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나이 마흔이 다 되어 수험생 노릇을 시작하고 있자니 칠순이 다된 엄마가 수험생 뒷바라지를 하느라 고생이다.이번 명절에는 못 올라가겠다 기별을 드리니 보따리를 바리바리짊어지고엄마가 내려왔다. 그래도 옆에 엄마가 있으니까 좋아. 떡국을 먹었다. 부엌이 한 바탕 뒤집어졌고, 집안이 번쩍번쩍해졌다.

요즘은 사찰 건물을 공부하고 있느라 자연 절에 대해서도, 불교에 대해서도 알아가야 할 것들이 적지 않은데 그러다보니예전에는 귀찮아 듣지 않던 엄마 절 다니는 얘기에도 좀 더 귀기울여듣게 된다. 게다가귀동냥으로 얻어들은 얘기를 한두마디 대꾸하기라도 하면 엄마는 신기하다는듯쳐다보기까지 한다.

은해사 영산전 거조암.솔직히 이 공부에서 다루는사찰 건축물이면 나름 이름난 고찰들이어서 지나가면서라도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것들이 대부분인데, 나는 은해사라는 절은귀에 익지가 않았다. 어디에 있는지 하는 것도 전혀 몰라. 그래서엄마한테 물었더니 벌써 다녀왔다며 얘기를 들려준다. 나는 또 그게 신기해서건축사에 나와 있는 절들을 하나하나 들어 여기는? 여기도 가봤어? 여기도? 하는데엄마는두어 곳 빼고 다 다녀왔다 한다.벌써 수십 년을 절에 다녔으니, 해마다 한두 번씩 관광버스를 타고 떠나는 옛절 순례 같은 것만으로도한 번쯤은 다 다녀온 모양이다. 하지만 건물 모양에 대해서는 별로 기억나는 게 없으시다고. 들어가 백팔배에, 천배, 삼천배씩 하면서 기도하느라 바빴지 구경할 새는 없었다는데…. 글쎄, 시간을 맞출 수 있다면 앞으로는 엄마랑 같이 답사를 다녀도 재미있겠다 싶었다. 엄마는 들어가기도하고, 나는 그동안 그곳 건물들 하나하나뜯어 살피고 그러면서. 혼자 이런 생각만으로도풋하고웃음이 나는 것이다.

아무튼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이라는 곳은 내가 뭘 몰라 그렇지국보 14호로 지정된 건축물이며 그 사찰 안에는 보물만 해도 여럿이 있는중요한 문화유산이었다. 경북 영천에 있다는 그곳으로 일단 사진과 자료들만으로라도 고고씽! (여기에 옮겨놓은 도면과 흑백사진들은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 검색하여 문화재연구소에 오른 자료를 따온 것이며컬러사진들은 어느 블로그에서, 축소모형을 찍은 것은 지난 번 고건축박물관에 다녀오면서 직접 찍은 것들이다.)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의 전경이다. 위에 있는 사진이 남동쪽의 정면과 측면을, 아래 있는 사진이 북서쪽의 뒷면과 측면을담아 보여준다. 보다시피 이 건물은 정면이 일곱칸이나 되어 옆으로 무척 긴 맞배지붕 양식이다.짓기로는 고려 우왕 1375년이라 하는데 조선초기에 한 번 수리를 해 고려말과 조선초 주심포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하겠다. 이를테면 입면 구성 방식이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인 판문과 살창을 이었는데, 가운데 있는 삼분합문은 조선시대 때 바꾸었을 거라 보고 있다.

정면의 모습을 도면으로 그린 정면도. 보다시피 양쪽의 퇴칸과 협퇴칸에는 세로살창이 있고, 어협칸은 벽으로 미장, 어칸 가운데에 삼분합문이 있다. 그리고 이 도면에서는 잘 나타나 있지 않지만 마치 부석사 무량수전에서처럼 기둥 위의 공포와 공포 사이, 말하자면 다포의 간포 자리에 쪽소로를 붙여 놓았다. 그리고 역시 고려시대 주심포 건물답게 배흘림 기둥으로 되어 있다.

