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잇골 가는 길
0. 눈물
꼬박 닷새하고 반나절이 걸렸다. 생각하면 아주 먼 시간의 일들인 것만 같다. 어느 구간은 한 걸음도 더 뗄 수 없을만큼 끔찍했고, 어느 길에서는 내가 이 길을 왜 걸으려 했는지 아주 없던 일로 돌리고도 싶었다. 그러나 그러했던 순간들마저도 꾸역꾸역 걸음을 디밀어 끝내 사잇골에 닿았다. 서울 회기동 집에서 출발, 상봉동과 망우리고개를 넘어 서울을 빠져나왔고, 양평, 홍천, 인제를 지나 한계령을 넘어 양양까지 걸어온 것이다. 서울에서 사잇골까지 그 모든 길 위에 내 발자국이 찍혀 있다 생각하면 감격스럽지 않을 수가 없어. 그런데 막상 그 길을 다 걷고 집에 들어와 몸을 뉘고 나니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차라리 홀로 힘겨이 걷던 그 길 위에서는 외로움이나 고독 같은 것을 느낄 틈도 없었다. 꺼이꺼이 울음이 터지는 것도 아니고,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짜내는 눈물도 아니, 덜 잠근 수도꼭지에서 물이 새듯 눈물이 타고 흐르는 거였다. 이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이리도 허전하고 허무하기에, 혹은 외롭고 불안하기에.
1. 떠나기 전 날 밤 (9월 13일)
계획도 없었다. 그러니 준비라는 것도 있을 리 없었다. 이번이 아니면 기회가 없겠다 싶기때문이었다. 그동안에도 이러저러한 일로 서울에 다녀갈 때면 언젠가 한 번은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양말 몇 켤레와 속옷 몇 장을 가방에 담았다. 터널을 만나거나 밤 길을 걸어야 할 수 있으니 손전등 하나를 넣었다. 넣었다 뺐다 하다가 라디오도 하나 넣었다. 그리고 또 뭐가 필요할까? 수건 한 장에 칫솔 하나. 자기 전에는 물집을 터뜨려야 하니 실과 바늘도 있어야겠지. 물도 하나 있어야 할 것 같아 미리 얼려두려 냉동실에 넣었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다.남들처럼 지도를 펴놓고 코스를 그려보지도 않았고, 대충이나마 하루걸음을 예상해 구간을 나눠본 것도 아니다. 한 보름이면 될까, 힘이 들면 아무 곳에서나 주저앉아 발을 주무르며 쉬엄쉬엄 가면 되겠지. 보름이 아니라 한 달 가까이 걸릴지도 모르겠어. 나는 원래 이렇게 무작정인가 보다. 이것저것 재느니 일단 나서고 보자는 생각이었다. 시계를 새벽에 맞춰두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2. 첫날 - 서울 회기동에서 양평 국수역까지 (2009. 9. 14)
새벽 네 시에 일어나 네 시 이십 분 집에서 나섰다. 회기역에서 외대역을 빠져 상봉동 쪽으로 나가는 길. 익숙한 새벽길이다.이른 시간인데도 분주한 걸음이 적지 않다. 그 가운데신문 돌리는 오토바이 한 대 지나간다. 십 년 전 꼭 이맘 때그 골목골목을다니며 신문을 돌렸더랬다.상가 간판들이야 더러 바뀌었지만 지금도 눈을 감고라도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길이다.상봉동을 지난다(05:20). 망우리 고개를 넘어 구리 시에닿았다(06:20).춘천방향과 양평 방향으로 나뉘는남양주 경찰서 삼거리에서 양평 쪽으로 길을 잡았다.이 때부터는인도라는 것이 없이 차만 쌩쌩 다니는 길이 시작이다. 한 자를 조금 넘는 갓길을 따라 걷는 길은 언제나 아슬아슬하다.시내를 빠져나오기전에 아침을 때울 걸,밥집이 좀체 나오질 않는다. 삼패사거리라는 곳 조금 넓은 갓길에 토스트도구워 팔고, 라면도 파는 포장마차가 있어 라면 한 그릇으로 아침을 때웠다(08:00).덕소에서 조금헤매기도 했고, 조금 더 걷다 보니 도심역이 나왔다.가까운 선배가 사는 아파트가 바로 곁에 보인다. 아마 몸이 한참 지쳤으면 물이라도 한 잔 내놓아라 쳐들어갔겠지만 아직 길을 나선지 얼마가 되지 않으니 전화나 한 통 하고 그냥 지나쳤다. 다시 자동차전용도로로 올라서니자동차들은 경주를 하듯 쌩쌩 달린다. 아! 그런데아니나다를까 벌써 발바닥에 물집이 크게 잡히기 시작했다. 신발이라도 좋은 것을 신어야한다는 말을 모른 체 하는 게 아니었나 보다. 내가 신은 것은지난 봄 양양 장에서 산 만원 짜리 운동화. 깔창이란 것도 없이 실내화처럼 가볍기만 한 그런 신발이다.그냥 신던 것 신으면 어떻겠느냐고, 겁없이 덤볐는데 그럴 일이 아니었나 보다. 벌써부터 찔룩찔룩.자동차도로 갓길을 걷다보니 강둑 아래로 자전거 길이 나 있는 게 보인다. 그리 내려가도 길이 이어질 것만 같다. 강둑 길로 내려서니 자동차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주 좋다. 강이 얼마나 예쁜지 몰라. 팔당댐을 멀리에 두고 잠시 주저앉았다(10:00). 그렇게 한 시간을 더걷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 신발과 양말을 벗었다.