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원

냉이로그 2012. 4. 7. 04:49

할아버지 편지들을 꺼내어 읽다가, 거기에 장가갈 때 축의금 얘기 써놓은 거를 다시 들춰보았다. 할아버지도 그랬고, 이모도 그랬고, 또 누구도, 누구도. 볼 때마다 장가부터 들어라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만, 이 할아버지는 그 중에서도 강력했다. 장가들지 않으면 다음부턴 찾아오지도 말어, 내다보지두 않을 테니.그러나 나는 또맨몸으로 다시 찾았고,돌아설 땐 장가 다짐을 받곤 했다.피자도 못먹어, 돈까스도 못먹어, 그 중에서도 장가 한 번 못간 거를 억울하다울부짖고 그러더니, 하여간에 어여 장가부터 가라 소리로 그렇게나 구박을 주곤 했다.

달래랑함께 찾았던 게 언제였더라.그 때 목수학교에서 주말이면 조탑으로 내려가곤 하던봄날,장에 팔던 딸기 한 봉지를 사들고 찾아뵈었더니,이쁜 각시 얻었다고 자랑하러왔냐며웃어보이셨더랬다. 그렇게 조탑 앞 마당에서 볕을 받으며얘기를 하고 놀다가, 또 뭔가 내가 띨띨한 소리를 했겠지. 그랬더니 혀를 허, 하고 차면서너는 아이큐가나빠, 하더니 달래를 돌아다보며이 애는 아이큐가 너무 나빠걱정이니 다시 생각해보라그러는 거라.그러면서예의 그 능청스런얼굴을 지으시며 고개를 절레절레.그러구는 시간이얼마 되었을까,이젠 좀 들어가 누워야겠으니,둘이는 저 언덕 께에 소풍하기 좋은 데가 있으니이거 들구 가서 먹으라 하시던.

그러구나서두 주가 지나서였을까,눈을 감으셨다. 그러니 달래에게는이 애는 아이큐가 나쁘니 다시 생각해보라, 하시던 게유언인 셈. 나보구는 그렇게나어여 장가들어 아이부터 낳으라구박이더니.

암만 그래도 그렇지,책도 그리 많이 팔리는데 이백원이 모냐, 이백원이.그 돈 갖고는 라면 한 봉도 못사먹는데, 쫀쫀하게 말이지. 적어도 천이백원은 되어야뭐라도사먹지. 어쨌거나십 년 넘게 그렇게 구박을 받아오다가, 이제야 용기를 내어 장가를 가려하는데 그 이백원조차 이제는 받을 길이 없다.어허, 할아버지, 나한테 이백원빚진 거야. 이거는딴 걸루 퉁치자 해도 안 해줄 거다. 이백원 왜 안 주냐고,언제 줄 거냐고,이제부턴 내가붙잡고 구박할 거야.

어때요, 좋으나요. 나 장가든다고. 좀 늦기는 했지만 시키는대로 하잖어. 피네 아저씨 그림으로 저렇게 예쁜 청첩장도 만들었는데 자랑을 하러 가지도 못해. 혼례식이라는 것도 번잡할 거 하나 없이, 조탑 마당에 둘러 앉아 도시락이나 까먹으며, 서로 구박주는 얘기들이나 하면서, 그러구 싶었는데 그 모든 게 아련한 꿈 같기만 하지만, 그래도 그려보니 행복하고 좋으다. 볕이 환하게 들고 있는 것 같아. 아마 할아버지도 그 우에서 잘했다, 하고 봐주겠지. 정생이도, 시백이도 다 그렇게 흐뭇해하며 좋아해주겠지. 이건 그냥 다 내맘대로 생각하는거지만, 그러면 뭐 어때. 그저 좋아해주려니 하는 거지.아마 나는 장가를 들어서도 여러 사람 애먹이고 그럴 거 같기는 하지만,어쨌든잘 살아보려 할게요. 이백원 빚진 거나 까먹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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