전면이 일곱 칸이니 <퇴칸 - 협퇴칸 - 어협칸 - 어칸 - 어협칸 - 협퇴칸 - 퇴칸>으로 된 것이라 하면 가운데 어칸에는 문이 있고, 양쪽의 퇴칸과 협퇴칸마다 창이 나 있다. (어협칸은 벽으로 막혀 있음) 아마도 이것은 건물이 길기 때문에 어두워지는 쪽으로 창을 낸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글쎄, 그런데쪽소로가 붙어 있는 모습은아무리 인터넷에서 사진을 뒤져봐도 아직 찾지를 못했다. 건물 정면에서 찍은 것들은 처마에 가려지기 마련이었고, 굳이 찍자면 처마 밑으로 들어가 올려 찍어야 했을 텐데, 기둥 위의 공포 사진은 많아도 쪽소로를 보여주는 건 찾을 수가 없어. 언제 답사라도 가게 된다면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은 것.


종단면도들이다. 그런데 왜 그림이 둘인가 하면 하나는 어칸의 가운데에서 단면을 싹둑 잘랐을 때의 그림이고,밑에 있는 것은협칸이나 퇴칸 어느 곳을 싹둑했을 때 보이는 그림이다. 두 그림의차이는 한 군데 밖에 없다. 어칸에불단 자리가 한단 높에 올라 있는 것이 표현되었는가 아닌가일 뿐. 그러니까 위의 그림에서는 어칸을 싹둑,바닥을 한 단 높인 불단을 표현해 준 것이고협칸이나 퇴칸에는 그것이 없으니 평바닥 그대로 그려놓은 것이다.(아, 하나 더 발견! 그건 조금 뒤 밑에다가 다시 메모.)

전돌바닥에 마루를 한 칸 올려 불단을 만든 모습이다. 일곱 칸의 긴 건물의 가운데 있는 어칸 부분.

이 사진은 종단면이라고 하기에는 외부기둥 사이에 있는 창방이 거슬리고, 측면부라고 하기에는 벽체나 문 같은 것이 없어 늘 어느 자리에 놓고 얘기하는 게 좋을지 애매하다. (그래도 직접 찍어온 사진인데 버리기는 아깝고. ^ ^;) 아무튼 이 사진으로 보이는 정면(건물의 측면) 모습에서 창방만 빼면 종단면도의 그림과 같은 모습이다. (저 너머에 내팽개쳐진 내 가방도 빼고. ㅠㅠ) 오량가 건물이라는 거, 전후대칭으로 되어 있다는 거, 솟을합장을 사용한다는 거, 대들보가 하나로 가로지르는 게 아니라 툇보를 쓰고 있다는 거, 천정 가설을 하지 않은 연등천정 형식이라는 거… 이런 거는 이제 따로 설명없이 확인만 하고 지나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이 건물은 정면에서 봤을 때 좌우로는 길게 나가지만 측변에서 봤을 때, 지금 보고 있는 종단면으로는 그리 크지 않은 오량가의 건물이다. 그런데도 이 건물은 대들보를 하나로 쭉 이어서 쓰지를 않고 어칸과 협칸들을 나누어 대들보와 툇보로 따로 나누어 썼다는 건 기억할만 하겠다. 봉정사 극락전은 칠량가 건물이었는데도 하나의 대들보(측면에서는 어미기둥이 있어 어쩔 수 없이 맞보)로 지붕 상부구조를 받고 있는데, 얘는 조그만 애인데도 툇보를 따로 썼으니 말이다. 지금껏 오량가 건물은 강릉 객사문과 부석사 조사당이 있었다. 그 둘은 모두 작은 건물에 걸맞게 대들보 하나로 앞뒤 기둥 위에 올라 있었다. 게다가 칠량가인 봉정사 극락전까지. 그에 반해 대들보와 양쪽의 툇보를 쓴 건물은 9량가 건물인 부석사 무량수전과 수덕사 대웅전. 그런데 이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은 쬐만한 오량가 건물이면서도 툇보를 따로 두었다는 거.

