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네 시

굴 속의 시간 2011. 9. 15. 05:54

0.

으하하. 엄마가 다시 내려왔어.이번엔 시험칠 때까지있다 오기로 했다며 형네 집에서휴가를 받아 내려왔다.진작부터 내려와 밥이라도 해주고 있고 싶으다는 거를,그러질 못해 내내 애만 태우더니,드뎌내려올 수 있게 된 것. 나야 겉으로는, 괜찮아, 엄마, 에이, 뭐어, 잘 해 먹는다, 괜찮다,그러기야 했지만 속으로는만세만세만만세,무키무키만만수!그리하여 나는다시 도련님, 왕잔님이되얐다.

1.

여름 며칠을 다녀갈 때처럼 엄마는새벽 세 시면절에 가는 걸로 하루를 시작, 그 때야 내가 그 시간까지 밤을 새우다절엘 모셔다 드리고 오곤 했지만,아무래도이젠 시간을 그리 맞출 수는 없을 것 같아,엄마와 함께 내 시간표도 싹 바꿔. 엄마 절에 가는 시간을 한 시간만 늦추어 달래고는, 아예 나도 네 시부터 하루를 시작. 그 때 깨어 엄마를 절에 데려다주고는, 그 시간에 바로 줄넘기를 시작. 이제까지야 해저문 밤에 나가운동을 하고 들어왔지만, 아예 그것부터 새벽으로 바꿔.

2.

그러기를 이제 사흘째. 그래야지 하고서도, 그게 과연 될까 싶었는데, 어찌어찌 되고 있는 게 신기하다. 세상에나, 내가 이렇게 아침형 인간이 될 수 있다니. 그것도 그냥 아침이 아니라 꼭두새벽형 인간이. 오죽하면 나는 그게 되지가 않아 신문배달을 하던 때에도 밤을 꼬박 새우고 새벽에 나가면 나갔지, 미리 일찍 잠을 자둔다거나 하는 일은 상상도 못하던 일이었다. 그게 아니라 목수 일을 하거나 할 때면 저녁마다 술을 먹어 피곤한 몸 잠자리에 들게 할 수 있었던 거.

3.

그러니 낮에는 정신을 못차리기도 한다. 집에 들어와 엄마, 밥! 점심밥을 먹고 다시 도서관에 나가 앉으면 그 때부턴 수술실 앞 전신마취라도 당한 것처럼 정신이 혼미, 풀린 눈으로 휘청휘청, 손으로는 알아먹지 못할 외계어를 그려대곤 하는 것이다. 그르다가 더 버틸 수 없겠으면, 열람실 책상 위에 그대로 철푸덕. 어제도 그랬고나. 철푸덕, 하고는 한 시간을 기절했다 일어났네. 요럴 거를 알았는지, 지난 번 다녀간 바느질 소녀들이, 도서관에서 엎드려 잘 때 받치라고 조그만 이마받이 베개를 만들어주고 갔는데, 그거슬 아주 잘 써먹게 된 것이다.

4.

엄마도 이 식모살이가 나쁘지 않은 모양이다.밥 먹을 때 잠깐, 들어와 씻고 앉을 때 잠깐, 씩이기는 하지만 얘기라도 하고, 얘기라도 듣고, 했던 얘기라도 또 하고, 들었던 거라도 또 듣고, 오래되어 소식 멀어진 이들 얘기도 했다가, 엄마 주변 동네 아줌마들 얘기도 했다가, 안타까운 얘기도 했다가,잘 되어 흐뭇한 얘기도 했다가.

5.

고기를 끊었다니 해 줄 거가 없네, 했지만 거참 신기하다."엄마, 밥!" 전화를 걸어놓고 도서관에서 뛰어 들어오면 듣도보도 못한 것들이상에 올려져 있다. 이거 이름이 뭐야? 이건 뭐 넣고 했어?이건 또 처음 보는거네. 아, 많이 먹으면 안 되는데, 많이 먹으면 가서 또 졸린데, 그러면서도쫌만 더 줘라, 한 숟갈 더 먹어야겠다, 안 되겠다, 배는 부르면 안 되겠고, 잘 됐다, 여기 도서관엔 매점 하나 없어서 두어 시간 지나면 속이 허전하고 그랬는데, 이것 좀 싸줘, 출출해지면 먹어야지ㅎㅎㅎ 하여간 신기하다. 이거 이름이 뭐야, 물으면 엄마도 모른단다. 이름이 어딨어, 그냥 해본 거지.고기, 생선 그런 거 없이 하려니그냥 궁리하여 이것도 데쳤다가 저것도 볶았다가,메밀가루도 부쳤다가, 이거랑 저거랑 조물락조물락.

6.

그래도 어젯밤엔 열두 시 되기 전에 잠이 들었다. 이틀 동안은 새벽 두세 시에 겨우 잠들었다가 억지로 한두 시간만에 일어나 버티느라 낮동안 그리 마취상태에서 삐리리 했는데, 한 이틀을 그렇게라도 억지로 버텨줬더니어젯밤엔 뒤척임 없이 푹 잤다. 그러니 오늘은 좀 낫겠지. 움화화, 아침형 인간의 탄생 ^^v 깜깜한 새벽길로 나서 엄마를 절에 데려다주는 길도 기분이 좋아, 그리고그 길로 호숫가에서 뛰다 들어오는 데도아직 새벽이걷히질 않았다.

7.

아직 어둠이 짙은 새벽, 금천을 건너는 다리 앞까지 데려다주고,일주문을 지나는 엄마 뒷모습을 보다보면, 어서 이걸 마쳤으면 하는중요한 이유 하나가 더 생기는 것도 같아. 그러나,그렇다한들, 당신의 기도가 그것으로 그치기야 하겠냐만은. 무언가 또 다른 발원을세우고, 그것을 향해 간절히 몸 굽히기를 멈추지 않으시겠지. 그러나 책상에앉아 딴 마음이 들거나 할 때면일주문을 지나 들어가는 그 뒷모습이 잡아주곤 해.

8.

아,새아침!(엄마, 빨리 와. 배고푸다 ㅎㅎㅎ)

'굴 속의 시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디  (4) 2011.11.21
금몽암  (4) 2011.11.12
질문  (2) 2011.07.17
자폐  (12) 2011.05.18
  (7) 2011.03.30
Posted by 냉이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