발바닥 복판으로 오백 원 동전만한 물집이 부어올라 있다. 바늘을찔렀다. 다시 양말을 신고 신발을 신는데, 아아 죽을 맛이다(11:00).팔당을 지나면서는 제법 밥집들이 있었지만 왠지 혼자 들어가 먹기에는 부담스런 근사한 분위기 식당들 뿐이다. 아마 데이트를 하는 이들이 즐겨찾는 곳이어서 그런가 보다.그래서 결국 능내를 지나면서 '소문난 찐빵'이라 쓰인 집에 들어가찐만두 한 판으로 점심을 때웠다(12:20).아침은 라면, 점심은 만두,이래서는 안 되는데,이러다간 오래 못 버티는데 생각이들어 저녁은 꼭 푸짐하게 잘 먹어야지 생각을 하며 일어섰다. 능내를 빠져나가는 길까지는 그래도4차선 도로가 나기 전의 옛 찻길이었다. 하지만 양수대교 앞으로 올라서니(13:20) 자동차들은그야말로 경주를 하듯 내달린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함께 흐르는물줄기는 정말 어마어마했다. 그만큼이나 다리는 길고도 길어. 다리 위에 멈춰서 강을 내다보는 여유 따위는 부릴 수가 없다. 트럭이라도 잇달아 몇 대가 지나가면몸이 휘청, 내 몸 뿐 아니라다리 전체가 출렁이듯 흔들리는 게 느껴진다. 그 아름다운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였지만, 가장끔찍한 걸음이었다. 어떻게든 빨리 그 다리 위를 빠져나가고만 싶어. 4차선 그 길이 싫어 혹시 옛길로나가도 길이 이어질까 싶어 내려섰더니 양수리로 이어지는 길이 나온다. 그런데 이게 그만 잘못든 길. 양평으로 가는방향하고는거꾸로가 되는 거였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길이 좋다, 좋아 하면서양수리로 걸어들어갔다. 길을 잘못들었다는 걸 안 건 양수리에 다 들어가서였고, 안 되겠다 싶어 어느 순두부 집에서 밥을 먹었다. 그러고는 들어온 길을 되돌아 나가 다시 양평 쪽으로. 그러다 해가 떨어질 무렵이 국수역 쯤 되었을 때였나? 안 되겠다 싶어 신발부터 사야겠다 싶었다. 신발 가게를 찾으려면 양평은 가야 할 텐데, 오늘은 도무지 양평까지 닿을 수가 없을 것 같아 버스를 탔다. 그러고는 양평 읍내에서 신발가게들을 돌아다녀 발이 편할 등산화를 하나 샀다. 세상에나, 내가 신던 신발로 치면 스무 켤레는 살 만한 돈을 주고 산 것이다. 나로서는 이런 값비싼 것이 처음이다. 어휴, 이럴 바에야 처음부터 이런 신발을 준비해 신고 걸었을 걸. 이제 와 이런 신발을 사 신는다 해야 이미 물집이 다 잡혀버린 발이 나을 리 없으니 말이다. 더 심하게 망가지지나 않게 해 줄 뿐. 그렇게 양평에서 신발을 사 신고는 다시 버스를 타고 국수역으로 되돌아왔다. 버스로 몇 정거장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만큼이라도 날로 먹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은 국수역에서 자고 내일 다시 출발하자. 아, 그런데 국수역으로 오면 있겠지 싶던 여관이 보이질 않는다. 아니, 아주 없던 것은 아냐. 흔히 말해 러브호텔인지 뭔지 하는 네온싸인 번쩍번쩍 으리으리한 모텔이 하나 있기야 한데 그런 곳이 싫어 지나쳤더니 더는 그 비슷한 곳도 나오지를 않는 거였다. 여관은커녕 간판 불을 찾을 수 없는 야산만 이어진 길이 그러고도 두 시간을 더 이어졌다. 젠장! 사실 떠날 때부터 걱정했던 것이 바로 이런 거였는데, 해가 저물어 그만 쉬어야 할 때쯤 숙소가 나오지 않으면 낭패인 것이다. 그게 첫날부터 시작이었고, 밤 아홉 시가 되어서야 겨우 여관 하나를 만날 수 있었다. 그곳도 빨간 불빛 주렁주렁 이어진 야시시한 여관이긴 마찬가지. 하지만 더는 선택할 여지가 없다. 여관 종업원과 흥정에 흥정을 하여 오천 원을 깎아 방에 들었다.(21:00) 아, 그런데 또 한 가지 낭패가 있다. 그렇게 여관에 찾아들고 나니 저녁을 먹을 식당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도무지 더는 한 발짝도 걸을 수가 없어. 다행히 여관에 붙은 중국집 전화번호가 있어 짬뽕 한 그릇을 시켜먹었다(22:00).잠자리에 들면서도 걱정이었다.이 발로 어떻게 양양까지 가겠는지.
3. 둘째 날 - 양평 국수역에서 홍천 양덕원까지 (2009. 9. 15)
지난 밤 열두 시 넘어 잠이 들었는데도 새벽에 눈이 뜨였다(04:30).조금 더 잘까 하고 꾀가 나기도 했지만 아니다,해뜨기 전에 움직이는 게 차라리 낫겠다싶어 억지로 신발을 꿰어 신었다. (05:00)그나마 밤사이 발이 조금 나았는지 지난 밤만큼 쓰리고 아프지는 않았다. 세 시간을 걸어설렁탕 파는 곳에 들러 아침을 먹었다(08:00).식당에 올라앉은 김에 다시 양말을 벗어보니 물집을 터뜨린 안으로새로 물집이생겨 겹으로 나 있었다. 그것도 바늘로 찔러 터뜨리고는 다시 출발. 용문(09:30)이라는 곳을 지났고, 광탄(11:00)이라는 곳을 지나며 잠깐 앉아 담배를피웠다. 양동을 지나 청운으로 가는 길에서 점심을 먹었다(12:30).
