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사 극락전

지금 정리해가고 있는 것들은 주심포 양식으로 지은 건물들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앞서 살핀 봉정사 극락전부터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강릉 객사문, 부석사 조사당,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들은 고려시대에 건립한, 고려시대의 양식 전형을 띄고 있는 것들이고, 이제 보려 하는 무위사 극락전은 조선시대에 지은 주심포 양식 건물이다. 조선시대로 넘어가면서 주심포 양식은 어떤 양식적 변화를 보이게 되는지, 혹은 고려시대 양식을 어떻게 계승하고 있는지 그 부분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겠다.

전남 강진에 있는 무위사 극락전, 어인 일인지 나는 여태 강진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그랬으니 무위사라는 절 또한 귀에도 가물가물, 머릿속에는 어떤 영상도 잡히지가 않는다. 이 건물을 공부하는 수업 시간, 강의를 하는 교수님은 꼭 한 번 쯤 가볼만한 곳이라 하면서도, 너무 멀리 있는데 막상 가보면 이 절 하나 뿐 그 둘레의 다른 답사지를 둘러볼 곳이 없어 선뜻 가기에 쉽지 않기는 하다고 했다. 아무래도 모자란 시간 가운데 칠팔십 곳의 답사지를 찾아다니며 둘러보려면 한 번 움직일 때 비슷한 권역의 건축물들을 일정 속에 묶어 둘러봐야만 할 텐데, 우리 건축 문화재 가운데에서는 그만큼 홀로 떨어져 있다는 말일 게다. 그러나 이렇게 미리 사진 자료들을 찾으며 보다보니 정말 언제라도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절이겠다 싶다. 이 공부가 아니더라도, 그저 마음 흘려보낼 어떤 시간이 필요할 때, 그렇게 내 몸과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싶을 때라면…. 그러나 시험 전에 한 번은 꼭 다녀오고 싶다. 여러 문화재 건축물을 묶는 답사 코스로는 짜기 어려운 길이라지만,시험 준비를 핑계삼아서라도 그냥 그렇게 훌쩍.

* 여기에 올린 사진과 도면들은 문화재청 문화재연구소 자료와 인터넷 블로그와 까페 이곳, 이곳, 이곳, 이곳들에서퍼담은 곳이다. (진심으로 감사.)

무위사는 일찌기 10세기 초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이라 알려져 있다. 극락전은 조선초기 세종 때(1430) 건립했다고 하는데 보다시피 맞배지붕 양식이며, 조선시대 기와 양식을 하고 있다. (솔직히 아직 조선시대 기와 양식이라는 설명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고려시대 기와와 조선시대 기와의 다른 점은 앞막새와 수막새의 마구리가 직절된 것이 고려시대, 빗각으로 살짝 내민 것이 조선시대라는 것 뿐, 그 밖에도 다른 전형의 차이가 있는지는…. 글쎄 그 부분은 나중에 시공을 공부하며 다루게 되는 것인지.)

10세기 원효가 창건한 절로 가지산문 소속의 선종 사찰이라더니 과연 산 속에 숨어있다시피 자리하고 있다.

정면에서 보는 그림이다. 이전까지 보아온 건물들에 비해 여러가지로 다른 점들이 눈에 띄는데 우선 기단부터 보면 자연석과 장대석이 혼합 양식으로 되어 있다. 자연석을 쌓은 뒤 장대석을 위에 올린 모습인데, 실제 모습은 맨 위에 올린 사진에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기단은 불국사 전면의 석축과도 유사한데, 그러나 불국사 전면의 석축은 자연석 위에 장대석을 올릴 때 장대석 바닥 하나하나에 그랭이를 떠 자연석에 꼭 맞게 올렸다면, 무위사 극락전의 기단은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다. 이 기단은 그리 높지 않은데 건물 자체가 낮은 경사지에 입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생각난 김에 기단부에 대해 다시 복습. 봉정사 극락전은 장대석 기단, 부석사 무량수전은 면석을 이용한 가구식 기단이었다. 가구식 기단이면서도 우주석와 탱주석가 생략된 가구식 기단으로그와 유사한 것이 미륵사지 터에도 있었다 했지.그리고 수덕사로 가서는 다시 장대석 기단이었고, 부석사 조사당은다듬은 돌을 이용한 반가공난석쌓기 기단이라 했다.

여기에 올린 그림이나 사진에서는 보여지지 않고 있는데, 건물로 진입하기 위한 계단은 양 측면에 넓게 만들어져 있다. 그러니까 기단의 측면 부분에 냈다는 것이 아니라 그림에서 표현되지 않는 더 바깥쪽에 계단이 있다는 것이다. 수덕사 대웅전과 같은 경우도 양 측면에 계단이 있지만 그 계단들은 기단과 붙어 있기에 도면에서 바로 확인이 되지만 무위사 극락전은 기단에서 어느만큼 떨어진 자리에 계단이 나 있는 것이다. 앞에서 본 건물들도 계단의 위치는 건물의 출입문, 혹은 진입 방식을 어느정도 설명해주게 되는데 이 무위사 극락전 또한 측면의 계단이 바로 측면 진입을 유도하는 방식이라 보여진다. 실제로도 전면에는 진입문이 없고 창호만이 있을 뿐이며 양 측면에 문이 나 있으니 계단을 통한 진입 방식과 건물 내부로의 진입 방향이 자연스레 이어진다.

건물 정면을 보면서 또 한 가지 눈에 확 띄는 것은 창호의 모습이다. 무위사 극락전은 창살이 화려하고 아름답기로 이름이 났다는데, 이러한 양식을 '꽃살 창호' 양식이라 한단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창호를 사진에 담고 싶어 찾아가기도 하는데, 한 번 예불이 시작되면 창문을 들어올려 놓기 때문에 실패하고 오는 때가 많다던가? 교수님도 무위사 극락전 꽃살 창호 사진을 찍으러 갔다가 창호가 들어올려져 있어서 예불 끝나기를 몇 시간 기다리다 허탕을 치고 온 적도 있다니 말이다.

잠깐 건축용어사전에서 꽃살 창호 부분(238쪽)을 찾아보니 [사찰에서는 더욱 화려하게 꾸미기 위해 살대에 꽃을 조각한 꽃살로 만드는 경우도 있다. 꽃살은 인도 힌두교 및 불교사원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종교적인 충만함을 상징한다. 정수사 법당과 같이 통판에 꽃을 조각하여 만든 특수한 꽃살문도 있지만 대개는 가로 세로살이 교차되는 부분에 국화, 매화, 연꽃 등을 조각한 기하학적인 것이 많다.] 라고 설명이 되어 있다. 그런데 사진으로 보기에는 꽃잎 문양이 잘 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책에 실린 송림사 대웅전 같은 경우는 꽃잎 문양이 아주 뚜렷이 보이는데 말이다. 이 창호에 있는 문양은오히려 빗살이나 솟을살에 가깝지 않은가 싶은데, 자세히 들여다 보면 저 선들이 얇은 꽃잎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언제 다시 가면 꼭 다시 잘 봐야지. 어쨌든 꽃살 무늬라 하니 일단 그렇게 기억.

(꽃살 창호의 모습을 봐 두려고 참고로 무위사 극락전보다 후대(조선 성종)에 지어졌다 하는 송림사 대웅전의 창호 사진을 찾아보았다.)

