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굴

굴 속의 시간 2016. 1. 31. 07:20

 

 

 0.

 

 <굴 속의 시간>이라 이름 붙인  이 카테고리는 더 열어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이천십년 그 때, 문화재보수기술자 시험을 준비하던 수험생의 시간,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간을 견디어내자며 굴 속으로 드는 마음이라 하였던. 삼 년으로 그 시간을 마치면서, 더는 이 카테고리는 다시 열 일이 없겠구나 싶었던. 그런데, 그러고 난 뒤 세 해가 지나고 나서 나는 또다시 <굴 속의 시간> 페이지를 열고 있다. 아무래도 나는 다시 또 굴 속으로 들고 있는 것만 같아. 그 당시엔 수험의 시간이 굴 속이었다면, 이제는 회사에 다니는 시간 자체가 내 생의 굴 속인 것만 같아.

 

 

 

 1.

 

 폭포 아래, 오전 내내 관람대 기둥 밑으로 들어가 오함마질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팔뚝이 딱딱, 다리가 후들후들. 비가 오는 속에서도 줄이 끊이지 않는 중국인 관광객들은 관람대 위에 서서, 폭포를 구경하는 것보다 발 밑에서 땀을 눈물처럼 닦아내며 함마질을 하는 사람을 더 신기한 듯 구경하는 것만 같아. 다시 잡부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점심을 먹고는 시내 호텔 현장으로 자갈을 얻으러 가 마대에 자갈을 부었다. 역시나 거기에서도 변함없는 잡부의 포쓰. 하지만 그랬던 오늘은, 지난 두 주일 동안 그 마음 고생들에 대면, 차라리 행복했다. 아무래도 나는 잡부가 체질인지. 엑셀 내역을 따지고, 그걸 들고 감독부서로 쫓아다니며 증명하고, 해명하고, 근거를 만들고, 그런 기 싸움보다야, 그런 속앓이 할 것 없이 땀이 나면 훔치고, 알이 잡히면 주물러 풀어주면 그만인, 그런 거.

 

 

2.

 

 감자를 보고 있는 달래를 보며, 엄마는 낮은 소리로 내게 말을 하곤 한다.

 

  - 감자가 울지도 않고, 고집피우지도 않고, 착한 게 다 *선이가 잘 해서 그런 거다. 저렇게 다 들어주고, 응해주고, 행복하게 해주니 안 되는 거 해달라는 거에도 그걸 혼내지도 않으면서 잘 달래지.  어쩌면 저렇게 아기를 잘 봐주니. *선이가 일등 엄마야.

 

 엄마가 했던 그 말을 달래에게 전하면, 달래는 이래. 

 

 - 어머님이 살림을 다 해주시니까, 내가 감자만 볼 수 있어 그런 거지. 그렇질 않으면 이렇게 못해. 화내고, 혼내고, 못하게 하고, 그러느라 짜증부터 내게 될 거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엄마도, 달래도, 감자도.

 나만 굴 속에서 잘 버티면 되는 일.

 

 

 

3.

 

 품자는 이제 삼십오 주가 되었다. 달래는 감자 때보다 배가 너무 불러 자면서도 힘겨워해. 누워서도, 앉아서도. 감자 때는 출산 직전에도 이렇게나 배가 부르질 않았는데, 지금은 얼마나 배가 불렀는지. 그러면서도 감자와 마주하며 놀아주는 동안에는 내내 행복한 얼굴. 아빠가 퇴근하고 돌아와 엄마가 하던 그 역할을 받아서 해주면 좋으련만, 솔직히 그러질 못했다. 가슴은 너덜너덜했고, 집에 와서도 일이 걱정되어 넋을 놓곤 했어. 그러곤 날마다 술을 취해서야 잠에 들어. 달래야 미안, 감자야 미안해.

 

 

 

4.

 

 이제는 정말 다섯 주밖엘 남지 않았네. 달래가 새벽에 깨어 걱정을 한다. 내가 너무 힘들어하면, 감자가 안 봤으면 좋겠다고, 게다가 감자를 낳을 때 서른아홉 시간의 진통이 있던 것처럼, 품자가 문을 열고 나오는 시간이 길어지면 감자가 그런 엄마 모습을 어떻게 지켜볼까. 동생이 나을 때 언니나 형아가 함께 하는 게 좋다고, 그래서 품자가 나올 땐 엄마랑 아빠, 감자 셋이서 한 방에서 그 시간을 보내자고 막연히 생각하곤 했건만, 막상 날짜가 임박해오니 구체적으로 다가오는가 보았다. 어젯 밤에는 이런 말도 했던 거 같아.

 

 - 감자 때는 이러지 않았던 거 같아. 오빠가 날 위해주고, 함께 걱정해주는 게 많이 느껴졌는데, 지금은 그런 게 잘 느껴지질 않아.