걸으면서 생각한다, 나는 이 길을 왜 걷고 있는지. 더러 전화가 걸려오는 일이 있어 얘기를 하게 되면 듣는 이들도 깜짝 놀라며 왜 그러느냐고 묻곤 한다. 그러면 나는 그냥 웃어 넘기면서 날씨가 좋아 걷는다고 대답도 했다가, 사는 게 힘들어 걸어보고 싶었다고 대답도 했다가, 남들은 무슨 올레니 둘레길 같은 데도 찾아 일부러 걷는데 그냥 집에나 걸어가자 하고 걷는다고 너스레도 떨곤 했다. 그래, 어디 티벳의 차마고도나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 같은 데는 못 걷더라도 사잇골 가는 길에라도 발자국을 찍어보고싶은 거라며말을 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우울이 꽤 오래 되고 있었다.답답했고, 아무 것에도 자신을 잃었다. 하는 일에도, 사는 일에도 도무지자신이 없기만 했다. 게다가 오랫동안 붙잡고온 그 어떤 가치에 대한믿음마저도 흔들리고 있었다.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는 막막함에 꽤 여러 달을 무기력하게 지내기만 했다.그러던 차였을 것이다. 언젠가 한 번은 걸어보고 싶은 길이었다.이 길을 다 걷고 나면 무엇이 보이게 될까 알 수는 없다. 무엇을 버릴 수 있게 될지, 혹은 무얼 되찾을 수 있을지, 아직은 아무 것도 알 수는 없다. 그저 한 번 걸어보고 싶었다. 힘이 들면 힘이 드는대로, 외로우면 외로운대로, 주저앉고 싶거나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그것 또한 그런대로…….
식당에서 나와 자동차정비소에 들어 가게 아저씨에게 길을 물었다. 이 4차선 길 말고 옛길로 가는 길은 없느냐고. 그랬더니 아저씨 두 분이 이러구저러구 말씀을 해 주신다. 저 아랫길로 해서 가면 용도리라는 마을이 나오고 거기에서 재 하나를 넘으면 홍천 양덕원이라는 데가 나올 거라고. 오늘은 거기까지만 가서 자야 할 거라고. 그래서 지난 밤 일이 떠올라 거기에 가면 잘만한 여관이 있으냐 물으니 그렇다 한다. 됐다, 다행이다. 아저씨들이 일러준 길을 따라 4차선이 아닌 마을 길로 내려섰다. 마을 길로 드니 확실히 좋다. 더러 전화나 문자를 보내는 이들은 날도 좋은데 새 소리, 바람 소리, 풀벌레 소리 들으며 걸으니 좋겠다는 말들을 하곤 하지만 사실 그런 낭만과는 영 거리가 멀다. 들리는 것은 자동차 내달리는 소리에 귀청을 찢는 경적 소리 뿐이다. 게다가 터널을 한 번 지날라치면 그 시커먼 굴 안에서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러던 차에 마을 길로 내려서니 그야말로 천국 같다. 그제서야 비로소 닭이며 개가 우는 소리가 들리고, 마을 할매들이 어디를 그리 걷느냐 물어오기도 한다. 단월리라는 곳을 지날 때 작은 우체국이 반가워 그곳에 들었다(13:40). 비룡리(15:00)를 지나고 청운면 소재지인 용도리를 지났다. 그리고 옛길이 끊어져 어쩔 수 없이 다시 올라선 4차선 길에서 다대리 청운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15:50). 자동차들이 질주하는 4차선 길을 걷고 또 걸었다. 굽이진 고가도로를 걸었고, 언덕배기를 몇 차례나 넘었다. 그렇게 걷고 걷다 보니 반가운 표지판 <안녕히 가십시오 경기도 양평군입니다>와 <무궁화의 고장 홍천입니다>가 얼마 간격으로 서 있는 것이다. 어쨌든 한 고비는 넘은 것이다. 이제 강원도다. 그렇게나 아프던 발바닥에도 힘이 나 아픈 줄을 모르고 걸었다. 양덕원 읍내에 들어 숙소부터 찾았다(19:00). 계속 여관 신세를 지고 있으니 조금이나마 싼 곳을 잡느라 여기저기 값을 물으며 다닌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아무 곳에나 들어가 가방을 던지고 싶었지만 발바닥을 괴롭혔다. 몇 군데 여관과 민박집을 알아본 끝에 삼만 원 달라는 여관에서 이만삼천 원에 자기로 하고 방을 얻었다. 저녁으로 삼겹살 집에 들었다. 그 시커먼 공기의 터널을 지났으니 목구멍이라도 좀 씻어줘야 할 것 같아.
4. 셋째 날 - 홍천 양덕원에서 가리산 휴양림 앞까지 (2009. 9. 16)
다섯 시에 눈을 떴지만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조금 더 잠을 청했다. 지난 밤에도 열두 시가 다 되어서나 잠에 들었으니 말이다. 저녁을 먹고 여덟 시 쯤 숙소에 들었지만 일찍 잠에 들지를 못한다. 몸을 씻고, 양말과 속옷을 빨아 널고, 그 뒤에는 실과 바늘을 들고 발바닥에 잡힌 물집마다 응급처치를 한다. 바늘에 실을 꿰어 물집에 끼워넣는 것인데, 그리하면 잠을 자는 사이 실을 타고 물이 스며들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바닥 하나에 네 군데나 바늘을 찔러 넣는다. 무슨 외과의사가 집도를 하듯이 발바닥에 바느질을 하는 것이다. 대충 그러고 나면 열두 시나 되어 잠에 드는 것이다. 그냥 잠을 자도 네다섯 시간이면 모자라기 마련인데, 이렇게 하루 열세 시간, 열네 시간씩 걸으면서 잠까지 못자고 있으니 오후가 되면 체력이 아주 바닥이 나곤 한다. 처음부터 계획이라는 게 없었고, 더구나 무슨 걷기 선수들처럼 페이스 조절이라는 것 또한 할 줄을 몰라 무식하게 걷고 있으니 내가 봐도 참 딱할 노릇이다. 조금 더 잔다고 누웠지만 깊은 잠에 들지도 못하고 이내 길을 나섰다(07:00). 아무래도 4차선 길에 올라서면 밥 먹을 곳이 언제 나올지 모르겠다 싶어 읍내에 있는 김밥 가게에서 김밥 한 줄을 사고, 편의점에 들러 손전등에 넣을 건전지도 한 세트 샀다. 그러면서 물어보니 바로 터널 하나가 나올 건데, 터널로 들어가지 않으려면 며느리고개라는 길로 들면 그 터널을 아주 넘는 길이 있다 일러주었다. 