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 조사당

다시 부석사로 왔다. 가 봐야 할, 찾아봐야 할 건축물들이 그렇게나 많고 많은데 같은 자리만 맴돌듯이 다시 부석사에 있는 건물을 보는 것은 부석사만을 각별히 여겨서는 아니다. 지금 살펴보고 있는 것들이고려시대 주심포건물들이고, 그것을 어느정도 연대순으로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실은 수업시간 진도가 그렇게 짜여있기도 한 것이고.) 아무튼 그래서 다시 부석사로 돌아왔다. 그 말은 부석사에는 고려시대 건축물이 둘이나 있다는 것이다. 이 건물에 대한 기억은 아마 그곳을 찾을 때 산책하듯 길을 따라 걸으면서 무량수전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다 보면 원효대사가 지팡이를 꽂은 게 있는데지금껏 살아있다는 어떤 나무의 전설 같은 얘기를 기억하는 정도랄까. 그 말고는 그 건물이 어떤 모습이었는지조차 까맣게 기억나지 않는다. 조만간 다시 찾아가야 할 일이다.

부석사 조사당의 전경이다. 사진을 찾아보니기억에 가물가물 남아 있는 것도 같고, 사진을 보니까 기억을 꿰어맞춰 그런 것 같다 생각되어지는 것도 같다. 그러니기억 못한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보다시피 맞배지붕 건물이고, 기단은 다듬은 돌을 이용해 난석쌓기로 했다 한다. 그런데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건물자체가 뒷 경사지에 바짝 붙어있기 때문에 앞으로는 기단이 어느정도 나왔지만뒤쪽으로는 아주 좁아보인다. 이것은 이 건물의 처마형식이 갖는 특징에영향을 주는데,그 얘기는 측면도나 종단면도를 보면서 제대로 하는 게 나을 것이다. 기와를 보면 측면부에 박공과 목기연이 있는 곳들 뒤로동글동글 하얗게 마감이 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띄는데 이것을 와구토 마감이라 하고, 그 와구토 마감은 너새기와에만 쓰였다.

잠깐 건축용어사전을 찾아보면 그것에 대한 설명이 이렇게 꼬리를 문다.

막새를 쓰지 않는 처마 끝에서는 홍두께흙이 보이기 때문에 마구리를 백토에 강회를 많이 섞어 하얗게 발라주는데 이를 와구토라 한다. (<<건축용어사전>>, 190쪽)

목기연 개판 위에는 연함을 걸고 기와를 얹는다. 이를 날개기와 또는 너새기와라 한다. (<<건축용어사전>>, 178쪽)

맞배지붕이나 합각지붕에서 지붕 양쪽 끝, 목기연 위에 올라가는 짧은 처마의 기와를 너새기와 또는 날개기와라고 하며 한문으로 쓸 때는 당와라고 한다. (<<건축용어사전>>, 202쪽)

그러니까 부석사 조사당 건물에서 전후면의 기와말고 박공 위에서 도리방향으로 한 줄로 덮고 있는 기와를 너새기와라 하며, 백토와 강회를 섞어 그 끝을 하얗게 마감한 것을 와구토 마감이라 한다는 것이다.

부석사 조사당의 정면 모습을 도면으로 표현한도면이다. 전면의 협칸에는 살창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 어칸 중앙에는 분합문이 있다.이 분합문만 아니라면 봉정사 극락전의 입면이나 부석사 무량수전의 뒷면과 거의 비슷한 고려시대 전형적인 입면 모습이라 할 수 있다.당시 전형적인 문의 양식은 분합문이 아니라 판장문,그래서문화재연구자들은 이 분합문이 조선시대에 바꾼 것이라 보고 있다.

또한 전면의 그림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처마부가 두겹으로 되어 있는 겹처마라는 것이다. 동그랗게 표현된 서까래의 단면 안으로 조그만 방형의 단면이 들어가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 것이 보이는데, 그것은 동그란 서까래와 그 위로각재로 된 부연이 걸려 있음을 겹쳐 표현한 것으로 보여진다.전경 모습을 설명하면서 건물 뒷쪽이 가파른 경사지여서 뒤쪽으로는 공간이 별로 없음을 짚어 얘기했는데, 그 때문인지 뒷면에는 처마가 겹으로 되어있지 않다. 전면에는 겹처마, 뒷면에는 홑처마.