종단면 그림을 두 개 옮겨다 놓으면서 그 둘의 차이점이 어칸 바닥에 불단이 한 단 높여진 것만을 확인했었다. 그러다 이제서야 다시 찾아낸 것인데, 두 도면의 차이, 그러니까 어칸과 나머지 칸들과의 차이는 바닥에서 보이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어칸에서는 내진고주들 사이로 보방향의 창방이 있는데, 협칸과 퇴칸에서는 그것이 없질 않은가? 깜빡 잊고 그냥 지나갈 뻔 했다. 도리방향으로는 내진고주들이 모두 창방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보 방향으로는 어칸의 양쪽에만 창방이 지나간다. 그것은 어칸을 불단으로 꾸민 것과도 이어서 생각할 수 있겠는데 뭔가 다른 칸과 차별을 두기 위한, 공간의 위계에 차등을 둬서 불단이 있는 곳을 좀 더 위엄있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내부 공간에서 찍은 사진이다. 측면부가 한 칸 건너 보이니 협퇴칸에서 찍은 사진일 것이다. 그러니 이 사진에서는 내진고주들 사이에도 보방향으로는 창방이 없다. 그런데 이 사진을 옮겨온 것은 그것을 확인코자 하는 거라기 보다는 종도리 밑의 대공과 그것을 받치는 대들보를 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무언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종도리를 대공으로 받고 있다면 그 대공은 종보 위에 있는 것이 일반적일 텐데, 종보가 대들보 위에 올라서 있다니? 그렇다, 이 건물은 종도리와 대들보 사이에 종보가 없다. 종도리를 받는 대공이 대들보 위에 바로 서고 있다. 거참 여러 모로 남다르다. 오량가에서는 잘 쓰지 않는 툇보는 쓰더니, 당연히 있어야 할 것 같은 종보는 없다. 그래서 이 건물은 대공이 다른 건물에 있는 것에 견줘 많이 길다. 보기에도 뭔가 불안하게 느껴지고, 구조적으로는 약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건물은 매우 길쭉한 일곱칸 집이질 않았던가? 그러니 옆으로 넘어갈 위험은 덜하다 할 수 있었을 것이고, 종보 없는 불안한 구조여도 지금껏 건재하게 서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어림잡아도 칠백 년 가까운 세월을 버텨온 건물이니 말이다.

대공을 크게 찍은 사진인데, 이곳에 쓰인 대공에 대한 설명을 할 때 우리 교재와 교수님은 판대공이라 했고, 내가 자료사진을 퍼온 블로거는 포대공이라고 적어두고 있었다. 그래서 왜 또 이렇게 말이 다른가 하면서 단면에 보여지는 것이나, 조금 멀리서 찍은 사진만을 보며 판대공이 맞겠다 하고 넘어가려 했는데 이 사진을 보니 뭔가 다시 끄덕여진다. 좁은 사다리꼴 형태의 대공은 분명 판대공이지만, 그것이 종도리와 종장혀를 직접 받고 있지 않고 다시 십자결구를 가진 뒤에 종도리, 종장혀를 받고 있다. 그러니까 좁은 사다리꼴의 판대공 위에 한 번 더 포가 짜여지면서 도리부를 받기 때문에 이 역시 포대공이라고도 말을 할 수 있겠구나 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판대공과 포대공이 혼용으로 사용되었달까?

마침 문화재청에서 다운받은 자료에는 포대공의 도면도 들어 있었다. 솟을합장을 바라보는 면에서 볼 때는 뭔가 아리까리 했는데, 그것과 수직의 자리에서 대들보의 단면이 보이는 쪽으로 보니 판대공 위에 포가 짜여 있는 것이 확실하게 보인다. 그 위로 뜬장혀가 한 번 지나고, 소로를 놓고 종도리와 종장혀가 지나는 모습으로 말이다. 아우, 이거 뭐 대공을 볼 때마다 매번 이렇게 애를 먹어야 하니 원, 어쨌든 이렇게 해결하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하다.

건물이 워낙길어 횡단면도도 잘렸다. 하지만 좌우대칭으로 되어 있으니 반 정도만 보더라도 반대쪽은 어떤 모습일지 충분히 알아볼 수 있겠다. 고려시대 건물답게 여기에 쓰인 대들보, 혹은 툇보들은(툇보는 그림에 나타나 있지 않음. 툇보가 보이려면 좀 더 앞이나 뒤에서 싹둑 잘랐어야 함.) 그 단면이 역항아리 모양이다. 그리고 이 건물에서도 외목도리를 받치는 장혀는 단장혀를 사용했다. (그러니 여태 본 건물들 가운데 단장혀를 쓰지 않은 것은 부석사 조사당 뿐.) 그 정도는 이제 어느정도 일반적인 얘기라 할 수 있을 테고, 이 건물에서 주의깊게 보아야 할 부분은 퇴칸 바깥으로 도리방향 부재의 뺄목들이다. 마치 수덕사 대웅전의 보머리나 강릉 객사문의 보머리처럼 날렵하고 뾰족하게 조각된 모습이 보이고 있다. 보통 도리방향으로 나가는 부재들, 인방재나 장혀재들의 뺄목이 측면부로 나갈 때는 빗면으로 깎거나 연화두형으로 처리하곤 했는데, 이 건물에서는 쇠서처럼 초각을 했다.