과연한 시간 남짓을 걷다보니 홍천터널이 나왔고, 그 앞에 언덕으로 오르는 길(08:20)이 갈라져 있다. 터널이 있기 전에는 차들도 모두 그리로 다녔을 길이다. 그러나 고개를 다 넘도록 자동차는 물론 사람 하나 구경도 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죽어버린 길이다. 매화산 줄기인 그 고개를 다 넘으면서 길바닥에 가방을 내려놓고 김밥 한 줄을 먹었다. 그러곤 다시 4차선 자동차전용도로. 나도 차를 몰아 운전할 때는 그랬겠지만, 이 놈의 차들은 인정사정이 없다. 아무리 갓길에 바짝 붙어 걸어도 어떤 것은 팔꿈치를 스칠 듯 지나치곤 하는데 그럴 때는 정말 가슴이 철렁한다. 밤에 숙소에 들 때면 정말 한 걸음도 뗄 수 없을 것 같이 붓고 짓무른 발이지만 자고나면 그나마 몇 시간은 가벼워지는데, 그도 잠깐, 이내 한 발짝 내딛는 것도 미칠 정도로 발바닥은 엉망이 되고 만다. 좀 부풀려 말하면 깨진 유리조각을 맨발로 걷는 기분이랄까. 발바닥이 땅에 닿을 때마다 온몸이 찌릿해 정수리 끝까지 타고 올라온다. 한참을 걷다 보니 4차선 길 옆으로 소를 수십 마리 먹이는 우사가 보였다. 아무하고라도 말을 하고 싶어 그에 대고 움머 하고 말을 해 보았더니 칠팔십 마리는 되어보이는 소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쳐다 본다. 하, 신기해라. 솔직히 내 목소리는 자동차가 내는 소리에 묻혀 내 귀에도 잘 들리지가 않는데 그 소들은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구십 도로 들고 쳐다보는 것이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라 그 많은 소들이 다 같이. 꼭 그 소들이 저건 뭔가? 하고 쳐다보는 것만 같아. 어찌했건 반가웠다. 그 눈동자들, 그 표정들이. 소 걸음으로 천리를 간다는 말이 있다더니 내 걸음이 딱 그 짝이다. 가만히 계산을 해 보니 서울집에서 사잇골까지 육백삼십리 가까이 되는 것 같다. 소 걸음인지 낙타 걸음인지, 아님 거북이 걸음인지 아무튼. 4차선 길은 도무지 지겹기만 해 어느 주유소에서 물어 홍천 시내를 지나는 옛길을 물었다(11:10). 그러고보니 나는 제대로 된 지도 한 장 가지고 있는 것이 없어. 일러준대로 길을 찾았지만 몇 번의갈림길 끝에 다시 헤매게 되어 지나던 할아버지 한 분께 다시 길을 물었다.서석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구성포가 나온다고 가르쳐주신다. 그 구간은 말하자면 홍천 읍내 외곽의 길인 셈이다. 걷다걷다 태학리를 지나는 길에서 냉면집에 들었다. 밥을 먹어야 든든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날이 뜨거워 시원한 냉면 국물이 땡겼다. 한 그릇을 먹고, 사리 하나를 더 말아 먹어. 신발을 벗고 식당에 들면 그 동안만이라도 발을 쉬게 해 주고 싶어 양말도 다 벗게 되고, 그 동안만이라도 발을 어떻게 하고 싶어 물집들에 바늘을 찌른다. 그런데이 식당에는 손님이 많아 그리한다는 게많이 민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살고 볼 일이다. 맨 구석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 발에 바늘들을 찔러댔다.옛길로만 계속 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길은 곧끊기고 4차선과 붙어버린다.도무지 더못 걷겠어서 벌렁 누워버렸다. 여전히 자동차들은 무섭게 내달리고 있지만, 에라나도 모른다. 그나마 갓길이 넓고잔듸를 심어놓은 길이 있어그 자리에 누웠다. 신발, 양말 모두 벗고 바늘들을 찔러댄 다음 가방을 받쳐 발을 올리고 누웠다. 손에 들고 있던 물병 하나 머리에 베고(14:00). 눈이라도 붙여볼까 했지만 잠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한 삼십 분을 누웠을까? 마음 같아서는 일어나고 싶지 않지만 갈 길이 멀다. 억지로 몸을일으키니그새 몸이 많이 가벼워졌다.다시 걷기를 시작하면서는 나도 모르게자꾸만 전화기를 열어 시계를 본다. 나 나름대로 가진 원칙이 오십 분을 걷고, 십 분을 쉬겠다 하는 거였는데,다시 걷기 시작해 이 정도면 오십 분이되었겠지 하면서시계를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열어보면 겨우 십 분이 지났고, 십오 분이 지났을 뿐이다.또 열어보면고작 오 분을 더 걸었거나 십 분. 그러니 가다 힘들면쉬면서되는대로 가자고 했으면 틀림없이 나는 십 분에 한 번은 주저앉았을 일이다.그렇게 오십 분을 걷고, 십 분을 쉬고 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문다. 이거 큰 일이다.길가에 식당이나숙소 삼을만한 곳은커녕 삭막한 고가 같은 4차선 길만 이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또 한 번 터널이 나타났다. 이번에는터널을 피해 넘어가는 샛길도 보이지가 않는다.차로 지나기에는 잠깐일지 모르지만 걸어 지나기에는 얼마나 긴지 모른다. 내가 지나는 동안만이라도 차가 덜 지나가기를 바라지만 그게 어디 될 일인가? 트럭이며 버스가 지날 때마다 죽을 지경이다. 숨이 막히는 것도 막히는 거지만 그런 차들이 한 번 지날 때면 굴 안에서 소리가 울리고 울려 고막이 찢겨나갈 것만 같다. 겨우 터널을 빠져나오는데, 아! 너무나도 반가운 불빛이 있다. 화양강 휴게소라고 써 있는 간판. 길 건너편에는 철정 휴게소가 있으니 내심 오늘 목적지로 생각한 철정에도 다 닿은 것이다.