 

 나는 그러지 않은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긴 뭘. 나는 이 굴 속에서 허덕이고 있는 나 힘든 것만 어쩔 줄 몰라하며 지냈겠지. 힘들어 봐서 안다. 힘들면 더 외로운 법. 달래는 외로웠나 보다. 들어가자마자 터져버린 회사 일로 한숨만 푹푹 쉬며 눈물을 감추는 내 앞에서, 힘들단 말도, 외롭단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그런 달래에게 나는 오히려 내 힘든 것만 말을 했고, 내 외로움을 알아달란 말이나 하고 그랬으니.

 

  

 

5.

 

 이상하게 눈이 침침하더니, 앞이 잘 안보인다 하신다. 안과엘 한 번 가보자고 하여도, 처음에는 그냥 두고보고 싶으신지, 예전에 백내장이 약하게 진행된단 진찰을 받았다며, 지나가는 말처럼 그 얘길 해. 그러더니 닷새가 되던 날엔 병원에 좀 데려가 달라고.

 

 - 진찰받고 나왔는데, 백내장은 아니래. 그런데 한 쪽 눈 신경이 마비되었다면서 큰 병원으로 가봐야 하는 거래. 여기 간호사가 쪽지를 써주었는데, 제주대 병원 신경외과 OOO 선생님한테 예약을 하라면서.

 

 감독부서에서 날벼락 같은 공문이 내려와 정신없이 서귀포로 내려가던 길이었다. 어떻게 하지? 엄마, 그럼 거기 잠깐만 있어봐요. 내가 전화걸어 예약을 할게. 으응, 엄마, 오늘은 안 되고 다음 주 화요일에 예약을 해주었어. 내가 지금은 엄마 데리러 갈 수가 없거든. 엄마, 그냥 택시타고 들어갈래? 아니면, 한라병원 앞까지만 가면 집에 가는 버스가 있다는데…….

 

 엄마는 신호등이 둘로 보였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돌아올 때는 계단이 여러 개로 겹쳐서 보여 넘어질 뻔 했다고. 그 정도인 줄도 모르고, 버스를 운운했으니. 제주 시내 길도 잘 모르는 엄마에게, 어디를 찾아가 어디에서 버스를 타라 했으니. 

 

 거울을 봐도 얼굴이 잘 보이질 않는다 하신다. 나 얼굴 좀 봐줄래? 거울로 보이지 않는데, 얼굴에 오돌도돌 두드러기 같은 게 나있는 거 같애. 이젠 글씨가 보이질 않아 경전을 읽을 수도 없네. 달력도 가물가물, 기범아 오늘이 무슨 요일이니. 

 

 아는 게 없으니 인터넷 검색창에다 시신경마비를 넣어보기만. 잘 낫지를 않는 거라는데, 어떡하지 엄마. 제발.  

 

 

 

 6.

 

 회사 일을 한다는 건, 아무래도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는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었기에, 이렇게나 견디질 못하는가 싶다가도, 그런데 말이지. 거기에 잘 적응하고 있는 내 모습, 그랬더라면, 아마 나는 더 견디지못했을 거란 것도 안다. 먹통 엉아를 따라 목수학교엘 가고, 대패를 당기고, 끌질을 배우고, 들보를 끼워맞추고, 끌밥 대팻밥 나무밥 냄새에 행복해했던 건, 이런 일을 하고싶어서가 아니었는데. 나는 어쩌다가 이 자리에서 이러고 있는 걸까.

 

 

 

 7.

 

 꿈을 꾸었다.

 

 - 눈이 반짝이던 새앙쥐, 감자의 신발 한짝, 양말 한짝, 블럭 하나, 젖병 하나, 하나하나 감자 물건이 없어지고 있던. 그러다 어느 구석 가림막 뒤를 보니 그 새앙쥐가 그것들을 하나씩 물어다가 기막히게 예쁜 마을을 짓고 있었어. 꿈 속이어지만, 그걸 보며 와아아, 동화구나, 동화나라야. 그러면서 행복해하던 내 모습이, 그 마음이 얼마나 또렷이 떠오르는지.

 

 꿈이 말해주는 메세지를 잘 들어야 한다고, 시와가 가끔 꿈 강의를 보내주곤 했다. 아직 1편밖에 들어보진 못했지만, 그리고 언젠가 그 메세지를 듣는 법에 대한, 그건 자기 자신만이 해석할 수 있는 거라며, 자신의 꿈을 들어 얘기해주던 걸 떠올리니, 이 꿈이 내게 주는 말이 무언지 알 것도 같아. 새앙쥐, 어느 구석 가림막, 그 뒤에 숨어 있는 동화의 세상. 

 

 

 

 

8.  

 

 마지막은 감자 사진 ^ ^ 할머니가 두드리는 안마기를 가지고 저도 두드리겠다고, 엄마를 두드려주고, 아빠도 두드려주고.

 

 

 

 낮은산 아저씨가 그러네. 감자가 아빠 마음 펴주느라 고생이래. 밤늦게까지 감자가 야근한다며 ㅎㅎ

 

 

 

9.

 

 고맙다, 감자야.

 고마워, 달래.

 고마워요, 엄마.

 

 나도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우리 품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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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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