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리

냉이로그 2016. 4. 19. 21:31

 

 

0. 재작년 봄, 당근

 

 재작년, 제주에 내려와 일을 하던 첫 해 봄, 만장굴 가까이 김녕 현장에선 가는 곳마다 당근이었다. 여기도 당근, 저기도 당근. 수확을 포기한 채 그대로 밭에 꽂혀 있던 그것들. 그대로 두어서는 곧 포클레인 장비들에 갈아엎혀질. 그래서 그땐 짬만 나면 당근밭에 쪼그려 앉아.

 

 20140310,  구좌읍 김녕리

 

 그 전까지만 해도 당근 내음이 그렇게나 달고 좋은 줄을 몰랐다. 한 뿌리, 땅에서 뽑고나면 후욱 하고 번져나는 당근 향, 절로 입에 침이 고이는. 이게 바로 그 유명한 구좌당근 ^ ^

 

 

 

 

1. 올 봄, 고사리

 

 올 봄, 선흘의 곶자왈 현장에는 사월 들면서 걸음마다 온통 고사리. 제주 고사리 유명한 거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거. 안 그래도 이즈음에는 중산간도로 어디를 가나 자동차들이 갓길에 띄엄띄엄 서있어. 전망 좋을 어떤 곳이거나 산책길이 있을만한 곳도 아닌, 야산에 다름 아닌 중산간의 곶자왈들. 그 차들은 다름아닌 고사리를 하러 나선 나물꾼들의 그것.

 

 심지어는 '고사리장마'라 이름붙은, 제주에만 있는 장마철이 있기도 해. 사월 중순, 제주 섬에는 열흘 가까이 장마가 있다는데 그걸 고사리장마, 라 한다는. 고사리철을 알고서 구름대가 그렇게 만들어지는 건 아니겠지만, 절묘하게도 고사리가 삐죽삐죽 올라오는 그 즈음, 제주에는 약속처럼 봄장마가 지나곤 했고, 하여 그 장마에 붙은 이름이 그것. 제주 사월의 고사리철에는, 고사리를 하러 육지에서 원정을 내려오기도 한다던가. 암튼 제주 고사리는 그 정도로 엄청난.

 

 

 

  

 

 그랬으니 제주에 내려온 첫 봄에도 고사리 얘기는 숱하게 들었지만, 그때야 그저 그런가 보다 했다. 산록도로 길가에 서있는 차들을 보면서야 고사리꾼들이 저렇게나 많이 나와있네, 하는 정도. 그리고 현장에서 반장 아저씨를 따라 가시덤불 숲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한 줌 꺾어본 게 다였을까. 아무리 제주 고사리가 유명하다 한들, 곶자왈 어디를 가야 고사리를 만날 수 있는지를 알아야 그 체험이라도 제대로 하지. 게다가 이미 많아보인다 싶은 곳은 전문 고사리꾼들이 싹쓸다 시피 하고 있으니,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리바리 초짜가 감히 고사리를 찾아 나설 용기 같은 건 없었다.   

 

 20160415,  조천읍 선흘리


 아, 그런데 이게 왠일! 선흘의 곶자왈 현장은 아무나 드나들 수 없이 출입이 통제된 곳. 그러니 그 안은 사람 손을 타지 않은, 마치 비무장지대와도 같은 곳 ㅎ 그러니 전문 고사리꾼들이 아무리 섬 전체를 싹쓸이한다 해도, 손이 닿지 못하는 깨끗한 곳.

 

 요즈음엔 경게돌담 쌓는 일을 마무리하느라 다소 여유로운 날들. 혹시 주워다 쓸 수 있는 돌이 더 있을까 싶어, 현장 주변을 살피고 다니다가, 순간 눈이 동그래지고 말았다. 여기도 고사리, 저기도 고사리. 고사리고사리고사리고사리 으아아악 고사고사고사리사리사고사리사고사리고리사고사리리리.

 

 재작년 봄, 어느 가시덤불 아래로 들어갔을 땐 눈을 씻고 보아도 그렇게나 눈에 들어오지 않던 얘들이, 그 현장의 곶자왈에선 고사리를 밟지 않곤 걸음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온통 고사리 밭이었다. 잠깐 쪼그려 앉아 한 걸음도 떼질 않고 손에 닿는 것만 꺾었는데도 저만큼!  

 

 20160419,  조천읍 선흘리 


 그래서 다음 날부턴 아예 현장에 올라갈 땐 비닐봉지를 몇 개 주머니에 챙겨넣곤 한다. 그래서 점심시간 밥도 거르고 쪼그려 앉아 꺾기 시작한 것이 두어 시간만에 저만큼 ^ ^ 요것까지만 꺾고 그만 해야지, 하고 마음먹으면 한 뼘 멀리에서 또 고사리들이 빼꼼빼꼼 조그맣게 말아쥔 주먹으로 얼굴을 드러내. 요것까지만 하고 그만 해야지 하면, 또 한 뼘 가까이에서 빼꼼, 이젠 진짜 그만해야지, 하고 마음 먹기를 열몇 번 ㅠㅠ 하지만 고사리들의 유혹, 그 중독성이란 ㅠㅠ

 

 고사리밭을 찾아 헤매어야 한다는, 자기만 아는 서식처를 혼자만 숨겨두고서 몰래 따곤 한다던 그것들이, 이렇게나 우수수수 눈에 들어오고 있으니, 모른 척 지나친다는 건 여간 어려운 게 아니 ㅎㅎ

 

 

 퇴근 길, 비닐봉다리로 한 보따리 씩, 고사리를 해 들어가면 엄마가 놀라며 웃는다. 처음엔 고사리를 하는 것 자체가 재미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손가락마디가 새까매지도록 고사리를 톡톡 꺾어가다가, 이젠 집에 갔을 때 엄마가 좋아하고, 달래가 놀라워하는 그 얼굴이 또 보고 싶어져 다시 가시덤불 밑으로 쪼그리게 되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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