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굴 속의 시간 2012. 12. 2. 09:27

 

1. 

 마치고 돌아왔다. 더 할 수 있던 말들, 미처 다하지 못한 얘기들에 아쉬움이 남는 것은 누구라도 그러할 것이다. 나는 왜 그리도 순발력이 모자란지. 그 짧은 시간에 그동안 숭례문에서, 석가탑에서 쏟았던 땀과, 지난 한 해동안 목구멍 밑으로 억지로 눌러 삼키며 견뎠던 그 시간들을 충분히 다 말하지는 못했다. 나는 여느 때처럼 버벅거렸으며, 그 때마다 내 눈동자는 불안에 흔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나 스스로 그렇다는 것을 느낄수록 내 목소리는 빨라졌고, 순서없이 떠오르는 것들을 이어붙이느라 바빴다. 아, 종남이 형이 보내온 문자 - 씩씩하게 들이박을 것! - 그것을 오분만 일찍 보고 들어갔더라면 나는 좀 더 씩씩하게 들이박을 수 있었을까. 

 

 2.

 공덕동에서 나와 숭례문엘 들렀다. 철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경비실장님이 알아보질 못하고 어디서 봤더라, 하며 기억을 더듬으신다. 그 모습이 재미나 성곽에서 일하던, 이라고 말씀을 드리니 그제서야 환한 웃음을. 그럴 수밖에. 나는 양복에 셔츠, 넥타이를 매고 그 문 앞에 서 있던 것이다. 그 뜨겁던 여름, 경비실장님과 나는 날마다 세면장에서 알몸으로 씻으며 퇴근 인사를  하던 사이였다.

 숭레문은 벌써 덧집을 반 가까이 철거했고, 이제 막바지, 준공을 준비하고 있다. 널찍했던 가설 사무실도 이미 다 해체했고, 그 안에서 일하던 직원들은 현장 한 켠으로 길게 이어붙인 컨테이너에서 작업들을 하고 있었다. 석가탑으로 일을 하러 내려온 뒤로는 처음으로 다시 찾은 현장, 김의중 소장님부터 찬종이와 성주임까지. 다들 반가운 얼굴. 현판을 걸었다 해서, 이곳 직원들도 기념 사진을 찍겠다며 문루 위로 올라갔다. 이럴 땐 다들 아이같다. 찬종이가, 성주임이, 잡아끌며 사진이 제일 잘 나오는 자리라며 달래와 나를 앉혀주었다. 찰칵.

 

 3.

 식구들, 더 말해 무엇하랴. 나보다도 더 마음 졸이던 이 노친네들을.

 

 4.

 찌질이들. 작년 시험을 마치고도 이 찌질이들과 같이 빈대떡에 막걸리를 했더랬다. 꼭 일년이 지나 그 넷이서 짬뽕에 소주를 마셨다. 여느 때 같으면야 날을 넘겨술을 펐겠지만, 나는 영월을 찍고, 바로 다시 경주로 일을 하러 내려가야 했어. 이 찌질이들이 부어주는 잔을 받아 마시며, 그러나, 나는 행복하다는 걸.

 

 5.

 굴을 파고 들어가면서 예정했던 삼 년, 올 해가 그 삼 년째. 올 해도 문턱을 넘지 못하면, 과연 나는 깨끗하게 그 미련, 아쉬움을 털어낼 수 있을까, 그래도 되는 걸까, 지금껏 해온 것들, 놓아버릴 수 있을까. 그러기에는 정말 굳고 단단한 마음이 필요하다는 걸 안다. 간발의 차이일수록 놓기가 더 쉽지 않다는 것을. 그러나, 마음을 굳힌 건 지난 달. 사잇골에서, 잔치가 있던 날, 그 툇마루, 종숙이와 한 약속. 그리고 순녀와 병순네의 구들방. 잔치에서 돌아오는 길,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마음의 평화로움을 느꼈고 달래에게 얘기했다. 이번, 아니면은 나는 그만 할 거라고. 고맙게도 달래는 언제나처럼 밝게 웃으며 오빠가 좋으면 그렇게 하라고, 오빠가 하고싶은대로 하는 게 그게 저도 좋다고. 이미 그때 나는 결과에 대한 부담같은 것은 다 내려놓았다. 그러나 물론, 그게 무슨 포기이거나 될대로 되라, 같은 것은 아니, 이번까지, 마지막까지는 온 힘을 다하고 난 뒤.

 

 6.

 이번 면접의 결과가 어떻든간에, 나는 앞으로도 즐겁게 이 일을 할 것이다. 당분간은 석가탑, 그 뒤에는 또 어느 현장. 말하자면 이때껏처럼 시험에 아득바득 목을 매거나 하지는 않을 거라는 거. 나름껏 즐겁고 행복하게 일을 하다가 해마다 한 번씩 시험을 보러 가거나 할 수야 있겠지. 애초 내가 하고 싶던 것은 어떤 자격이나 증명을 얻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 일을 자신있고 즐겁게 하고 싶은 거였으니. 그러기에 나 스스로에게 모자람이 많으니 시험이라는 어떤 관문을 설정했을 뿐. 그동안 공부했던 것이, 시험을 위한 것이기는 했으나, 그러나 그것들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귀한 공부들이었다. 올 한 해는 석장님 밑에서 일을 하며 나무 만지는 것 뿐 아니라 돌을 만지는 것 또한 배울 수가 있었다. 건축이란 양식이고 구조를 떠나 그 모든 것의 처음이 나무와 돌, 흙에서  출발하는 것이었다. 그것들을 아는 것이 모든 것의 맨 처음. 

 

 7. 

 시험을 보고나면 가장 하고 싶었던 거는 술을 왕창 마시는 것도 아니었고, 간절히 보고싶은 누군가를 찾아나서는 것도 아니. 그저 몇날며칠 죽은 듯 실컷 잠이나 자고싶다는 생각밖엔. 그동안 석가탑에서 일을 하며 고시원에서 지내는 동안, 하루도 불을 끄고 잠들질 못했다. 두어 시간 눈을 붙이려는데, 불을 끄고 잠들어서는 깨어나질 못할까봐, 불을 켠 채로 매일 새벽밤을 그렇게. 그런데 어젯밤 돌아와 잠을 자는데도, 습관처럼 새벽에 눈이 떠져. 그렇다고 잠을 더 자지 못해 아쉽거나 하지는 않는다. 몸이 너무나 가벼워. 이제 다시 경주로 내려갈 준비, 작업복과 속옷, 양말, 그리고 깨끗한 새 노트 한 권.

 

 8. 

 경주에서 일하는 거 보고 싶다고들 했지? 그때마다 내가 아직은 오지 말라고 그랬을 거야. 그런데 이제 됐으니, 아무 때나 내려오면 돼. 아마도, 무척이나 반가울 거야.

 

 9.

 일하는 거는 보통 어둡기 전에 마치곤 하는데, 아주 어쩌다가 저렇게 어둔 뒤에도 불을 켜고 일을 할 때가 있어. 저 날도 조금 늦게까지 일을 하던 날, 잠깐 해우소엘 다녀오는데, 덧집 바깥에서 보니까 저 안에만 환한 것이, 멋져 보이는 것 같아서

  

10.

 이거는 현장 컨테이너 사무실에서. 아하하 저 앞에서 인증샷을 찍자고 해서 *희 형님이랑 돌아가면서 한 캇또씩 팡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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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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