다 왔다는 생각에 화양강 휴게소에서 한참을 쉬었다. 음료수도 사 마시고, 휴게소 뒤로 보이는 홍천강 줄기도 내려다 보면서. 그리고 또 하나 피할 수 없이 떠오르는 기억. 작년 이 맘 때 생에 대한 마지막 싸움을 하던 먹통 엉아를 옆에 태우고 병원을 오가던 길이면 거기거나 조금 더 지나 나오는 휴게소에서쉬어가곤 했다. 게다가 이제 보름 뒤면 엉아가 죽은지 꼭 일 년이 되는 날.사잇골까지 걷는 이 길에서 당연 그를 떠올리고 있다.그이와 함께 지으며 나누던 시간들, 그 길을 오가며 들려주던 그이의 목소리.또한 내 안에서도 그를 불러내어 묻곤 한다. 자신이 없어요, 아무 것에도…….
그 휴게소 가까이에서 아무런 숙소에나 들면 되겠지 했는데 알아보니 그게 아니다. 여관 있는 곳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 반은 더 가야 한다는 거다. 이미 긴장이 풀려 다리통이고 발바닥이고 다시 걸을 준비가 안 되었는데 아주 낭패였다. 게다가 날까지 다 저물어 차들은 불을 밝히고 어둠 속을 내달린다. 어쩔 수 있나. 손전등 하나를 휘휘 저으며 쌩쌩 달리는 4차선 갓길을 쩔룩쩔룩 걸었다. 시간 반을 더 가니 가리산 휴양림 들머리에 여관 간판 하나가 보였다.
5. 넷째 날 - 가리산 휴양림 입구에서 인제읍까지 (2009. 9. 17)
홍천 시내를 지나 인제 쪽으로 성큼 와 있으니 거리로만 보면 반 넘게 온 셈이다. 보통 양양에서 서울을 오갈 때 차로 세 시간, 홍천까지가 한 시간 반이었으니 그렇게만 본다면 말이다. 하지만 마음은 벌써 반 넘게 왔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앞으로 인제로 해서 한계령을 넘는 길은 그야말로 태백산맥을 넘는 오르막에 오르막길 뿐이니 더욱 긴장이 될 수밖에. 게다가 그 동안 피로는 쌓이고, 갈수록 발은 더 망가지고 있으니 더 걱정이었다. 전날 오후 급격히 체력이 떨어져 갓길에서 벌렁 드러눕던 기억은 또한 더욱 겁이 나게 했다. 계속해 잠이 모자라고 있지만 맞춰놓은 시계 소리에 눈을 떴다(06:00). 그리고 그대로 출발(06:30). 며칠 걸어본 바로는 새벽에 얼마나 걷는지에 따라 그날 걸음이 달려있다. 말하자면 새벽에 걷는 게 하루 걸음의 반이고, 오전에 걷는 게 하루 걸음의 삼분의 이. 점심을 먹고 나서부터는주저앉지 못해 걷는 정도밖에 되질 않는 것이다. 발은 발대로 짓물러터지고, 몸은 무겁게 퍼지고, 게다가 뜨겁게 내리쬐는 볕까지. 그러니 아무리 꾀가 나더라도 새벽에는 일찍 나서는 게 좋다. 하룻밤을 보내면서 발도 많이 회복된 데다가 날도 시원하고 좋지, 4차선 길이라 해도 차가 별로 없으니 그 또한 좋으니 말이다. 그렇게 새벽을 걷다보면 동이 트는 걸 보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다. 지금 걷는 길은 무조건 동쪽, 동쪽으로 가면 되는 일이니 걷는 사이 어둠이 걷히고 불그스름하게 밝아오면서 동그랗게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몇 해 전 울진에서 7번 국도를 타고 강릉으로 걸어올라올 때가 떠오른다. 그 때는 무조건 북쪽, 북으로 오르는 길이었다. 그런데 동해시를 지날 때 쯤 여럿으로 길이 갈라지는데 길을 몰라 난감해 했더랬다. 게다가 비까지 내렸더랬지. 그 때 또한 지도 한 장 없이 무작정 나선 길이었으니 낭패다 싶어 아무라도 붙잡고 물어야 했다. 사람 없는 길에서 한 아주머니가 보이기에 다급하게 소리쳐 부르고는 "아줌마, 저기, 북쪽, 북쪽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해요?" 하고 묻는데 그 아주머니 깜짝 놀라는 것이다. 나중에 정신이 들어 생각하니 나도 헛웃음이 나왔다. 북으로 가는 길을 물었으니 순간 북한 가는 길을 묻는 것으로 들릴만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때는 내 행색이 지금보다 더 해 아주 거지꼴에다가 비까지 쫄딱 맞고 있었으니……. 새벽길을 걸어 가은리라는 마을에서 아침을 먹었다(08:10). 청국장이 맛이 좋았다. 장남리라는 마을을 지나며 잠시 쉬었다(09:40). 계속해서 이어지는 4차선 길이고, 굽이굽이 오르막만 이어진다. 그런데 걷다 보니 오르막을 보면 어쨌든 그 오르막의 꼭대기에 올라설 때까지는 억지로라도 걷게 된다. 잠시 쉬더라도 언덕 하나를 넘었다 싶을 때 쉬어야지 오르막 중턱에서 쉬는 건 기분이 찜찜하기 때문이다. 쉬었다 다시 일어나 그 오르막을 또 걷는 것보다는 일단 하나를 넘어 그 다음 고개를 향해 가는 것이 기분으로도 상쾌하고, 걷기에도 좋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니 홍천 시내를 지나 쭉 뻗은 길을 걸을 때 그토록 힘들던 게 어쩌면 오르막이 없어 그랬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오르막이 있거나 굽이진 길이 있을 때는 나도 모르게 저 언덕마루까지는 올라야지 라거나 저 굽이길이 끝날 때까지는 가야지 하는 마음에 힘을 내게 된다. 하지만 쭉 뻗은 길에서는 그런 동기를 찾을 수가 없어 막막하기만 하고 더 쉽게 지치게 되곤 했다. 사실 힘이 덜 들기로 치면 오르막보다야 쭉 뻗은 길일 텐데,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흔히 슬픔도 힘이 된다는 둥, 아픔이, 고난이 힘이 된다는 식의 말들을 하곤 하는데, 그 말이 맞구나 싶었다. 길로 치면 오르막이나 굽이길을 만날 때 나도 모르게 어떤 힘이 나는 걸 보니 말이다. 저 언덕배기가 나를 끌어당겨 오르게 해주는 것도 같고, 저 굽이 끝이 나를 붙잡아 주는 것도 같다. 그런 생각들로 언덕 몇 개를 더 넘고 보니 홍천과 인제를 가르는 고개도 넘어 인제군 남면 어론리에 들어섰다(10:05). 