다시 이 건물로 돌아와 정면의 모습에서 하나하나 짚어가자면, 교재에는 무위사 극락전의 주초 방식에 '덤벙주초' 달아놓았다. 초석을 자연석으로 썼다는 말이라는데, 굳이 이 부분을 짚어준 까닭은 고려시대까지는 주초를 자연석으로 쓰더라도 윗면을 조금은 다듬어 썼다는 것에 대비되고 있끼 때문일 거다. 고려시대 주초를 반가공석으로 썼기 때문에 기둥 밑면과 주초 윗면의 마칠력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 봉정사 극락전 같은 곳에서는 하인방의 결구방식까지 달라지고, 그래서 기둥을 세우는 시공 순서까지 바뀌지 않았던가? 여기 무위사 극락전은 자연석 그대로 기둥 밑면 마구리에 그랭이를 떠서 올려놓았다.

잠깐 건축용어사전(76쪽)에서 '덤벙주초'에 대해 설명해놓은 대목을 찾아보면 이렇게 나와 있다.

자연석 초석 - 자연석을 가공 없이 그대로 사용한 초석을 말하는데 이를 덤벙주초라고도 한다. 강돌은 쓰지 않고 산돌을 쓴다. 강돌은 미끄러울 뿐만 아니라 돌의 성질이 차고 음이라고 생각해 사용하지 않았다. 덤벙주초는 기둥과 만나는 면이 굴곡이 있으므로 기둥 밑면을 초석에 맞도록 그렝이질을 한다. 그렝이질 해서 기둥을 초석과 맞춰놓으면 기둥이 밀릴 염려가 없다. 덤벙주초는 서민들의 살림집에서 주로 사용하지만 사찰 대웅전과 같은 큰 정전건물에서도 쓰인 예를 많이 볼 수 있다. 덤벙주초라 할지라도 때에 따라서 기둥이 놓이는 주좌면만을 살짝 가공하기도 한다.

주초를 설명하는 사진에서도 기둥 하부가 살짝 부른 모습이 보여지는데, 이 건물에서도 역시배흘림 기둥이 쓰였다. 배흘림 기둥하면 흔히 고려시대 건물만을 떠올리게 되지만 무위사 극락전은 조선초기에 지어진 건물이고, 공포가 기둥 위에 놓여 기둥이 받는 하중이 큰 건물이다. 하여 조선초 주심포 양식인 무위사 극락전에 쓰인 기둥도 배흘림 양식을 쓰고 있는 것이다.

∘ ∘ ∘

마지막으로 정면의 모습에서 짚고 갈 부분은 사실 도면이나 사진에서는 그닥 눈에 들어오지가 않는다. 그건 바로 기둥의 귓기둥의 귀솟음과 안쏠림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이미 부석사 무량수전을 살피면서 한 번 설명한 부분이다. 처가마가 같은 높이로 가더라도 먼 쪽으로 갈 수록 아래로 처져보인달지, 무거운 지붕을 이고 있어서 양쪽 기둥 머리가 벌어져 보인달지 하는 착시 현상을 덜어주면서 시각적인 안정감을 주기 위해 사용되는 방식들이라며 말이다. 주로 팔작지붕 건물에서 이러한 귀솟음과 안쏠림 기법을 쓰곤 하는데 무위사 극락전은 맞배지붕 건물인데도 귀솟음을 주었고, 안쏠림 방식으로 기둥을세웠따는 점이 기억해둘만한점이겠다.

종단면도다. 가운데 닫집이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보니 어칸에서 단면을 싹둑하여 들여다 보는 모습이 되겠다. 도리를 보면 외목도리를 빼고 1, 3, 5, 7의 칠량가 건물이다. 아! 반가워라. 오랜만에 하중도리 자리에 방형의 납도리가 걸려있다. 봉정사 극락전과 수덕사 대웅전에서도 하중도리 자리에서 보아오던 것, 맞배지붕의 취약한 횡력을 보강해주기 위한 방식. 그에 비해 강릉 객사문이나 부석사 조사당,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은 맞배지붕 양식이지만 납도리가 쓰이지는 않았더랬지. 우연찮게도 방형의 납도리를 쓰지 않은 세 건물은 모두 오량가 건물이었다. 그만큼 작은 건물이라는 뜻이며, 지붕이 높지 않고, 횡력에 취약하더라도 그 영향을 덜 받는 거라 할 수 있겠다. 게다가 강릉 객사문은 지붕 밑으로 문이 세 칸이나 걸리게 하려고 각기둥을 내부에서까지 쓰고 있었고,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은 워낙 긴 건물이어서 횡 방향으로 넘어갈 위험이 적었고, 부석사 조사당은 그야말로 조그만 건물이기도 했으니.

박물관에서 축소 모형을 보면서 종도리 밑 부분만을 크게 찍은 부분이다. 이 건물에서도 아직 솟을합장이 쓰이고 있는데, 안으로 굽은 내반곡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종보에서 종도리를 받고 있는 대공은 이제 더 따져볼 여지없이 파련형대공이라 할 만하다. 이 모양은 강릉 객사문을 원형으로 복원해낸 상태의 것과 같은 것이다. 강릉 객사문은 복원 전 솟을합장 없이 사다리꼴의 판대공만으로 종도리를 받쳤지만 해체수리를 하면서 서까래에서 솟을합장과 결구하는 홈이 발견되었고, 종보 위에 파련형대공이 올라 있던 흔적이 발견되면서 솟을합장과 파련형 대공으로 복원시켜 놓은 것. 수덕사 대웅전 또한 파련형이었지만, 파련형으로 초각한 대공과 동시에 포짜임이 되어 있어이것을 해석하는데 몹시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와 비슷하게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의 대공을 보면서도 어디에는 판대공이라 되어 있고, 어디에는 포대공이라 되어 있어또 한 번 애를 먹었는데 거기에서도 역시 좁은 사다리꼴의 판대공 위에 포짜임이 한 번 더 있어 두 양식이 혼합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옮겠다고 정리했다. 봉정사 극락전은 복화반 모양의 대공이었고, 부석사 무량수전은 단순한 사다리꼴 대공이 있으면서 그 위에 나비 모양의 초공 같은 것이 양쪽으로 붙어 솟을합장과 닿아 있다. 그리고 부석사 조사당에서는 종보 위에는 단순한 판대공인데 반해 대들보 위에는 전형적인 포대공이 있어 눈여겨 보던 기억이 난다. 암튼 여기 무위사 극락전은 이렇게 파련형대공과 솟을합장을 함께 쓰며 종도리를 결구하고 구름을 방지한다.