건축박물관에 갔을 때도 마침 이 내용이 기억나 그것을 확인하느라 측면부를 옆에서 빗겨보면서 찍은 사진이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저 안 쪽으로 중도리 밑에 있는 뜬장혀의 초각이 그나마 잘 보인다. 그리고 처음엔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사진의 윗부분에 크게 보이는 것은종장혀의초각이다.

이 사진을 보니 더 훤하게 잘 보인다. 종도리 밑에 있는 뜬장혀, 중도리들 밑에 있는 뜬장혀가 모두 끝이 날렵 뾰족하게 초각. 솟을합장의 모습과 유난히 길고 큰 대공의 모습도 한 눈에 보여진다. 기둥머리들을 잇고 있는 창방 위에 종보 없이 대들보 하나만 가로지르는 것까지도. 아, 그런데 측면으로 나가는 가로재에 초각이 되어 있는 것은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에서 아주 처음 보는 것만은 아니다. 강릉 객사문을 볼 때도 뜬장혀들이 이처럼 초각되어 있었다. 그리고 또한 지금 여기에서 보이는 모습은 뒤에 살펴볼 개목사 원통전에서도 아주 유사하게 볼 수 있다 하고 말이다.

아, 여기 가장 또렷하게 보이는 사진이 있구나. 주심도리와 외목도리가 보이는데, 외목도리 밑으로야 단장혀 뿐 뜬장혀라는 것이 지나가지 않으니 따로 장혀 끝의 쇠서랄 게 없지만 주심도리 밑의 뜬장혀는 그 끝이날카롭게 쇠서로 초각이 잘 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측면에서 봤을 때의 도면 그림과 사진이다. 아까 종단면도를 볼 때 벽체가 없는 축소모형의 측면 사진을 함께 봤던 것처럼 종단면의 기본 구성과 측면의 기본 구성은차이가 없다. 기둥 사이의 창방이나 창문을 두기 위한 부재들, 하인방 같은 것들이야건물의 외벽부이기 때문에 들어가는 거라 하면 기둥의 숫자도 같고, 대들보와 툇보의 쓰임, 대공과 솟을합장의 모양들은 내부 단면의 가구구조와 아주 똑같은 것이다. 이러한 점은 고려시대맞배 건물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했다.

그러나 이 건물에서는 흔히 맞배지붕 건물이라면 갖추게 되는 한 가지를 쓰지 않고 있다. 그것은 바로 맞배지붕 건물의 약점인 취약한 횡력을 보강해주기 위한 보강재인데,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에는 측면을 보강해줄만한 어미기둥이나 각기둥도 보이지 않고, 서까래를 받는 도리 가운데 어느 하나도 방형의 납도리가 없다. 지붕의 상부구조가 작기 때문에 그러했는지도 모르고, 아님 워낙 횡으로 길게 뻗은 건물이어서 횡방향으로 넘어갈 위험이 작아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건물처럼 맞배지붕 건물이면서 횡력에 대한 보강조치가 없는 다른 예는 부석사 조사당이 그러했다. 거기에도 측면에 따로 세운 기둥 같은 건 없었으며 방형의 도리도 쓰이지 않았다.

그림과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측면에는 살창과 광창을 두었는데 이것은 건물이 길다보니 내부가 어두워질 것을 우려해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정면에서 볼 때는 양쪽의 퇴칸과 쪽의 협퇴칸에 이와 같은 살창을 두었는데 그 역시 같은 까닭이었을 것이다. 봉정사 극락전도 원형 복원을 하기 전까지는 측면 상부에 이와 같은 광창이 있었는데, 그것은 복원을 하는 과정에서 원래 양식이 아니라 하여 떼어냈다 한다.