군을 하나 또 넘으니 기분이 좋다. 그 길로 한 시간을 더 걸으니 신풍리라는 곳(11:05). '꼴베러 가는 날'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휴게소가 나왔다. 아무래도 발에서 열이 너무 나는 것 같아 주저앉아 신발끈을 풀고, 양말도 벗었다. 그리고 물집을 터뜨리는 바늘침 몇 방. 어제까지 없던 새 물집이 두 군데 더 잡혔기에 아무래도 바로 출발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엽서 한 통을 쓰면서 시간을 벌어. 신남리는 읍내가 제법 컸다(12:00). 빙어의 고장이라는 푯말이 서 있는 걸 보면서 언젠가 꼭 한 번 먹으러 와야지 하면서 읍내를 걸었다. 우체국에 잠깐 들렀고, 지도도 확인할 겸 인터넷 컴퓨터에 잠깐 앉았더니 금세 삼사십 분이 지났다. 다시 걷기 시작, 여전히 오르막이 이어졌고, 길 한 편으로는 강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아아, 소양강이구나. 소양강 하면 춘천에서 내려다보던 기억만 있었는데, 이렇게 걸으며 보니 인제에서 내다보는 것 또한 무척이나 아름답다. 이 길을 차로는 수십 번을 다녔을 텐데도 이 아름다움을 이제야 느끼고 있구나. 걸으니 볼 수 있었지 아니었음 나는 그저 씽씽 지나쳐버리기만 했을 아름다움이겠다. 어느 식당 마당에 달린 원두막 하나가 있기에 가방을 풀고 앉았다(13:40). 마침 소양호가 내려다 보이는시원한 자리였다. 조금을 더 걸어 부평리에서 점심밥을(14:10).점심을 먹고 나니 역시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진다. 밥 먹은 자리에서 그대로 누워 잠깐 눈을 붙였다. 소양강을 지나는 다리를 건너, 인제읍에 닿으니 날이 어둡다(19:00).
6. 다섯째 날 - 인제읍에서 한계령을 넘어 오색까지 (2009. 9. 18)
아무래도 인제에서 출발, 한계령을 다 넘기에는 하루 해가 모자라겠다 싶었다. 게다가 늘 문제인 것이 해가 저물어 그만 쉬어야겠다 싶을 때마다 마땅한 숙소를 찾지 못해 한두 시간을 더 걷는 상황이 되던 걸 생각하면, 욕심을 내어서는 안되겠다 싶은 거였다. 한계령을 다 넘어가기 전에 해가 저물면 그야말로 낭패가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걸어온 걸음도 전해들은 이들은 다들 놀라워할 만큼 굉장히 빠르다. 그만큼 나는 쉬지 않았고, 무식할 정도로 하루 열서너 시간을 걸어온 것이다. 무슨 기록을 만들고자 걷는 것도 아니었고, 빨리 가야한다고 재촉하는 것도 아닌데 필요 이상의 강행군을 한 셈이다. 나 또한 마음으로야 쉬엄쉬엄 갈 거라고, 가다 힘들면 아무 곳에서라도 퍼져 쉬기도 하면서 여유있게 가야지 했지만, 일단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조금만 더 걸어야지, 아직 걸을 수 있으니 더 가야지 하는 마음이 되곤 했다. 아마 그건 워낙 길고 먼 길이라 나도 모르게 조바심을 내어 일단 힘이 있을 때 최대한 가둬야겠다는 불안함에 그리되지 않았나 싶다. 아마 어느 정도 이 길에 대한 감이 있거나, 구간 설정이나 페이스 조절 같은 것에 자신이 있다면 나름 여유롭게 너무 무리하지 않으며 걸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아무튼 지난 나흘을 그토록 정신없이 걸어온 거였다. 그러니 오늘만큼은 무리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거듭 생각했다. 한계령 밑자락 한계리에 닿았을 때 아직 밝은 날이 길게 남더라도 한계령에 들지 말고 그곳에서 하루를 묵는 게 좋겠다며 말이다. 그렇게 몸도 발도 좀 쉬어주면서 다음 날 새벽부터 한 달음으로 한계령을 넘어야지 하는 계획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무턱대고 한계령에 들었다가 날이 지고 숙소를 찾지 못하게 되면 그야말로 낭패라며 말이다.
일단 다른 날처럼 일찍 눈을 떴다(05:50). 그리고 바로 출발(06:20)해 원통 쪽으로 걸었다. 합강3리(07:10)라는 곳에서 잠깐을 쉬었고,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자전거길을 따라 원통에 닿았다(08:20). 원통은 군부대가 많아 그런지 인제만큼이나 크고 사람들이 많았다. 시간이 시간인만큼 아침 등교길의 아이들과 출근길에 나선 사람들이 함께 걸었다. 그동안은 늘 자동차들과 함께 걸어 몰랐는데, 많은 사람들과 함께 걷다보니 내 걸음이 정말 느리다는 걸 새삼 알았다. 책가방을 맨 초등학생 아이들도 나를 앞서 지나치고, 마을 아주머니들도 나보다 걸음이 빠르다. 물론 발바닥이 아파 질질 끌다시피 절뚝이며 걷기 때문일 텐데, 그러니 결코 내 걸음이 빠르지가 않은 거였다. 그런데도 나흘만에 인제에 닿고, 벌써 원통을 지나는 것은 걸음이 빨라서가 아니라 그 절뚝이는 걸음으로 쉼없이 종일 걸었기 때문인 것이다. 원통을 빠져나가니 4차선으로 합쳐졌다가 다시 갈라져 옛길이 나온다.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길, 개울을 따라 걷는 아름다운 길. 아! 그런데 이걸 어쩌랴, 막상 한계리에 닿았는데 오전 열 시를 겨우 넘겼을 뿐이다. 진작 생각하고 있기를 한계리에 닿을 때가 오후 두 시가 되건 세 시가 되건, 더는 욕심을 내지 않고 바로 그곳에서 하루를 묵는 거였는데, 이건 빨라도 너무 빠르다. 어떻게 할까 잠깐 망설이다가 중턱에라도 민박 같은 곳이 있겠지 하면서 한계령으로 들었다. 이제 저 높은 봉우리만 넘으면 양양이다, 그러고나면 바다도 보이겠지…….