∘ ∘ ∘

이것저것 따져보기 전에 일단 종단면도를 보면 딱 드는 느낌은 뭔가 화려한 초각 부재들이 있기는 하지만 구조 자체는 굉장히 간단해 보인다는 것이다. 앞에서 본 건물들을 떠올려보면 가만가만 헤야려 봐야지 어느 정도 알아보게끔 횡으로 종으로 이리저리 적지 않은 부재들이 얽혀 있었다. 이 건물과 같은 봉정사 극락전은 복화반들에 포인방이 중첩되어 대들보와 종보의 높이차를 받치고 있었고, 그런데다가 솟을합장까지 주심도리까지 건너건너 이어지는 모습이었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수많은 가로 단위 부재들이 중첩되면서 올라가는 구조였다. 수덕사나 강릉 객사문은 우미량이 타고 내려가면서 우미량과 그 우미량을 받치는 화반들이 포짜임으로 결구했다. 그나마 간단한 것이 조그만 오량 건물이던 부석사 조사당이었는데 그 역시 대보와 종보 사이를 포짜임 방식으로 대공을 썼질 않는가? 은해사 영산전은 그야말로 간단, 심지어는 종보까지 생략된 초간단 구조이기는 했지만 그 건물은 오량 건물이었다. 그런데 이 무위사 극락전은 칠량가 건물인데도 간단한 구조를 보인다. 화려하게 초각된 화반들이야 초각이 화려할 뿐 구조가 복잡하지는 않다. 종대공에도 포짜임이 없고, 대들보 위에서 중도리를 받는 쪽에도, 하중도리를 받는 쪽에도 포짜임이란 어디에도 없다. 그저 파련형대공 혹은 파련형화반이라는 하나의 부재로 받쳐줄 뿐이다. 아,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구조를 좀 더 간단한 쪽으로 나아가는 것, 일의 공정 자체를 좀 더 손쉽고 빠르게 할 수 있게 바뀌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고려시대 건축 기법에서 조선시대 건축기법으로 나아가는 방향이라고 언급된 적이 있는데 이것을 그렇게 해석해도 좋은 걸까? 아무튼 우리 교재 파일에는 자세한 설명 없이 '내부 공포 감소 → 파련대공 사용'이라는 말과 '춤이 높은 대량 사용(우미량/운공의 퇴화)라고 쓰여 있을 뿐이다. 어쨌든둘 다구조의 단순이나 공정의 효율 쪽으로 바뀌게 되었음을 말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진은 종도리 밑 솟을합장과 파련행대공, 그리고 그것이 선 종보와 그 밑의 대들보 사이를 받치는파련형화반을 보여주는 것이다. 파련형초각의 화려함은 있지만, 그것의 초각을 빼고 본다면 그야말로 단순한 구조일 뿐이다.

이것은 무위사 극락전을 내부에서 올려다보면서 찍은 사진이다.위에서 보여준 모형도의 사진과 같은 부분을 찍은 것이다. 실제 모습을 보더라도 다를 것이 없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서까래가 노출되어 있는 부분 말고 그 안쪽으로 천정이 가설되어 있는데 이것은 무위사 극락전의 또다른 특징으로 어칸을 아예 닫집으로 꾸미느라그런 것이다. 종단면도에서 보이는 불전 위로 그러한 천정을 가설한 것.

살짝 빗각으로 찍은 이 사진을 보면 어칸의 뒤쪽 내진열에 서 있는후불벽과 그 앞의 불상들이 보인다. 그리고 천정 가설한부분도 조금.이렇게 무위사 극락전은 법당 안에 닫집을 따로조그맣게 만든 것이 아니라 어칸 전체를 닫집화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과 함께 이 사진에서도 대들보가 가로지른 모습이 보이는데, 지금껏 살펴온 어떤 건물에서보다 이 대들보는 춤이 크다.뒤에 공포를 형성하는 곳에서 살피게 되겠지만, 이렇게 큰 대들보를 쓰기 때문에기둥 바깥에서는 주심도리와 외목도리를 이 대들보가 모두 받아주고 있다. 지금까지 살핀 어떤 건물도 대들보 하나가 도리 둘을 다받아주는 적은 없었다.아니, 다시 말하면 주심도리까지 받아주는 경우는 없었다. 기본이 외목도리를 받아주는 것이고, 각 건물의 특성에 따라 외목도리 밑에 초방이라 하는 받침목을 두어 높이 차를 해결하거나 아님 직접 받아주거나 하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주심도리 부분은 언제나 승두라거나 초방, 우미량 같은 받침목을 위에 올린 다음에야 받을 수가 있었다.봉정사 극락전과부석사 조사당,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은외목도리는 직접, 주심도리에는 승두라는 뭉뚝한 받침재를 썼고, 수덕사 대웅전과 강릉 객사문은 외목도리 밑에 초방, 주심도리 밑은 외목도리에서 나오는 그 초방과 우미량을 받쳤다. 그리고 부석사 무량수전은 외목도리 밑에 초방, 주심도리 밑에는 외목도리를 받던 초방과 또 하나의 초방을겹쳐서 받아주었고 말이다.

으, 머리통에 용량 초과다. 한 번 더 정리해보고 넘어가자.

외목도리 받침목

주심도리 받침목

부재 끝의 초각 모양

봉정사 극락전

없다.

승두

보머리 - 이분두

부석사 무량수전

초방

외목도리에서

나오는 초방

+

초방

보머리 - 갈고리 모양

외목도리 초방 -

위가 넓은 빗각

수덕사 대웅전

초방

외목도리에서

나오는 초방

+

우미량

보머리 - 날렵뾰족

살미첨차 - 날렵뾰족

외목도리 초방 -

아래가 넓은 빗각

강릉 객사문

초방

외목도리에서

나오는 초방

+

우미량

보머리 - 쇠서형

살미첨차 - 사절되어

연화두형

외목도리 초방 -

동글동글

부석사 조사당

없다.

승두

보머리 - 이분두

살미첨차 - 2단으로

사절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없다.

승두

보머리 - 구름(동글)

살미첨차 - 쇠서

무위사 극락전

없다.

없다.

보머리 - 약간 둥글게

살미대첨차 - 쇠서

살미소첨차 - 쇠서

표로 정리해보며 다시 살펴봤지만 외목도리와 주심도리 둘 다 아무런 받침목 없이 쓰인 것은 무위사 극락전이 처음이다. 아무 받침목이 없다는 말은 도리가 대들보 위에 바로 놓인다는 뜻이다. 무위사 극락전은 그처럼 큰 대들보를 쓰고 있어서 외목도리와 주심도리를 모두 직접 받고 있다.

대들보가 크고 굵어지면서 함께 커지는 것은 그것을 받치는 부재, 보아지가 함께 커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사진에서 가만 보면 보아지 부분이 세 조각의 부재가 하나로 이어져 커다랗게 이뤄져 있다. 셋이라니? 지금까지 수덕사 대웅전에서나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에서는 헛첨차와 살미첨차 뒷뿌리들이 만나 한덩어리의 보아지처럼 초각되어 보를 받는 모습은 본 일이 있다. 그런데 여기는 둘도 아니고 셋이다. 그 까닭은무위사 극락전에서 처음 보게 되는 공포 특징 때문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 공포에서는 헛첨차가 쓰이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무슨 말이 되겠나? 헛첨차가 쓰이지 않았다면 주두 밑에서 처마내밀기가 시작하지 않았다는 말이고, 그렇다면 주두 위에서부터 도리방향 소첨차와 보방향 소첨차, 도리방향 대첨차와 보방향 대첨차가 서로 같은 길이로 십자결구, 십자결구를 해가며 짜올라가는 것이 정석 아니겠나? 마치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미 우리 건축은 헛첨차를 씀으로 해서 처마내밀기라는 맛도 보았고, 그 과정에서 살미첨차가 비대칭적으로 내출목은 소첨 길이, 외출목은 대첨 길이로 되기도 한다는 것을 거쳐왔다. 게다가 살미첨차 뒷뿌리가 그 아래 첨차의 뒷뿌리와 한덩어리처럼 초각이 되어 보아지 역할을 하게 한다는 것까지.그러한 양식의 발전과 경험, 변형이 여기 무위사 극락전에서 또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주두 위에서부터 보면 소첨차와 소첨차가 십자결구를 하고 있고 그 위에 보방향으로는 살미가, 도리방향으로는 뜬장혀가 결구했다. 그 위에는 다시 보방향으로 살미첨차가 한 번 더 나가면서 도리방향의 대첨차와 십자결구한다. 그 위로 보와 또 하나의 뜬장혀가 십자결구를 하고 높이를 달리한 보머리들에서 외목도리와 주심도리가 얹히게 되는 것이다.