전면부의 겹처마를 보여주는 사진이다.외목도리 위의원기둥형 서까래, 그 위로 초매기가 가고, 초매기 위로 방형의 부연, 부연 위로 이매기, 그 위로 연암이 있고 막새기와가덮고 있다.

부석사 조사당의 가운데를 갈라서 보는 종단면이다. 도리 숫자로 보면 1, 3, 5, 오량가 건물. 오량집이면 그닥 크지 않은 건물이라 할 텐데도 이 건물은 헛첨차를 쓰고 있다. 하긴 강릉 객사문도 오량가 건물인데 헛첨차를 쓰기는 했으니.그래도 강릉 객사문은같은 오량가 건물이라 해도 기둥 높이나 주간이 길어 나름 커다란 규모를 보이고 있었다. 아무튼 부석사 조사당은 오량 맞배집이면서 헛첨차를 쓴 건물이라는 것. 처마 형식만 빼면 전후 대칭구조로 되어 있고, 솟을 합장을 쓰고 있다.역시 천정 가설이 되지 않은 연등 천정 구조이고, 서까래는 종도리에서 처마끝까지 하나로 이어지는 장연을 썼다. 같은 오량 맞배 건물인 강릉 객사문 같은 경우는 오랫동안 장연 하나로 서까래가 걸려 있었으나 해체수리를 하면서 단연과 하연으로 원형복원을 했고, 그렇게 하면서 지붕 물매가 조금 더 올라갔다.

그러한 일반적이고 기본적인 것 말고 이 종단면도에서 부석사 조사당의 특징을 찾는다면 역시 처마 양식이다. 이 종단면도로 보면 전면인 왼쪽이 겹처마, 후면인 오른쪽은 홑처마. 이렇게 전면을 겹처마로 강조하는 경우는 보통 조선시대에 복원되는 건축물에서 그러한 모습들이 자주 보이곤 하는데, 이 건물은 조선시대에 바꾼 모습이라기보다는 처음부터 그것을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그 까닭은 건물을 서 있게 하는 기단부의 형태 때문인데, 보다시피 전면은 기단의 폭이 넓고, 후면은 좁게 되어 있다. 앞서 말했듯 이 건물의 뒤는 가파른 경사지여서 워낙에 여유공간이 없었으니 기단을 더 뒤로 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그런데 일반적으로 기단은지붕의 처마선 안에 들어와 있게 한다. 그래서물이 고이지 않게 하려고 처마의 길이를 기단 폭보다 넓게 빼는 것이다. 그러니 이 건물에서는 앞쪽으로 기단 폭을 넓게 내면서 전면의 처마도 겹처마로 하여 더 뻗게 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 한 가지. 대들보가 종보를 받치고 있는 대공이 이제까지 살펴온 건물들과는 사뭇 다르다. 그렇담 실제 사진을 찾아보면서 다시.

봉정사 극락전은 대들보 위에 복화반이 놓였고, 방형의 중도리를 받아주는 초방이 그 위로 겹쳐지면서 종보를 받았다. 부석사 무량수전에서는 중도리를 받는 계량(혹은 초방, 혹은 포인방)이 중첩해 있으면서 대들보와 종보 사이를 받쳤다. 수덕사 대웅전에서는 대들보 위에 화반, 화반 위에 우미량이 종보 밑에서 시작하며 그 사이를 받았다. 강릉 객사문 역시 수덕사 대웅전처럼 화반과 우미량이었다. 그런데 여기, 부석사 조사당에서는 대공이 첨차 같은 것이 가로세로로 조립되어 짜여 있다. 이것, 어디에서 들어본 기억이 있질 않나? 그래, 맞다. 수덕사의 종대공이 어떤 양식인가를 익히느라 찾아보다가 그것은 포짜임과 화반초각이 동시에 되어 있는 화반형포대공이라는 걸 찾아낼 때.여기 부석사 조사당에서 대들보위에 놓여 종보를 받쳐주는 것은 바로 포대공이라 하는 것이다. 솔직히나는 잠시 착각하기도 했는데, 교재에솟을합장이 사용되었다는 말과 포대공이 쓰였다는 말이 있어 그것을 종대공을 설명하는 말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종대공 쪽을 보면양쪽으로 솟을합장이 人자 모양으로잡아주고 있고, 종보 위에서 도리를 받쳐주는 것은 포대공이 아니라사다리꼴의 판대공이다. 그래서 어,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며그 부분을 크게 보여주는 사진이 없나 더 찾아보며, 사진으로 봐서판대공이지 입체로 보면 포로 짜여진 건가? 하고아리송한상태였는데, 아하!대들보 위에서 종보를 받치는 부재에 눈이 가니 그 의문이 풀리는 거였다.이렇듯 대공이란 종도리를 받는 부재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종보를 받는,상부구조 내에서 수직으로 하중을 받아주는 부재를 대공이라 하는 것이다. 잠시 착각, 그리고는 의문 해결.

