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다

냉이로그 2015. 5. 12. 00:52

 

 

     

0. 

 

 여기에 몬가를 끄적이면서 제목다는 걸로 고민 같은 건 해본 일이 없는데, 지금은 뭘로 할까를 살짝 고민. 줄넘기, 노을, 라다. 아마 나는 '오늘 하루'를 뜻하는 어떤 말을 찾고 싶었나 보다. 그러다 무심결에 떠오른 낱말들.

 

 

 

1. 줄넘기

 

 줄넘기를 다시 시작했다. 회사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멈추고 있었으니 벌써 두 해를 넘게 쉬었다. 제주에 내려와서도 하지를 않다가 한 달 전 쯤부터 다시 시작해. 일부러 땀을 내는 운동이라고는 산에 가는 거, 걷는 거, 그거말고는 줄넘기밖에 하는 게 없네. 그게 언제더라, 회기동 옥탑방 시절에 맨 처음 줄넘기를 뛰기 시작했으니 그게 구실팔년이었나, 그러니 제법 오래 해오고 있는.  

 

 새벽에 눈을 떠 여섯 시면 소길리사무소 주차장으로 나간다. 그 시간엔 사람이 없을 뿐더러 아직 해는 뜨지 않았지만 여명이 밝아오고 있어. 게다가 여기에선 한라산을 바라보며 줄을 넘어. 예전에 하던대로 삼천 개. 그렇게 줄을 넘다보면 해가 떠오른다. 적당히 땀이 나고, 팔과 다리에 적당히 알이 잡힌다. 그리고 적당히보단 좀 더 가쁘게 숨이 차올라. 해는 점점 일찍 떠오르고 있고, 오늘은 그보다 좀 더 일찍 나갔다. 아무래도 앞으론 다섯 시 반에는 나가서 뛰는 게 좋겠어.  

 

 

 

 

 

2. 노을

 

 노을이 왔다. 석양에 지는 붉은 빛 낙조, 그 노을이 아니라 비와 바람 신이 함께 휘몰아쳐대는 태풍의 이름. 오전부터 재난대비 문자가 시간 간격으로 울려대더니 점심을 지날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다. 바람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면서 새로 산 우산 하나가 뒤집혔다. 우둑 뚝, 우둑 뚝 순식간에 우산살이 뚝뚝뚝 끊어져 버려. 

 

 감자네 집 뒷 마당, 제주에선 텃밭을 우영이라 부른다지. 처음으로 내 손으로 모종을 심어 감자네 우영을 만들었는데, 그게 걱정이다. 지난 주 오일장에 나가 사온 고추모, 깻모, 토마토와 상추. 그야말로 전래동화에 나오는 돌쇠 아범처럼 돌을 캐고캐고캐내어 밭이랍시고 만들었는데, 하필이면 이렇게 태풍이 불어닥쳐. 지주대를 세우고 묶어주는 건 줄기가 휘청휘청한 방울토마토 몇 개에만 해놓았을 뿐인데, 고추모는 어쩌지, 깻모는 어쩌지. 방향도 없이 후려쳐대는 비바람을 보며 그저 되뇌이기만 할 뿐. 고추야, 힘내라! 토마토야, 힘내라! 

 

   

   뒷마당에 우영을 만들 때, 감자가 내다보며 저렇게 좋아했네.

 

 

 

3. 우체국, 도서관

 

 밤부터 제대로 시작일 거라는 예보를 곧이 믿어서였을 것이다. 그랬으니 이 비바람 속에서 우체국엘, 도서관엘, 미용실엘, 하나로마트엘 돌아다녔지. 지난 번엔 탐라도서관엘 갔더랬는데, 감자에게 보여줄 그림책 몇 권이랑 그리고 요즘 달래와 내가 빠져있는 마쓰다 미리의 만화책 한 권 빌렸던 거가 반납일자가 지났던가 아니던가. 아마 지나지 않았나 싶어 더 미루면 안 되겠다 싶은 거였다. 다행히 제주는 타관에서 빌린 것도 가까운 데서 반납을 할 수가 있어, 그럼 오늘은 시내까진 나가지 말고 애월도서관에 가서 반납하고 오자. 