휴우, 크고 굵은 대들보 밑을 받는 커다란 보아지를 말하려다 보니 공포에 대한 설명까지 거의 해버렸다. 어쨌든 무위사 극락전은 이러한 공포의 특징 때문에 주두 위에서 대들보 사이에 있는 보방향의 첨차가 셋이 된다. 하나는 십자결구하는 소첨차, 또 하나는 뜬장혀와 결구하는 살미소첨차, 그 위에는 대첨차와 결구하는 살미대첨차! 그리고 그 위에서 대들보가 뜬장혀와 결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대들보 밑으로 들어가는 첨차들의 뒷뿌리도 보방향 소첨차부터 살미소첨차, 살미대첨차까지 셋. 이 셋의 뒷뿌리가 서로 붙으면서 한덩어리처럼 초각이 되어 커다란 대들보의 보아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살미첨차를 둘 썼으니 대들보의 높이가 한 단 높은 곳이라는 것 또한 기억해둘만 한 것이다. 한 단 높은 곳에서 시작하는데다가 워낙 춤까지 높은 대들보이니 여느 건물의 대들보보다 강조가 되는 건 당연하다 할 것이다.

횡단면도에는 일단 가운데 어칸의 닫집이 가장 눈에 띈다. 다른 공간은 천정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으면서 어칸 상부에만 천정을 가설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림이 작아 눈을 크게 뜨고 봐야 하겠지만 도리방향(가로방향) 첨차들이 어떤 것은 첨차이고 어떤 것은 뜬장혀(인방재), 그것들이 교차하여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냥 소로만으로 볼 때는 한 층 한 층 올라가면서 점점 넓어지는 첨차들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측면에서 측면까지 나가는 뜬장혀가 사이사이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두 위에는 소첨차(소첨차와 결구)가 그 위에는 뜬장혀(살미소첨차와 결구)가, 그 위로는 대첨차(살미대첨차와 결구), 그 위는뜬장혀(보와 결구)가 차례로 올라가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위로 주심도리가 놓여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로방향의 것들만 간단히 말하면 '주두 - 소첨차 - 뜬장혀 - 대첨차 - 뜬장혀 - 주심도리와 장혀'의 순서로 말이다. 그런데여기에서도 역시 뜬장혀가 지나가는 부분들에 선만 그어 놓으면 그것들이 마치 차츰 넓어진 대첨차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점을 처음본 건 부석사 조사당에서였다. 그 건물은 헛첨차가 쓰였으니 헛첨차부터 시작하겠는데도리방향에서 보자면맨 밑이 창방이 되어'창방(헛첨차와 결구)- 주두 -대첨차(살미첨차와 결구)- 뜬장혀(보와 결구)'의 순서로 위로 올라간다. 이 때는창방이 마치도리방향의 소첨차처럼 보일 수 있었는데, 그래서 이를 두고 '장혀(창방)가 공포 결구에 직접 관여한사례'라고 하질 않았나? 마찬가지로 무위사 극락전의 뜬장혀들은 그대로 도리방향 첨차들과교차해 올라가면서 살미첨차와 결구하여 공포 구성을 함께 하고 있다.

또한횡단면도를 볼 때면 언제나 확인하는 것! 보의 단면 모양이 어떠한가. 지금껏 살펴본 모든 건물의 보는 역항아리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모든 건물이 고려시대 것이었다는 것과 정확하게 일치. 그러나 조선시대 건물로 들어서자마자 보의 단면 모양이 바뀐 것이다. 위아래로 긴 방형에서 밑면을 살짝 둥글게 깎아놓은 형태.

아! 그리고 또 하나,무위사 극락전의횡단면도를 보면서 이제껏 보아온 건물들의 횡단면도들과 크게 다른 점 한 가지를 봐야만 한다. 지금까지는 내부 가구구조가 측면까지 동일하게 나가고 있었다. 어칸을 이루는 기둥열의 단면과 측면 벽부를 이루는 기둥열의 단면이 똑같았다는 말이다. 단지 바깥에서 횡력 취약함을 보강하느라 가운뎃 기둥 하나를 더 쓰거나 혹은 내부에 없는 고주를 하나 더 쓰거나 했을 뿐, 또는 내부에는 없는 창방이 바깥에서는 붙잡고 있다거나 하는 차이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한 것 말고 상부의 하중을 받아내는 기본 가구 구조는 모두 동일했다는 것. 그러나 무위사 극락전의 횡단면도를 보라, 어칸을 이루는 기둥열과 측면 벽부를 이루는 기둥열은 전혀 다르다. 일단 대들보, 대들보는 어칸 기둥열에만 있다. 측면부는 기둥이 중도리까지 올라가고 있고 그 사이에는 보가 지나지를 않는다. 고려시대 건물들에서는 전면의 기둥이 일곱칸이면 대들보가 여덟 개였고, 다섯 칸이면 여섯 개, 세 칸이면 네 개였다. 종보도 마찬가지고, 툇보가 쓰인 건물이라면 곱하기 둘을 하면 그 갯수가 정확히 떨어졌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건립된 무위사 극락전은 다르다. 세 칸 건물인데 대들보가 둘 밖에 없다는 것은 나머지 측면 벽부에는 대들보 없이 다른 가구 구조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대들보가 아닌 다른 가구 구조로 상부 하중을 받아낸다는 뜻이다. 이 커다란 변화! 이것을 이해하려면 당연히 측면부를 살펴야 답이 나올 것이다. 측면부에는 도대체 왜 대들보가 쓰이지 않았는가, 대들보 없이 어떤 식으로 상부 하중을 받아내는가, 굳이 그렇게 해야만 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물음들에 답을 찾으며 말이다.