부석사 조사당의 평면도. 지금껏 다른 건물들에서 평면도를 볼 때면가장 먼저 꼭 짚었던 것들이 있다.내부 가구구조가 측면까지 동일하게 이어지는가, 그리고 보의 단면이 역항아리 모양인가?그 둘이 고려시대 전형적인 양식이었고, 앞서 살핀 건물들은 모두 그러했다. 그런데 부석사 조사당을 보면 하나는 그렇다고, 다른 한가지는 살짝 갸우뚱이다.내부 단면구조가 측면까지 반복하는가? 그렇다. 보의 단면이 역항아리 모양인가? 글쎄그런가?고개가 갸웃해지는 건 왠지 이제껏 봤던 것처럼 펑퍼짐하게 둥글다가 잘록해지는 모양에는 못미치는 것 같아서다. 하지만 이것도 아직은 역항아리보라고 설명을 하나보다.그 모양이 좀 약해지기는 했지만 아직 역항아리보를 쓰고 있는 거라고.

왼쪽이 대들보, 오른쪽은 종보.이렇게 항아리 모양은 점점 약해지다가 조선초기 양식인 무위사 극락전 쯤 가서는 살짝 귀만 날린 단면으로 바뀌게 된다. 항아리가 조금씩 약해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역항아리,다이어트한 역항아리다.

또 이 평면도에서 볼 수 있는 것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눈에 그리 잘 띄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강의 시간에 설명을 듣고도 도면에서찾지를 못했는데, 고건축박물관 모형건물을 만져보고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수덕사 대웅전의 측면부에도 있던 것, 운두라 하는창방 위로 볼록 나온 소로 받침턱.이제는 그 위치가 어디인지아는데도도면으로 봐서는 눈을 씻고 봐야 살짝 그렇다는 느낌이 드는 정도니 아이고, 아이고. 그러나 아무튼축소 모형에서지만 실제로 확인을 했다. 창방 위 볼록 나온 부분이라던데, 도무지 어디냐 하면서 창방을 쓰다듬듯 쓱 훑으며 지나니 과연 볼록 튀어나온것이 있고 그 위로 소로가 놓여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심봤다! 라도 외치듯 기뻐하며 사진을 찍었는데, 아마 그 기쁨이 너무 커서였는지 사진이 많이 흔들렸다. 어쨌든, 기둥 옆으로 나가는 창방에서 소로 밑 부분 살짝 올라가 있는 부분이 저기에 있다. 수덕사 대웅전에서는 측면 각기둥 옆 창방과 좌우측 고주의 창방 위에 운두가 있었는데, 여기 부석사 조사당에서는 측면부가 아니라 정면과 후면에 운두가 있다. 수덕사를 살펴볼 때 얘기한대로 창방에 이 운두라는 것을 두려면 손이 너무 많이 가고 그만큼 나무 손실이 크기 때문에 이후에는 잘 사용하지 않게 된다.

측면에서 봤을 때의 도면, 모형 사진, 실제 사진이다. 도면을 보면 종단면을 그린 것과 그리 다를 바가 없다. 다른 게 하나 있다면 종단면에서는 없던 창방이 보인다는 것 뿐. 이미 종단면도에서 살펴본 것처럼 종보 위로 솟을합장과 대공이 종도리를 받는 모습이 보이고, 대들보 위에서는 포로 짜여진 포대공이 종보를 받는 게 보인다. 아까 올린 종단면도에서는 왼쪽 기단이 넓고 지붕이 겹처마, 그러니까 왼쪽이 전면이었는데 이 측면도에서는 오른쪽이 전면이 된다. 기단도 오른쪽이 넓고, 그러니 오른쪽이 겹처마. 그러니까 저쪽 건너편에서 보고 그림이겠다 할 수 있다. 처마와 기단 말고는 어차피 전후대칭이니 시점을 이쪽으로 두건 저쪽으로 두건 마찬가지일 테니. 여기 부석사 조사당에는 측면부에 문이 없다. 이제껏 살펴본 건물들에서 측면에 문이 있던 것은 수덕사 대웅전 하나 뿐.