새벽에 안개가 자욱하더니 곧 볕이 뜨겁게 내리 쬐었다. 이만저만 긴장이 되는 게 아니었다. 갈수록 발 상태는 좋지가 않지, 몸도 많이 축나 있는 데다 등산과 다름없는 해발 920미터의봉우리, 여기에 햇볕까지 뜨겁게 내리 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이렇게 긴장을 하노라니 몸에 기운이 나는 것이다. 그 때까지 한 발짝을 내딛기가 미칠 것 같던 발바닥 통증도 조금 덜한 것 같고 몸에도 기운이 솟는 것 같다. 오십 분을 걷고 십 분을 쉰다. 처마골(11:25)에서 잠깐을 쉬었고, 옥녀교를 지나 장수교를 건너면서 한 번을 더 쉬었다(12:35).아, 그런데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골짜기 다리를 건널 때마다 불어오는 골바람이 아주 얼음이다. 에어컨은 저리 가라. 뜨겁게 내리쬐는 볕에 죽을동 살동 하고 있는데 그 바람을 맞으니 살 것 같았다.한 가지 아쉬운 건 그 어디에도 물을 받을 곳이 없다는 거. 4차선 도로를 지날 때면 그나마 휴게소나 식당, 주유소 같은 것이 보여 아무 데나 들어가 생수를 얻곤 했는데, 이 길에서는 물 한 모금 얻어마실 곳이 없는 것이다. 다행히 가방에 사과 한 알이 있어 깨물어 먹었다. 바람도 시원하고, 사과도 시원하고, 마음도 시원했다. 자신이 생겼다. 충분히 오늘 안에 한계령을 넘을 수 있을 것 같아. 계속해서 오십 분을 걷고 십 분을 쉬며 걷는다. 한 시간을 걸으면3키로가 주는 것 같다. 길가에 조그만 이정표들이 한계령 정상까지 몇 키로 남았는지를 1키로마다 표시해준다. 이십 분을 걸으면 1키로가 주는 것 같아. 그럴 때마다그 이정표들이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마침내 정상까지 2키로가 남았을 때 길 한 켠에 졸졸졸돌틈 사이 물줄기 하나가 보인다. 가방을 내던지고 쫓아가땀범벅이 된 얼굴을 씻고, 팔을 씻고, 얼굴을 들이밀어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세상에, 그렇게 맑고 시원할 수가 없다. 아니,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워.물병에도 가득 그 물을 채웠다. 그리고 마침내 해발 920미터 한계령 정상(15:20).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아직 가야할 길이 적지 않지만 그래도 이젠 다 온 것만 같아. 돌아보면 그 한계령 꼭대기에서부터 인제, 홍천, 양평, 서울까지 내 발자국들이 쭉 이어져 있지를 않은가! 그곳에서만큼은 사진이라도 하나 찍고 싶어 휴게소에서 군밤을 파는 아저씨에게 부탁을했다. 아저씨도 얘기를 듣더니 깜짝 놀라면서 함께 기분 좋아하며 사진을 찍어준다. 그 때까지 점심을 먹지 못했으니 아무 거라도 먹어야겠다 싶어 휴게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뭐야? 막걸리가 팔고, 안주로 더덕구이가 있다.내려갈 길도 수월치가 않아 잠깐 망설였지만 그러나 아니 마실 수는 없었다.그렇게 막걸리를 마시는 날은 평생 다시 올 것 같지도 않아. 의기도 양양하게 막걸리와 더덕구이를 시켜놓고 바깥에 내놓은 탁자에 앉았다. 바다가 보인다, 깎아지르는 기암절벽들이 보인다. 바람에 날아갈 것만 같다.
술까지 한 잔을 하고 나니 다리가 살짝 풀리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급경사에 급커브 길이 이어지니 조심! 조심해야 한다. 아무리 내리막길이라 하지만 이미 발바닥은 짓무를 데로 짓물러 한 발짝을 딛기에도 뒷목이 찌릿하도록 아프니 쉽지만도 않다. 하지만 아무래도 오르막보다는 훨씬 수월하다. 나선형으로 돌고, 팔자로 휘어지는 경사길을 기분 좋게 내려왔다. 어디쯤 내려올 때였을까, 돌아내리는 길에 안 쪽으로 넓게 갓길이 있어 그 자리에 가방을 베고 누워 하늘을 보았다. 차들은 내가 있는 바깥에서 돌아오르고, 돌아내렸다. 운전석에 있는 이들이 깜짝 놀라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아.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기분이 좋았다. 언제 또 그 길에서 가방을 베고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볼 수 있을까? 그토록 먼 길을 걸어오지 않았던들, 한계령에서부터 서울까지 남겨온 발자국들의 감동이 없었던들……. 오색까지는 세 시간 남짓 걸었나 보다. 설악산에 오르는 매표소가 보였고, 온천이며 식당, 민박집 따위 간판들이 보였다. 토박이 식당에 들어가 저녁을 먹고(19:00), 안터에 있는 민박집에 들어가 짐을 풀었다. 하아, 이제 정말 다 왔구나. 설마 했는데, 오늘 하루 인제에서부터 걸어 한계령을 넘고 말았구나.