건물 뒤에서 본 모습이다. 일곱 칸으로 된 벽부 가운데 어칸의 뒷면에만 판장문 형태로 된 살창만 하나 있다. 어느 블로거(이곳에 올린 사진을 퍼온)가 써 놓은 것을 보니 여름철의 직사광선을 피하기 위한 목적일 가능성이있어 보인다 하는데 그럴 것도 같다.

평면의 형태는 옆으로 긴 장방형이다. 어칸에 표시한 부분은 불단으로 한 단을 높인 마루를 나타내는 것이라고는 알겠는데 그 양쪽으로 내진기둥들이 있는 곳들에 꺾인 디귿자 모양으로 표시된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르겠다. 저게 뭘까? 아, 나도 답을 갖지 못한 걸 수수께끼로 내도 되려나? 그래서 나도 배워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수수께끼! 더 내진기둥열의 꺾인 디귿자 모양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ㅠㅠ

계단은 어칸 앞 기단부에 하나만 설치되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건물에는 문이 어칸에 나 있는 것 하나 뿐이다. 생각난 김에 다른 건물들의 계단이 어떠했나 되짚어보면 봉정사 극락전에도 이와 같이 어칸 앞으로만 계단이 하나 있었고, 부석사 무량수전에는 양옆까지 하여 계단이 셋, 수덕사 대웅전에는 양 측면에만 계단이 있었다. 기단부가 높지 않은 강릉 객사문과 부석사 조사당에는 계단이 없었지.

공포도다. 우선 간단히 짚고 넘어갈 것들부터 짚고 지나가면 첨차들이 서로 밀착되어 있지 않고 수직 거리가 이격되어 있다. 첨차들의 밑면은 연화두형으로 초각이 되어 있고, 창방은 여전히 수장폭을 유지한다. 이 정도야 기본으로 짚을 수 있는 내용이겠고, 첨차들이 서로 밀착되어 있지 않다는 말에 조금 보충을 하자면 헛첨차의 뒷뿌리와 살미첨차의 뒷뿌리가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보아지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 그러니까 이 부분에서는 첨차들이 붙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수덕사 대웅전에서도 보았고, 아직 살피지 못한 개목사 원통전에서도 거의 유사하게 보여진다고 한다. 앞서 횡단면도를 볼 때 가로방향 부재들의 끝이 쇠서처럼 초각되었다 할 때도 개목사 원통전과 비슷하다더니, 살미첨차와 헛첨차의 뒤가 만나 보아지를 형성한다는 설명에도 개목사 원통전을 들어 얘기하고 있다. 갑자기 개목사 원통전이 무지하게 궁금해진다. 아무래도무언가 연결되는 지점이 있으니 자꾸만 이렇게 얘기를 해주는 것일 텐데.

헛첨차와 살미첨차의 뒷뿌리가 이어져 보아지를 형성하고 있는 모습, 고건축박물관에 있는 축소모형에서 사진기에 찍어뒀다.

이 역시 첨차들의 뒷뿌리가 보아지를 만들어 툇보를 받치고 있는 모습. 문화재청에서 다운받은 자료에 있는 사진이다. 이 비슷한 모습은 부석사 무량수전의 고주 옆에서도 보이는데, 그것은 처마내밀기와 전혀 상관이 없으므로 그것은 헛첨차라 볼 수 없고, 단순한 보아지일 뿐이다.

빨갛게 표시한 부분이 보아지, 헛첨차와 살미첨차의 뒷뿌리로 만드는 보아지와 비슷해 보이지만 이것은 첨차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축소 모형에서 공포부만을 크게 찍은 사진인데, 이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의 공포부에는 이 건물에만 쓰인 특징적인 것이 한 가지 있다. 이 건물 역시 헛첨차를 쓰고 있는 주심포인데, 이 건물에서는 이중헛첨차라 하여헛첨차 밑에 또 하나의 부재가 받치고 있다.그런데 그 둘 사이에 소로 같은 것을 따로 두거나 하지 않고 바로 밀착되게 하고 있어사진으로 볼 때는 잘 분간이 안 되기도 한다. 아, 그런데 이 사진을 보면 헛첨차 뒷뿌리와 살미첨차 뒷뿌리가 하나로 이어져 보아지를 형성하거나 하지 않는데, 그 까닭은사진으로 보이는 것이 측면에 있는 주심포이기 때문이다.이렇게 창방이 기둥머리를 이어주는 측면에서는 그 창방의 뺄목으로 헛첨차를 대신하니 말이다.그러니까 그 창방 두께의 뺄목으로 헛첨차 있는 것이고, 그 밑으로 더 비스듬이 있는 것은 헛첨차를 받치기 위해 따로 끼워넣은 부재인 것이다.

