때 버리고 간 것들 주워들이거나 십 년, 이십 년 짊어지고 다니던 것들. 너무 안 되겠는 거라도 어떻게 해보자며 한 동안은 목공방엘 나가 이것저것 뚝딱거렸다. 부엌에 한 켠에 놓을 밥솥이며 전자렌지 등을 올릴 받침대를 만들고, 벽에 거는 수납 서랍. 욕실에 걸 수건장이며 거울, 수납함 따위. 하나하나 만들 때는 나름 마음에 들고 예쁜 작품들이 나오는 것 같았지만, 집에 들이고 보니 고거 몇 개 새로 만들어 들였다고 이 엉성한 집안 꼴이 그리 달라지지도 않아 .다행히 달래도 뭣 좀 있어보이고 좋아보이는 거 같은 데에야 별 마음 없지만, 아무래도 새 신부는 새 신부라. 한 며칠은 왜 그런지 속상해 말도 않더니만, 하루는 이불에 얼굴을 묻고는 못할 말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는 거라. 나도 예쁘게 하고살아보고 싶다구 ㅠㅠ 하더니 울던 눈으로 웃는 거라. 저도 그 말을 해놓고는 우스웠는지. 그래서 며칠 뒤에 나가 하나 사들여온 것이 내 살림에는 없던 화장대랑 옷서랍 하나. 그 말 한 마디 해 본 걸로도 마음이 다 풀어졌는지, 아님, 그때 잠깐 그러고 만 거였는지, 다시 밝아졌으니 다행. 한 며칠은 저 장롱도 바꾸었으면하는 것 같아, 그럼 바꾸자 했더니, 자기가 먼저 그냥 두자 한다. 자꾸 보니까 괜찮다나.그 장롱이 뭐냐면, 내가 이 집에 이사들어올 때 주인집에서 재활용스티커 붙여서 내놓았던 거. 그걸 사다리차 불러다 다시 들어올린거 ㅋ.(이러믄 또 오해하고 오바하는 사람 있다. 오바사절!)



청첩

 피네 아저씨가보내준 예쁜 그림들을 받아 어제야 대충 그 안에 들어갈 문안들을 준비했다. 청첩장이라는 것도 역시 어른들 자리가 큰 지라 그런 형식, 그런 글귀 마음에 안 들더라도 어른들이 보기에 익숙하게 하느라, 그러면서도 내 마음에는 아닌, 어떤 말들을 티나지 않게 지우고 바꾸고 그러느라, 그래봐야 별 것도 아닌 것으로 잠깐을 씨름. 그리고는 보통 여백으로 두는 뒷면에 들어가게끔 내가 쓰고 싶은대로 써서 끼워넣은 한 마디가 고거.


          저러다
장가나 갈 수 있으려나 싶었는데, 
          언놈을 만나려고 여태 시집도 가질 않나 했는데, 
          짚신도 짝이 있다더니. 
         
          못
난 것들이지만
         
더 못난 것들을 떠받들며
         
모나지 않게 살아가겠습니다.
       
                                          -
혼례식을 앞둔 이른 봄,
                                                   
냉이와 달래 올림



여기

 언젠가 방명록의 댓글로 혼례를 준비하는 중이라는 얘기를 살짝 쓰기는 했지만, 그 말고는 공개적으로 소식을 알리는 건 이게 처음인가 보다. 이제 곧 청첩장이 나오기는 할 텐데, 아마 나는 '뻔뻔하게, 불쑥' 그거는 잘 못할 테고, 그러고보면 먼저 연락오는 이들이 아니면 보낼만한 데가 별로 많지가 않아. 부모님 허전하지 않게 이거 하객 알바라도 써야 할까, 농을 하기도 하면서. 그런데 생각해보면 여기 냉이로그에 다녀가는 분들이 어쩌면 지금의 나하고는 제일 가까운 이들이 아닌가 싶다. 한 석 달 가까이 아무 것도 쓰질 않아 들러가는 이도 얼마 없는데, 그런 와중에도 다녀가는 그 누구인지 모를 어떤 사람들.이 블로그를 한 대여섯 해 끄적여왔으니 그런 분들이라면 아마 내가 속으로 하는 얘기들 가장 많이 들어주고, 보아온 사람이라 해도 아주 틀리지는 않을 것 같은. 내가 무어 직장이 있어 동료가 있나, 그런 곳에서 다달이라도 회비를 내는 친목계가 있나, 그렇다고 초부터 대까지어느 동창모임이라도 찾아다니기를 하나. 혼례식은 4월 15일 일요일 한 시, 서울 충무로 지하철역에 있는 남산골 한옥마을이니, 여기에서 속깊은 얘기들 오랫동안 봐주신 분들이라도 그날 와서 놀아주십사 하는 얘기.아, 지금 요 단락은 무지하게 용기를 내서 쓴 거임.


   불 / 루시드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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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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