7. 여섯째 날 - 오색에서 사잇골까지 (2009. 9. 19)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나 여섯 시 삼십 분에 오색에서 나왔다. 오가는 차도 별로 없어 더욱 기분 좋은 새벽 길이었다. 어쨌든 논화리까지는 계속해서 내리막길이어서 부담이 덜하다.굴아우라고 써 있는 버스 정거장에서 잠깐을 쉬었고(07:30), 송아리를 지나 남설악터널을 빠져나와 한 번을 더 주저앉았다(09:00). 아, 아무래도 터널은 정말 싫어! 홍천이나 인제에서 지난 터널에 대면 차가 그리 많이 드나든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터널에만 들면 숨이 막힐 것만 같다. 게다가 자동차들이 내는 소리들은 아주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아. 논화리로 드는 마을길로 해서 상평리를 지나고 수상리에 닿았다(10:00). 그곳부터는 길이 눈에 익다. 우체국에서 조금 더 가면 탁 선생님이 다니는 상평초등학교가 있고, 왼쪽으로 빠지면 사잇골로 가는 길이 나온다. 우선 아침밥이라도 먹어야지 하면서 식당에 들어서는데 아직 밥이 안 된단다. 쩝 소리가 나오긴 했지만 안 먹어도 그리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다 하면서 길을 따라 걸으니 토끼탕이며 옻닭 따위를 하는 식당 하나가 보였다. 그런 데서도 그냥 밥 한 끼 할 만한 게 파는지 몰라 물어보니 된장찌개가 된단다. 게서 아침을 먹었다(10:20). 마을 이름들은 정확히 모르지만 어쨌든 차를 타고 여러 번 지난 길들이라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화일리를 지나고(11:30), 바로 골짜기만너머로 사잇골이 보이는 물갑리 버동 논길에 들어섰다(12:20). 아, 그런데 이상도 하지. 사잇골이가까워올수록 반가움이라거나편안함,이 길을 다 걸었다는 뿌듯함보다는불안하고, 불편한, 허전한마음이 엉겨들었다. 어제 한계령에 올랐을 때만 해도 너무나도 기쁘고 좋아, 누구라도 붙잡아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었는데오히려 집에가까워지니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해. 머리 아픈일들과 마음에 부대끼는 것들이 떠오르며 엉켜든다. 그런 것들을 털어낼 수 있기를 바라며 이걸음을 걸었는지도 모르는데, 아무 것도 털어내지를 못한 모양이다. 아니, 집에 다 와 간다는 건현실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 그러고 나니 잠시 잊고 있던 문제들이 떠올라마음이복잡하고 답답해지는지도 모르겠다. 누렇게 익은 버동 논 가운데에 앉았다. 저 멀리 파란 바다도 보인다.
간곡교를 지나고 우리 마을 사잇골에 닿았다. 산채로 올라가기 전에 샘골에 있는 농막부터 찾았다. 그러고 싶었다. 어쨌든 먹통 엉아에게 먼저 인사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니. 나에게 목수 일을 배우게 해준 것도, 그리해서 내가 이 사잇골에 들어와 살게 해 준 것도 다 그이 때문이었으니.샘골 언덕을 넘으니 농막이 보인다(13:00). 돌아들어가니 자작나무가 보이고, 그 아래 빗돌이 보인다. 저 꽃 이름은 무엇인가, 보랏빛 꽃들이 엉아가 누운 자리를두르며 피어 있다. 미처 술은 준비를 못했으니잔은 올리지못하고, 담배 한 개피에 불을 붙여놓고 절을 했다.그리고 이야기를 해. 나 서울부터 걸어왔어요. 서울부터 여기 농막까지다 내 내 발자국을 찍어놓았어.휴우, 힘들다, 작년에 엉아랑숱하게 다니던 그 길,몸이 조금 더 나으면 함께걸어보자던그 길……. 으응, 그리고 이 말까지. 이제 나는 사잇골에서 그만 떠나려 해요. 어디에서 살거나 뭐 다르지는 않을 건데, 나는 그만 어느 낯선 곳에 가서 아주 새롭게 살아보고 싶어요……. 이미 길을 나서면서부터 마음에두고 있던 생각이었다.괜찮지요? 그래, 괜찮아, 냉이야.
다시 마을로 내려와 산채에 올랐다. 서울 회기동에서 가방을 메고 나선지 꼬박 닷새하고 반나절이 걸렸구나. 가방을 풀고, 씻은 뒤 밥을 지어 먹으니 이내 어둠이 드리워. 이불을 펴고 누웠는데 왜 이리도 마음이 허전하고 허무한지 몰라. 이불을 펴고 누웠는데 왜 이리도 마음이 허전하고 허무한지 모르겠어.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꺼이꺼이 울음을 토하는 것도 아니고, 얼굴을 찡그려 눈물을 짜내는 것도 아니고, 덜 잠근 수도꼭지에서 물이 새듯 자꾸만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서울에서부터양양까지 걸어왔다는 것에 대한 감격이나 뿌듯함 같은 것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그저 허전하고 허무하기만 해.
8.오래된 우울
꿈 같다. 겨우 며칠 지났을 뿐인데 지난 엿새 동안의 일이 한 몇 년은 지난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져. 아마 나는 막연하게나마 어떤 바람이 있었나 보다. 이 길을 걷고 나면 무언가 달라질 수 있을까, 그 오래된 우울이라도 떨칠 수 있겠지. 나도 모르게 매달려 스스로를 괴롭혀온 어떤 것이 있다면 내려놓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랐고, 어디에서부터 찾아야 할지 모르겠는 자신감이랄까 희망 따위를 찾았으면 좋겠다 싶기도 했다. 하지만 아니, 그 어떤 것도 덜어내지, 되찾지를 못했다. 돌아온 현실은 여전히 그대로이고, 내 모습 또한 여전히 그대로.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하지만 인정하고 나니 차라리 괜찮다. 오래된 우울이라는 것도 굳이 억지로 떨쳐내려 할 것 없겠다는 생각이 드니 오히려 낫다. 고작 몇 해였지만 사잇골에 들어와 살던 시간들이 애틋하게 살아오고, 우울 속에서도 가슴이 차오른다. 그러고나니 이제야 비로소 털 것을 털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아. 며칠 사이에 바람이 많이 차다. 없던 굳은살들이 발바닥에 큼직하게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