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무

굴 속의 시간 2012. 12. 30. 09:05

 

 불국사에 근무 마지막 날,  새벽에 눈을 떴더니 하얗게 눈이 쌓였다. 강원도에서야 이 정도 눈에 놀랄 일은 아니지만, 여기 경주에서는 이 눈이 육십 년만에 가장 많이 내린 거라나. 

 고시원 옥상, 짐을 빼 나오던 마지막 날 아침.

 그 고시원 옥상에서 내려다 본.

 

 눈이 귀한 이 아랫녘엔 조금만 눈이 내려도 도시가 마비된다고들 하던데, 지난 번 살짝 길이 얼던 날 그걸 실감했더랬다. 시내에서 11번 버스를 타고 출근을 하는데, 불국역 조금 지나서 버스들이 그대로 멈춰. 더 못 올라간다는 거지. 으악, 이걸 어째, 어쩌라구! 결국 그날은 버스에서 내려 한 시간도 넘게 걸어서 출근. 그랬으니, 이렇게 눈이 쌓여 또 오늘은 어떻게 출근을 하나 싶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출근길, 등교길이어야 할 시내에 차가 다니질 않아 ㅜㅜ

 날마다 언덕을 오르며 맨 먼저 만나던 일주문.

 육십 년만에 내렸다는 눈으로 불국은 설국이 되었다. 원래는 이 날로 마지막 근무를 하고 짐을 다 빼서 올라가기로 하였는데, 떠나기로 한 날 이렇게 눈이 내려 발목을 잡아. 그러나, 집에 못 올라가도 좋아! 쏟아지는 눈으로 하얗게 덮인 경내는 얼마나 예쁘던지. 사진기 하나 손에 들고 구석구석을 다 담아두고 싶었다. 예뻐서이기도 했지만, 이렇게 마지막 인사를. 그동안 고마웠다, 석가탑, 고마웠다, 극락전, 고마웠다, 석축과 연지들, 연화칠보와 청운백운.

 

 이제 그 구석구석들.  

 

 

 

그동안 함께 한 식구들,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이 붙어 있는 안전모. 여기에 내 화이바 치우지 말라고, 한 번씩 내려와서 쓸 거니까 이거 없애지 말라고. 그랬더니 다음에 경주 내려오면 일주문 앞에서 입장료 내고 들어오라나 모라나. 그럼 나 이 안전모 가져갈 거라고, 그래서 여기 올 때면 일주문 아래부터 이거 쓰고 들어올 거라고.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정이 참 깊이 들었다. 정민이, 아니, 엊그제까지만 해도 정민쌤이라 부르던 연구원은 간다고, 며칠 전부터 삐져 있어. 가지말라고, 이 현장 끝날 때까지 자격증 장롱에 넣어놓고, 같이 있자고, 어린애처럼 삐쳐서는 계속 구박이야.

 

 

그러나 내 뒤를 이어 일할 분이 이미 내려와 있기도 해. 나보다 몇 해 일찍 청도한옥학교에서 일을 배워 현장에서 목수로 뛰며 기술자 공부를 하고 계신 분.

 

 형님들하고도 한 팡씩.

 동희 형님이랑은 폼을 잡고,

 

 큰 형님이랑은 잠바 등짝 인증.  

 

 그렇게 마지막 근무를 마치고 내려가던 퇴근길, 눈이 펑펑 내려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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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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