이 사진으로 봐도 그 둘이 따로따로인지 아니면 하나의 부재인데 나뭇결이 그렇게 갈라진 건지 또렷이 보이지는 않지만 어쨌든 도면을 통해 다시 확인을 해보면 이중헛첨차가 쓰였다는 걸 알 수 있다.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에서이처럼 이중헛첨차를 쓴 것은처마를 더 길게 내밀 수 있도록고안된 것으로 보여진다.헛첨차가 쓰인 다른 건물들, 수덕사 대웅전이나 강릉 객사문 들과 견줘보면 헛첨차가 더 길게 나갔다는 것이확연히 드러난다.이렇게 헛첨차를 길게냈으니 힘을 더 크게 받을 테고,헛첨차를 보강하기 위해 밑에 보강재를 하나 더 받쳐주게 된 것이다.

이 사진에서도 역시 헛첨차와 그 밑을 받쳐주는 보강재가 마치 하나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각기 다른 부재들을 하나처럼 붙게 한 것이다. 살미첨차의 쇠서가 보이고, 보머리는 날렵 뾰족이 아니라 마치 구름모양으로 둥글게 초각되어 있다. 이쯤에서 보아지 모양들을 다시 떠올려보면 봉정사 극락전과 부석사 조사당이 이분두, 부석사 무량수전은 갈고리 모양, 수덕사 대웅전과 강릉 객사문에서는 쇠서 모양이었다. 살미첨차의 초각을 보면 봉정사 극락전과 부석사 무량수전은 헛첨차를 쓰지 않았으니 살미첨차라는 것이 없었고, 수덕사 대웅전은 보머리와 비슷한 쇠서, 강릉 객사문은 일반적인 첨차처럼 빗각에 연화두형 초각, 부석사 조사당에서는 2단으로 사절.

주심포를 밑에서 올려보며 찍은 사진이다. 하나하나 짚어보면 주두 밑에서 헛첨차가 보강재와 함께 이중헛첨차로 나오고, 그 위로 주두에 가로방향 소첨차가 결구, 그 위로 도리방향의 뜬장혀와 보방향의 살미첨차가 십자로 결구되어 있다. 살미첨차의 출목 쪽에는 행공첨차와 보머리가 다시 십자결구를 하며,그 위로는 초방이라거나 하는 받침부재 없이 툇보 위에서 바로 외목도리와 장혀가 얹혀진다. 그리고 기둥열에서는 뜬장혀와 살미첨차가 결구된 위로 따로 대첨차는 놓이지 않은 채 승두라는 받침목만을 두고 주심도리와 장혀가 올라온다. 아쉽게도 이 사진으로는주심도리 쪽은 확인하기가 어렵지만 아래 있는 도면의 왼쪽 위에 있는 그림과 오른쪽 밑에 있는 공포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왼쪽 위의 도면을 다시 보면 주심도리 밑에 초각된 받침재를 확인할 수가 있는데, 그 승두라는 부재는 모양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봉정사 극락전에서도 쓰였고, 부석사 조사당에서도 쓰였다. 그러고보면다들 규모가그리 크지 않다는 공통점이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에서는 초방이 둘 겹쳐진 위로 주심도리가 놓였고, 수덕사 대웅전에서는 초방에 우미량이 겹쳐진 위로, 강릉 객사문에서도 초방에 우미량이 겹쳐진 위였다는 걸 생각하면 규모가비교적 큰 건물들에서는 받침재를 두 겹 놓고 주심도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왼쪽 아래에 있는 그림은 공포도라기보다는 고주위로 대들보가 결구되는 지점을 단면으로 그린 것이다. 그 그림 옆의 조그만 바둑판(혹은 고누판) 같은 것을 보면 굵게 표시한 내진고주를 말하는 것인데, 고주 가운데에서도 어칸의 고주를 말한다 할 수 있다.그 고주의 주두 밑으로는 창방이 뺄목을 내면서 나가게 되고, 주두 위에는 첨차가 십자결구한다. 그런데 보방향의 첨차는 그것 홀로 뒤뿌리를 보아지처럼 초각하여 대들보의 보아지 역할을 하게 되고, 그 위에서 뜬장혀와 함께초각된 대들보의 끝이 결구한다. 그 위로 승두를 놓고 장혀와 도리가 얹히는데, 이 때의 도리는 중도리가 되는 것이다. 중도리오른쪽으로 빗각으로 올라가는 것이 보이는데 그것은 솟을합장을 나타낸다 하겠다.