자칫 대들보가 가운데 놓이고 양쪽 전후퇴칸으로는 툇보가 지나간 모양새와 비슷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 그림 어디에도 대들보는 없다. 안쪽에 서 있는 고주들이 그대로 종보까지 올라가 종보 위에서 받는 하중을 그대로 기둥이 받는, 말하자면 측면부만 본다면 천두식 가구를 보인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기둥들 사이에 가로지른 것은 고주들의 창방일 뿐이며 그 밑에 귓기둥과 나란히 하여 지나가는 가로재 역시 단순한 인방재일 뿐 상부 가구구조의 하중을 받아내는 부재는 아닌 것이다. 이렇게 측면부의 가운데에는 대들보가 없는 채 전후퇴칸 쪽으로만 툇보가 나가고 있다. 안쪽의 고주들에서 외목도리를 받는 자리로 내뻗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툇보인 것이다. 말하자면 이 툇보의 밑면이 내부 가구구조에서 대들보의 밑면과 높이가 같은 것이다.왜냐하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내부 가구구조와 측면부의 가구구조가 다르다 하더라도 도리가 걸리는 높이는 일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서까래들이 일정하게 걸리고, 그 위로 기와들이 한 면으로 덮일 수 있는 것. 이 툇보 위에는 커다란 파련대공이 방형의 하중도리를 직접 받는다. 내부 가구구조에서도 파련대공이 방형의 하중도리를 받아주는 것은 같았으니 크기는 서로 다르다. 측면부에 있는 파련대공이 더 커야만 한다. 왜냐하면 내부 구조에서는 파련대공이 대들보 위에 서 있었고, 측면부에서는 툇보 위에 서 있다. 대들보와 툇보의 밑면 높이는 같아야 하지만 그 윗면 높이가 같겠는가? 하물며 이곳에 쓰인 대들보는여느 건물의 대들보보다춤이 높아 외목도리와 주심도리까지 다 받아내고 있는 정도이니 그 윗면의 차이는 다를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외목도리와 주심도리의 높이 차이 만큼 툇보 윗면이 대들보 윗면보다 낮은 것이다. 그러니 하중도리를 받는 파련대공은 그 높이 차이만큼 키를 더 키워야 할 일. 그래서 측면부에서 하중도리를 받는 파련대공은 커다랗게 되었다. 이것을 교재에서는 '파련대공 사용을 통한 우미량의 퇴화'라 하는데 어쨌든 이러한 방식이 가구구조를 꽤 간단하게 해 준 것은 사실이다. 부석사 무량수전 같은 경우는 툇보 위에서 대공이 초방과 초공, 초방과 포를 짜며 결구를 하면서 포대공을 이뤄 하중도리를 받았고, 수덕사 대웅전 같은 경우는 툇보 위로 화반, 고주에서 나오는 창방 뺄목, 내려가는 우미량, 내려온 우미량들이 겹겹이 쌓인 뒤 그 위에 하중도리를 받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무위사 극락전은 조금 크기가 큰 화반 하나로 툇보 위에서 하중도리를 받치고 있으니 말이다.

박공은 더이상 거멀정이 아니라 지네철로 되어 있고, 측면부에는 문이 있다. 계단이 양 측면에 있는 걸 보면서 측면부의 출입문 얘기를 했고, 애초 측면 진입을유도하며 계획한 건축물이라 했다. 측면에 있는 문의 창호는 세살창호로 되어 있는 세살문이라 하는데, 이참에 잠깐 살창에 대한 용어사전(237쪽)의 설명을 읽어보고 가는 것이 좋겠다.

살창

살창은 울거미 속에 얇은 살대를 짜 만든 창호를 말한다. 건물에 다는 창호는 대개 살창인데 살창의 개발은 창호 경량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고대건축 초기에는 목공 연장이 발달하지 않아 정밀한 가공을 요구하는 살창은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차츰 연장이 발달하면서 경량화를 위한 살창의 쓰임이 늘어났다. 이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살창이 거의 보이지 않으며 일본 고대 그림책에서도 창호보다는 창막 등을 치고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살창은살의 모양에 따라 명칭이 세분된다. 가장 원시적인 모양으로 고정된 문얼굴에 세로로 살대를 보내고 창호지를 바르지 않은 세로살창을 들 수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인 봉정사 극락전에서 볼 수 있으며 중국에서도 가장 오래된 난청스 대전에서 볼 수 있다. 살림집에서는 조선시대에도 부엌 등에 많이 사용했는데 이는 연기를 배출시키기 위한 환기창이었다.

조선시대 살창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문울거미 안에 세로살은 꽉 채우고 가로살은 위아래와 3-4가닥 보낸 세살창이다. 세살창 아래 청판을 붙여 문으로 사용하는 것은 세살문이라고 한다. 세살창호는 대개 외벽 창호로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분합이라고 부르는데 살대 명칭과 결합하여 세살분합 또는 세살청판분합이라고 부른다. 세살은 속칭 띠살이라고도 한다. 다음으로 많이 사용되는 것이 세로살과 아울러 가로살까지 꽉 채운 만살분합과 만살청판분합이다. 만살은 속칭 정자살이라고도 한다.

분합은 세살과 만살이 가장 많이 쓰이지만 장지는 화려하게 꾸며 아자살이나 완자살, 숫대살을 사용하기도 한다. 가끔 누마루 창호는 화려하게 꾸미기 위해 이러한 장식적인 창호를 사용하기도 한다. 쌍창 안쪽에 다는 미닫이 영창은 소박하게 만들어 용자살로 하는 경우가 많다. 영창 안쪽 흑창은 살대에 두껍게 창호지를 여러 겹 바르거나 벽지를 발라 빛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여 살대가 보이지 않는데 이러한 창호를 도듬문이라고 한다. 또 광창 등은 살대를 45도 만살로 거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빗살이라고 한다.

무위사 극락전의 측면에 나 있는 출입문은 세살창호로 된 세살문이다. 전면은 꽃살창으로 되어있다 하였고, 위에 올린 살창의 설명 뒷부분에 꽃살창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는데 그 부분은 이미 정면의 꽃살창을 말하는 대목에다 옮겨놓았다.

측면부 모습이다. 문은 활짝 열려 있어 세살창을 확인할 수는 없겠다. ^ ^; 우와, 그런데 이 측면을 보니 수덕사 대웅전 측면부의 모습이 딱 떠오른다. 물론 가구구조를 보면 우미량이나 대들보, 가운뎃 각기둥 따위 크게 다른 모습이기도 하지만, 그런 것들을 떠나 전체적인 느낌은 수덕사 대웅전의 측면과 왜 이리 비슷하게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정말로 꼭 가보고 싶은 곳.

감상은 잠시 접어두고, 측면부를 보며 하마트면 지나칠 뻔한 가구구조의 특징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귓기둥의 머리에서 내고주의 중간 쯤으로 가로지르는 창방과 그 위의 툇보 사이에 가로지른 가로재, 저것은 뭐겠는가? 사진으로는 분간하기가 어렵지만 위에 있는 도면으로 보면아,그것이 그대로 나가 살미의 쇠서가 되는구나!이 건물에서는 공포부에 살미첨차가 셋이었다. 헛첨차 없이 주두 위에서 시작하면서주두에 바로 걸리는 살미첨차는 일반적인 소첨차였지만 그 위에 쇠서 초각이 된 살미첨차가 뜬장혀와 결구되어 있고, 그 위에서 또 한 번 쇠서 초각의 살미대첨차가 도리방향 대첨차와 결구되고 있다. 그런데 이 측면부의 귓기둥 공포에는 밑에 있는 쇠서 초각 살미첨차가 그대로뻗어 고주로 결구되는 인방재 노릇까지 하는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사정이니 이 측면부에서는 살미첨차들 셋이하나로 맞닿으며 대들보의 보아지 노릇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이미 대들보라는 것이 있지도 않거니와두번 째 살미첨차 끝은 인방재가 되어 고주까지 뻗어가니 그러한 형상을 만들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맨 위의 살미첨차 뒷뿌리만이 보아지처럼 초각이 되어 툇보 밑을 받아준다.내부에서는굵고 커다란 대들보를 받쳐야 하기 때문에 살미첨차세 개가 모두 뭉쳐 커다란 보아지를 이룰 필요도 있었겠지만, 측면부에서는 거의 인방재 굵기 밖에 되지 않는 툇보를 받을 뿐이니 보아지가 그리 크지 않아도되기도 할 테고 말이다.