 

 

 

 

 

4. 막걸리

 

 그 비바람 속을 다니다 들어와서는 초저녁부터 일찍 잠에 들었네. 잠에서 깨니 달래와 감자도 잠에 들어. 오랜만에 혼자 맞는 늦지 않은 밤. 저녁을 거른 것이 출출해 고사리 불려놓은 것을 볶고, 버섯에 양파를 볶고, 두부를 부치고, 실은 밥상이라기보단 막걸리 안주를 준비해.

 

장을 볼 때부터 오늘같은 날엔 막걸리가 땡긴다면서 소주 아닌 막걸리를 사들고 들어왔으니.

 

 <올댓제주>, 재즈피아니스트 임인건 씨가 지난 한 해, 제주를 주제로 여러 뮤지션들과 함께 곡을 쓰고 연주를 해온 실황을 녹음해 만들었다는 음반. 라다 언니는 임선생님 덕분에 달마다 한 번씩 그 공연을 볼 수 있어 좋았다던가. 지난 달, 앨범이 나왔다던데, 라다 미용실에서도 이 앨범을 한 켠에 두고 팔고 있었다. 앨범 재킷만  보아도 끌리게 되던 '애월낙조', '하도리 가는 길', '평대의 봄' 같은 제목들. 막걸리상을 차려놓고 씨디를 걸어.

 

 

 

 아, 애월낙조, 이 노랜 익이 형님이 편곡을 하고, 수니 언니가 부른. 으응, 지난 번 만났을 때 싱글앨범 녹음으로 바빴다 하던 게 이거였나봐. 노래가 시작하는 순간 알아채지 못한 새 어디론가 마음을 데려가주는. 

 

 

 

 

 

 5. 라다 

 

 그 미용실 간판은 제주에 내려와 하귀초등학교 앞을 지날 때부터 늘 보아오던 거였다. 그러나 그 길에만 해도 찻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미용실이 어디 한둘인가. 머리깎을 일이 있으면 아줌마들 많은 미용실은 왠지 어색하여 블루클럽 같은 데나 찾아가고 했으니, 내게는 그닥 눈여겨볼만 한 곳이 아니었다.

 

 

 거기에 가게 된 건 달래가 내려오고부터. 예약을 해야만 머리를 깎을 수가 있다 하여 처음엔 달래도 거기엘 가지 못하고, 눈에 띄는 간판을 찾아 외도까지 나갔던 거 같은데, 지난 2월이던가, 그때는 미리 전화를 걸어 예약을 하고는 머리를 자르고 왔다. 달래가 마음에 들어 해. 오빠보다 한 살 적은가봐, 거기도 육지에서 내려온지 몇 년 되었대, 라다라는 말이 힌두 신화에 나오는 어떤 여인 이름이라던가, 하며 그곳 미용사와 나누던 얘기를 들려주어. 때로 그런 곳에서 지나친 관심으로 사생활에 대한 것까지 물어 붙임성을 보이며 말을 붙이면 부담스러울 때가 있는데, 거기에선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었어. 짧은 사이에 꽤나 많은 이야기를 나눈 모양이기도 하였는데, 그 대화가 즐거워보였다.

 

 그러다가 지난 3월, 산발에 부시시, 오빠도 머리 좀 깎으라며, 달래가 미리 전화로 예약을 해주어 거기엘 갔더랬다. 예약을 해야지만 머리를 깎아준다, 왠지 나는 그 원칙이 좋았다. 뭐랄까, 자존심이 있어 보인달까. 그리고 뭔가 내 시간을 내가 주도하겠다는 의지 같은 것. 여느 가게처럼 손님이 없으면 없는대로 하염없이 문을 열고 기다리거나, 그도 아님 밀려드는 손님 때문에 잠시 숨을 돌릴 수도 없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딱 내가 원하는 만큼의 손님만 받아 일을 하겠다는. 예약한 손님이 없는 시간에는 자유롭게 가게 문을 닫고 온전히 나의 시간으로 삼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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