마침 박물관의 축소 모형에서 그 부분을 찍어놓은 것이 있다. 조금 전 보았던 도면이 이 사진 부분을 그대로 표현한 것인데, 이 사진과 그 도면과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여기에는 주두 밑으로 창방이 없고, 고주첨차라는 것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위의 도면은 어칸의 고주를 표현한 거기 때문에 보방향, 도리방향으로 창방이 다 내뻗고 있지만, 사진에 보이는 이 고주는 협칸이나 퇴칸에 있는 거기 때문에 보방향으로는 창방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리방향으로는 창방이 있기에 그것과 십자결구를 해주려고 보방향의 고주 첨차를 끼워넣은 것이다. 마치 봉정사 극락전에서 한쪽 방향 창방만 있어 그와 십자로 허두라 하는 가짜 창방머리를 끼웠듯 말이다. 아무튼 이 사진은 위에서 살핀 도면을 실물로 보여주면서 고주 위로 주두와 십자로 결구되는 첨차들, 그리고 보머리와 뜬장혀가 십자결구한 뒤에 승두(사진에 있는 스티커에는 '초방'이라 되어 있음)를 두고 중도리와 장혀를 받게 한다.

아참, 문화재청 자료에서 사진 하나를 더 퍼다 놓은 게 있는데 건물의 후면에 있는 공포도 사진이라 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건물들에서는 전면이나 후면이나 그 자체로 대칭이었고, 공포의 모습 또한 그러했다. 그런데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에서는 후면 주심포를 보니 한 가지가 다르게 눈에 띈다. 이중헛첨차도 똑같고, 보머리의 초각 모양도 똑같은데 단 하나, 살미첨차의 출목부분에 초각이 없다는 것이다. 하이고 참, 이건 또 뭐지? 솔직히 강의 시간에는 다뤄지지 않은 내용이고, 교재에도 이에 대해서는 별 설명이 없다. 혹시 살미첨차 끝이 부러져 있는 건 아닌가? 그렇게 보려 하면 그런 것만도 같고, 아님 아예 건물 뒷면에는 살미첨차 초각을 하지 않고 조성한 것인지, 도무지 진상파악이 되질 않는다. 가 보게 되면 눈으로 꼭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다.

주두와 소로의 공포도인데 굽받침도 없고, 내반곡도 없다. 부석사 조사당에 쓰인 것과 같은 양식.

휴우, 정리 끝. 아무튼 언젠가 되더라도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에 가게 되거들랑 미처 확인 못한 몇 가지 잊지 말고 눈으로 봐야할 것이 있다. 쪽소로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도면이나 사진에서도 못보고 지나왔으며 건물 내부에서 어칸이 아닌 내진기둥열에 꺾인 디귿자 모양으로 표시된 것이 무얼 뜻하려 한 것인지, 그리고 건물 후면의 주심포들에는 살미첨차들이 모두 쇠서없이 깎였는지를 말이다.

1266259911_은해사 거조암 영산전.hwp

이제부터는 건물 하나 정리하는데 두 시간 이상 들이지 말아야겠다 했는데도 또꼬박 여덟 시간이 넘게 걸렸다. 하다보면 그냥 지나쳐지지 않는 대목들이 있다. 큰일이다. 연휴동안 못다한 복습 과제들을 다 따라가야지 생각했는데, 반이 지나도록 건물 대여섯 개 겨우 살폈을 뿐이다. 이미 수업 시간에 다루고 지난 것이사오십 개는 될 텐데, 두 주일을 쉬어 가면서도 복습은 커녕… 으이그. 진도는 케이티엑스를 타고 달아나는데 따라가는 속도는 자전거 페달을 밟는 정도이니. 느리게 살자, 느리게 가자, 하는 말들을 떠올리며그냥 이 속도로 즐거이 가기만 해도 좋으련만 마음은 쫓기고 그만큼 따라가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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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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