그 밖에 툇보 위에서 방형도리를 받는 커다란 화반대공이나 종보 위에서 종도리를 받는 화반대공 따위들은 지붕 그늘에 가려 볼 수가 없다. 아쉬웁게도.

아, 이 사진이 하나 더 있었구나.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다 또렷하게 보인다. 툇보 위에서 방형도리를 받는 커다란 파련형대공도, 고주 상부에서부터 인방재처럼 나가 살미첨차가 되고 있는 부재도.

이 그림을 보면서 또 한 가지 놓치고 지날 뻔한 중요한 것이 있다. 측면부의 공포부 모습인데 다시 한 번 차근차근 뜯어보며 살필 일이다. 귓기둥에 짜여진 공포를 보면 일단 기둥머리를 잡아주는 창방 뺄목 역시 초각이 되어 나가 있다. 마치 헛첨차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포를 짜는 것과 전혀 무관하기 때문에 헛첨차가 아닌 그저 창방 뺄목일 뿐이다. 그 위에 주두가 놓이고 소첨차가 소첨차와 결구되어 있다. 그 위로는 도리방향의 뜬장혀가 나오는데, 그것이 문제의 고주부터 나가는 보방향 인방재이면서 살미인 그것과 결구가 된다. 그 위에는 도리방향 대첨차와 살미대첨차가 결구되어 있는데, 이 살미대첨차의 뒷부분이 보아지처럼 초각되어 있는 게 또렷이 보인다. 초각된 그 보아지는 아닌 게 아니라 위에 있는 툇보를 받쳐주고 있다. 그 툇보는 또 하나의 뜬장혀와 결구되어 있고, 살미대첨차 끝부분에서 행공첨차와 함께 결구되어 올라있다. 그 자리에 외목도리와 장혀가 있게 되니 그 높이가 바로 대들보에서 외목도리를 받는 높이인 것이다. 자, 그렇담 주심도리는 어떻게 받는가? 대들보가 있는 내부구조에서는 대들보의 춤이 깊어 주심도리와 외목도리를 다 받을 수 있었지만, 이 측면가구에 있는 툇보는 외목도리 뿐이 받지를 못한다. 그렇다면 주심도리는? 그래, 그 주심도리를 받을만큼 높이를 올려주어야할 무엇인가가 필요한데 그 받침목이 하중도리를 받는 파련대공에 가서 닿고 있다. 하마트면 못 보고 지나쳤을 그것. 그래, 툇보로는 외목도리 하나 밖에 받지를 못하는데, 대들보처럼 춤을 키워주려면 주심도리를 받는 부분에 그 높이 차이를 해결해줄만한 받침목이 하나 있는 게 당연하겠지.

위에서 본 사진이 측면부의 오른쪽이라면 모형을 찍은 이것은 측면부의 왼쪽이다. 그래봐야 어차피 전후대칭구조이니 이것으로 다시 한 번 확인. 어느 부분인가 하면 사진 왼쪽에서 멀리 나가고 있는 것이 주심도리이다. 그 밑으로 고주기둥까지 가로지르고 있는 것이 툇보, 툇보 아래에 초각이 된 보아지 같은 것이 있으니 그것이 살미첨차의 뒷부분일 것이다. 주심도리는 툇보가 바로 받아줄 수 없으니 파련대공과 결구되어 주심도리를 받쳐주는 받침목이 있다. 스티커 이름표를 붙이고 있는 것. 그것이 주심도리를 직접 받아준다. 그러니 툇보는 바깥으로 더 나가 외목도리를 받는 것이고, 툇보 위에서 파련대공과 결구된 받침목이 주심도리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 파련형대공은 방형의 하중도리를 직접 받고 있고, 고주기둥은 창방 뺄목들로 결구가 된 채 기둥머리 위로 주두를 올리고, 주두 위 소첨차들의 십자결구, 그 위로 하중도리 쪽 파련대공 위에서부터 하중도리와 결구되어 나오는 포인방이 한 번 더 첨차와 십자결구된 위로 종보를 받는다. 그 종보에는 중도리가 걸리고 있고 말이다.

아하! 이렇게 보니 <하중도리부의 파련대공 사용을 통한 우미량의 퇴화>라고 교재에 써 있는 부분이 이해가 된다. 하중도리의 파련대공을 중심으로 보면 그 위에 하중도리를 받으면서 중도리쪽으로 포인방이 나가고, 파련대공의 밑 부분에서는 주심도리쪽으로 또다시 포인방이 이어지고 있는 것. 마치 우미량이 굽으면서 내려가 받아주고 할 때의 선이 파련대공을 중심으로 포인방들이 만들어주고 있지를 않은가! 아, 그 말이었구나! 파련대공과 포인방들이, 우미량이 지니던 선을 대신해주고 있다는!

이것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모습을 담고싶어 걸상을 딛고 올라가 찍은 사진이다. 종도리가 지나가고 파련대공이 종도리 밑 종장혀를 받고 있다. 솟을합장은 도리의 옆에 끼워져 내반곡으로 휘어내려오며 종보 위에 끼워진다. 그 종보 끄트머리에 중도리가 지나가. 종보 밑을 다시 파련대공이 받고 있는데 하중도리 쪽의 파련대공과 높이가 같다. 그 두 파련대공 위로 포인방이 있고,종보는 그 포인방을 거쳐 파련대공 위에 얹혀지는 모습이다.아, 뭔가 위에서 본 것과 살짝 다르질 않나! 좀 전에는 하중도리 쪽 파련대공 위에서 나가는 포인방이 고주기둥의 머리 위 주두와첨차들의 결구 위로 걸쳐지면서 종보 밑으로 들어간다 하더니…. 그래, 다르다. 다른 까닭은 뭔고 하니,위에서 본 것은 측면 벽부에서 하중도리와 중도리, 종보 쪽 모습이고, 지금 보는 사진은 어칸 쪽 단면에서의 하중도리와 중도리, 종보 쪽 모습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러니까 측면은 대들보 없이 고주기둥이 종보 밑까지 올라와 주두와 첨차결구를 통해 그 포인방을 받는 것이고,어칸 쪽 단면에서는 대들보가 있고, 대들보 위 파련대공이 그 포인방을 받는다는 것이다. 종도리 위로는 측면부나단면부나 똑같은 형식이니 따로 말할 거야 없겠고 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사진으로 보니까 아까는 지나치던 것 또 한 가지를 보게 되었다.뭔고 하니,하중도리를 받는 파련대공 위에서 종보 밑으로 들어가는 포인방의 끝이 마치 종보의 보아지가 되듯 초각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보는 하중을 많이 받는 것이니 그 밑에 보아지라는 걸 두는 거야 더욱 안정적인 구조가 되게끔 하는 일일 테니 말이다.

사진 찍은 사람은 아마 종보 위의 파련대공이나 솟을합장을 담으려 한 거였겠지만, 여기에다 이 사진을 놓은 것은 좀 전에 말한 그 포인방의 끝이 종보의 보아지처럼 초각되고 받쳐지고 있다는 게 이 사진으로 잘 보여지는 게 반가워서다. 종보 밑에 있는 건 고주들 사이를 잡아주는 고주창방이겠다. 사진에 살짝 걸쳐지듯이 양 옆에 고주들이 보이고, 그 위로 주두 귀퉁이 쬐금, 첨차 반쪽과 종보의 보아지가 되고 있는 포인방의 뒷뿌리가 보보여진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이 사진의 포인트는 양쪽 귀퉁이들이 되겠다. ^ ^

이건조금아까 본 사진에서 각도를 살짝 오른쪽으로 틀어 찍은 것이다. 아까 그 사진에는 종도리와 솟을합장의 결구나 종대공이 종장혀를 받는 모습을 좀 더 보여줬다면, 이 사진에서는 그 쪽 부분 대신 방형의 중도리 오른쪽 밑으로 주심도리와 외목도리가 얹혀 지나가는 것을 더 보여준다. 그런데 이 부분은 측면이 아니라 내부 구조이니 방형의 하중도리를 받고 있는 대공이 선 곳도 대들보 위요, 주심도리와 외목도리를 받아주고 있는 것도 대들보다. 그러니 하중도리를 받고 있는 파련형대공도 아까 측면에서 살폈을 때의 그 파련형대공보다 작은 크기인 것이다. 춤이 낮은 툇보에서 받아줘야 할 때는 그만큼 커닫란 파련형대공이 필요했으니 말이다.

이 건물의 뒷면을 잘 보여주는사진은 인터넷에서 눈을 씻고찾아봐도 볼 수가 없었다. 그나마 뒷면을 볼 수 있는 건 이것 한 장 뿐이었다. 건물 뒤를 보면 어칸에 판장문 형태의 출입문이 있고, 협칸 쪽에는 판장문 형태의 창호가 있다 하는데, 그 설명을 보며 사진을 보면 어림어림 보이는 듯도 하다. 어칸 판장문 형태의 출입문은 외여닫이로 되어 있다 하고, 협칸 판장문 형태의 창호는 쌍여닫이로 되어 있다더니 측면의 쌍여닫이로 된 판장창호는 어느정도 알아볼 수 있겠고, 어칸의 외여닫이 문은 측면의 창호보다 뭔가 좁아보인다는 정도로 어림할 수 있겠다. 이런 뒷면의 형태는 완주 화암사 극락전, 완주 위봉사 대적멸전과 닮았다고 하는데 일단 그 정도로만 기억.

궁금해서 찾아본 완주 화암사 극락전의 뒷면 사진이다. 아마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처마 아래로 삐죽삐죽 나와 있는 하앙에 주목한 것 같지만 (이 완주 화암사 극락전이 하앙 양식 건물로는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문화재여서 무척 귀하다.) 나는 지금 뒷면이 궁금했을 뿐이다. 판장문 형식의 창호들이 무위사 극락전 협칸의 판장문 형식 창호와 많이 닮았다. 뒷면 어칸의 출입문도 그 위치나 판장문이라는 형태는 비슷해 보이는데 무위사 극락전의 뒷면 문보다 이 화암사 극락전 뒷면의 문이 더 넓어보인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판장문 형식의 창호와 문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함께 이야기되고 있는가 보다.


평면도를 보면 정면 세칸에 측면 세칸으로 되어 있는정방형 평면이다. 칸 수로 치면 정면과 측면 모두 세 칸씩이지만 실제 길이로는 3:2 정도가 된다 하는데, 이 비율이 조선초기 양식이라 한다. 바닥은 전바닥으로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마루가 깔려 있다고…. 이 평면도에서 중요하게 기억해야할 한 가지는 어칸의 폭이 협칸의 폭들보다 좁다는 것이다. 도면으로 봐서는 언뜻 보아 잘 모를 정도로 그 차이가 크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정말로 그런가 싶어 도면지인 모눈종이의 네모칸 수를 세어보았다. 그랬더니 정말 어칸은 열두 칸이고, 협칸들은 열세 칸씩이다. 에걔, 겨우 한 칸 차이… 하는 생각이 들지만 이 도면이 실제 건물의 넓이로 확대된다고 생각해 보면 결코 작은 차이가 아니겠다. 사찰 건물들은 보통불상을 모시는 어칸을 강조하기 마련이고, 협칸이나 퇴칸보다 크게 하는 것이 일반적일 텐데이 건물에서는 거꾸로 어칸이 더 좁다.이와 비슷하게 어칸이 협칸보다 더 좁게 되어 있는 건물로 법주사 대웅전이 있다 하는데, 그 역시 지금은 기억만 해두기로.

무위사 극락전의 공포도다. 이 공포부에 대해서는 알게 모르게 이미 위에서 거듭 살피고 지나올 수밖에 없었다. 커다란 대들보 이야기를 하느라 커다란 보아지 얘기를 해야 했고, 그 보아지가 세 개의 살미 뒷뿌리가 서로 붙으면서 되었다는 것을 살피면서 한 번 확인했고,대들보의 춤이 높아 외목도리와 주심도리를 다 받아주고 있다는 것에서 다시 한 번 살폈다. 그리고 측면부를 보면서는 대들보 없이고주 둘이 직접 종도리까지 올라가는 모습을 살피면서툇보와 창방 사이에 있는 가로재가 무엇인지 알아보다가그것이 측면부의 살미가 된다는 것도 보게 되었고 말이다. 또한 측면부에서는 툇보만이 있기 때문에 주심도리를 받는받침재는 따로 둬서 종보의 포대공으로 이어진다는 것까지 살폈다. 그랬으니 여기에서는 가볍게 확인만 하고 지날 수 있을 것 같다.

무위사 극락전은 헛첨차가 쓰이지 않았으니 기둥머리의 주두 위에서 소첨차의 십자결구부터 시작이 되고 그 위에는 보방향의 살미와 뜬장혀가 십자결구한다. 그 위에서 보방향의 살미가 한 번 더 도리방향의 대첨차와 결구를 하고,그 위에는 보 목아지가 다시 뜬장혀와 결구를 한다. 이렇게 살미가 셋인데 위에 있는 두 개의 살미는 모두 쇠서로 초각, 오히려 보머리는 쇠서 초각이 아니라 구름 모양의동글동글한 형태로 깎여 있다. 살미대첨차의 끝 부분에는 행공첨차와 보머리가 결구되면서 외목도리와 장혀를 받아주고,주심도리는 대들보의 윗면 쪽에서 받침재 없이 걸린다.

그런데 왠일인지 이 공포에서는 도리방향으로 굉장히 넓게 퍼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물론 장혀들이 공포 구성에 직접 간여를 하면서 소첨차 위에 지나는 뜬장혀도 하나의 대첨차 역할을 하니 그 위에 올라가는 진짜 대첨차는 한 칸씩을 벌린 게 아니라 두 칸을 벌리게 된 거라 하겠지만 그걸 떠나서라도 첨차 위에 놓이는 소로들의 사이가 무지 넓어 보인다. 그거야 뭐. 그리고 이렇게 사진들로 보게 되니 또 한 가지 눈에 보이는 건 살미대첨차의 쇠서 위에서 보머리와 결구하는 행공첨차의 밑면 초각이 그전보다 많이 화려해졌다는 것이고, 공안이라 하는 첨차와 첨차 혹은 첨차와 뜬장혀 사이에 빈 공간들이 눈에 잘 띄고 있다.

이건 바깥으로 보이는 공포 부분을 건물 안에서 본 모습이다. 살미첨차들 셋이 커다란 보아지를 만들어 커다란 대들보 밑을 받쳐주고 있다는 것 외에는 달리 특별할 건 없다. 그런데 왜저 모습이 재미있어 웃음이 나려하는지 모르겠다. 공안의 틈마다테두리를그려노랗게칠해놓은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그 테두리가 비뚤빼뚤해서 더 정감이 가는지도 모르겠다.

전면의 기둥들에 주심포들을 하나로 담은 사진인데, 정말 쇠서들이 참 날카롭게 초각되어 있다. 두 개의 날카로운 초각 위에 보머리는 구름모양으로 동글동글. 보머리가 저렇게 동글동글한 것은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에서도 그러했다. 여기에는 살미가 둘이지만 쇠서 초각은 하나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다른 건물들보다 보가 한 단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게 느낌으로 온다. 나름 여러 건물들의 사진과 공포들을 숱하게 보고 있던 터라 그런지 다른 건물들은 살미대첨차의 쇠서가 나온 자리 쯤에 보머리가 나오지 않았나 싶은 것이다. 아마 그렇다면 여기에는 헛첨차가 없이 주두 위에서부터 포를 짜느라 기둥 윗부분의 구조가 다들 한 단 높은 곳에서 이뤄지지 않나 싶기도 하고 말이다.



이것은 귓기둥의 공포. 귓기둥은 당연히 측면의 벽부를 끼고 있으니 창방들로 서로 연결되어 뺄목도 가지고 있다. 주두 밑으로 나와 있는 것이 꼭 헛첨차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창방의 뺄목일 뿐이다. 기둥 위에 주두가 놓이고, 주두 위 소첨차들의 십자결구. 그 위에는 문제의 살미첨차가 올라간다. ^ ^그 살미첨차는 도리방향의 뜬장혀와 결구를 하고 자신의 뒷뿌리는 그대로 인방재처럼 고주에 가서 결구한다. 그 위로 한 번 더 살미첨차가 놓여지고 도리방향의 대첨차와 결구를 하는데, 이 때 살미첨차의 뒷뿌리는 예쁘게 초각이 되어 툇보의 보아지 역할을 하게 된다. 살미첨차의 바깥쪽 끝부분에는 예쁘게 초각한 행공첨차와 보머리가 결구하며 외목도리를 받아주고, 기둥열에서는 결구 순서대로 따라 올라가다가 주심도리를 받기 위한 초방이 그 안쪽 파련대공까지 이어진다. 이 정도면 귓기둥 위의 공포도 다 살펴봤다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귓기둥의 도리방향 첨차들을 보면 좌우대칭이 깨진다. 단순히 좌우의 길이만 달라지는 게 아니라 공안의 폭, 그러니까 소로가 놓이는 위치의 폭도 줄어드는 것이다. 대첨차에서는 물론 그렇지만 소첨차와 대첨차 사이에서 또 하나의 첨차 노릇을 하는 뜬장혀에서도 양쪽으로 벌리는 각도를 달리하며 공안의 폭을 달리하며 말이다. 그러니 이 장혀들이 그야말로 첨차 역할을 하면서'공포 결구에 직접 결구'한다는말이 역으로 증명되고 있기도 하다.

실제 건물의 귓기둥 위 주심포로 보면 이렇게 더욱 실감이 난다. 좁아드는 공안, 좌우가 확연히 다른 대첨차의 모양.

귓기둥 밑으로 내밀고 있는 이것들은 헛첨차가 아니다. 창방 뺄목들도 이제는 저렇게 예쁘게 초각.

아, 그런데 무위사 극락전의 측면을 보는데 왜 자꾸만 수덕사 대웅전의 측면이 떠오르는지 몰라. 저 나무빛깔과 노랗게 칠한 벽 때문에 더 그럴까, 수덕사 대웅전하고는 구조가 퍽 다르지만 건물이 주는 단정하고 아늑한 느낌만큼은 그것과 가장 닮은 것 같아.

∘ ∘ ∘

그런데 이 마지막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중요한 것 한 가지를 메모없이 지나왔다는 게 문득 떠오른다. 이 사진에서 보이는 고주를 보고떠오른 것인데, 조선시대 들어 달라진 맞배지붕 양식 집의 취약한 횡력을 보강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고려시대 맞배지붕 집들은 측면에종도리까지 올라가는 어미기둥(봉정사 극락전)을 쓰거나 가운데 각기둥(수덕사 대웅전, 강릉 객사문) 같은 것으로 보강을 해주던 것이 조선시대에 들면 고주둘을 종보까지 세우는 것으로 취약한 횡력에 대한 보강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횡단면으로 봤을 때 내부 구조 단면이 측면까지 동일하게 가던 고려시대의 전형이 바뀌게 되는 것과도 관련이 있는데, 측면 종보까지 받는고주들을 세우게 되니그곳에는 마땅히 대들보가들어갈 수도 없게 된 것이다. 물론 봉정사 극락전이야 어미기둥에 고주들까지 있었어도 맞보 형식으로 해서 대들보를 두게 했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중요한 얘기를 여태 빼먹고 있다가 다 끝날 때가 되어서야 생각나다니…. 하마트면 그냥 지나칠 뻔도 했고, 이제라도 생각나니 다행이다 싶다. ^ ^

나름 꽤 많은 내용을 살펴보았는데 내부 가구구조로만 보면 무위사 극락전의 키포인트는 무엇보다굵고 커다란 대들보에 있겠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 때문에 외목도리, 주심도리를 다 받을 수 있었으며, 이것 때문에 살미첨차 뒷뿌리들로 커다란 보아지를 만들게 된 것이고, 이것 때문에 내부의 하중도리 밑 파련형대공보다 측면의 하중도리 밑 파련형대공이 훨씬 크게 되었다. 측면에는 이것 없이 고주기둥들이 종보를 받친다는 것이 큰 특징이 되며, 그 때문에 측면 살미첨차가 고주까지 나가는 인방재가 되거나 그 때문에 측면에는 주심도리 받침목을 두게 되었으니 말이다.

아마 앞으로도 공부하다보면 가보고 싶은 곳들이 더욱 많아지겠지만 참 가보고 싶은 곳이다. 건물도 건물대로 마음을 끄는데다 산 중에 들어서 있는 입지 또한 참으로 마음에 든다. 게다가 이렇게 미리 구석구석 뜯어보며 머릿속에 똑같은 집 한 채를 지어보고 가는 거니 실제로 가서는 얼마나 반갑고도 신기한 마음이 들까 싶어. 살폿 눈을 감으면 행복한 상상이 막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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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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