아참, 그런데 이 건물도 맞배지붕 건물이라 하지 않았나? 맞배지붕 건물이 나올 때마다 얘기하던 거, 횡력에 취약함. 그런데 이 부석사 조사당은 횡력에 취약한 것을 보완해주기 위한 보강재가 하나도 쓰이지 않았다. 중도리가 방형으로 되어 있지도 않고, 측면 벽부에 가운뎃 기둥 같은 것도 없다. 워낙 작은 건물이어서 그렇게까지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아 그런 것인지, 암튼 그렇다.개구부가 하나도 없는부석사조사당의 측면 벽부 내부에는탱화가 그려져 있었다. 사천왕상과 보살상 그림이라 하는데, 이것들은 고려시대 그림들 가운데 아주 희귀한 것으로 고분 벽화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그림으로 꼽혀지는 거란다. 이 그림들은 1918년 해체보수할 때 벽을 그대로 떼어유리상자에 담아 무량수전에 보관하고 있다 한다.

벽화들도 국보(19호), 부석사 조사당의 건립년대가 고려 우왕 때인 1377년이니 이것도 같은 시기에 그렸을 거라 추정하고 있다.

부석사 조사당의 뒷면이다. 맨 앞에서 본 정면의 도면과 다른 점은 두가지 뿐이다.뒷면의 지붕은 서까래 위에 부연이 따로 없는 홑처마이고, 앞문에는고려시대 전형적인 입면 양식을 띈 창과 문 -문은 비록 조선시대 때 분합문으로바꿔단 것으로 보이지만 - 을 두었는데 뒷면은 문이고 창이고 아무 것도 없다.처마 끝 동그랗게 보이는 서까래들을 보면전면에서는 그 동그라미에 겹치게 조그만 네모 그림이 있었는데, 이 뒷면 그림에는 그대로 동그라미가 있다.네모로 표현된 부연이 없다는 뜻. 그리고 문과 창이 없는 것은 보이는 그대로다. 지금껏 본 건물들 가운데 '문' 건물인 강릉 객사문을 빼고는 뒷문이 없는 건 수덕사 대웅전 뿐이었다. 그것은문 기능을 거의 하지 않는 정면 어칸에 문이 하나 있고 양 측면에 문을냈는데, 부석사 조사당은 정면 어칸 중앙에 문이 하나 있을 뿐 측면에도 뒷면에도 문이 없다. 하긴, 이 건물 뒤는 바로 경사지와 이어져 사람이 다닐만한 공간이 거의 없질 않았나, 그러니 문을 낸다 해도 다닐만한 곳이 못되었을 것이다. 모자이크처럼 표현된 기단은 앞서 말한 것처럼 반가공 난석쌓기의 모습이다.

부석사 조사당의 평면도. 전면으로 세 칸, 측면으로 한 칸 짜리 조그만 건물이다. 내부는 모두 전바닥으로 되어 있다 하는데, 그것을 보여주는 사진은 인터넷에서도 아직 못찾았다. 조만간 가보게 된다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와야 할 것.

도면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이 건물은 평면 바닥의 삼분의 일 쯤이 암맥 위에 놓여 있다 한다. 워낙 부석사는 용과 관련된 설화가 많은데, 무량수전만 해도 밑에 용이 들어가 있다더니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도 용의 등뼈 모양 암맥이 확인되었다던가. 조사당 역시 바위가 커다랗게 묻혀 있는 땅 위에 서 있다 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살펴보게 되는 도면, 공포도다.일단 첫 눈에도 앞서 보아온 것보다 훨씬 간단, 단순해 보인다. 주두 밑에서부터 처마내밀기를 하는 헛첨차 양식이며, 그 위에는 외출목과 내출목이 비대칭인 살미첨차가 있고, 행공첨차니 초방 같은 외목도리 받침부재 없이 바로 보머리가 외목도리와 장혀를 받는다.주심열에서도단순한 구조이기는 마찬가지다.기둥머리주두와 창방 위로 도리방향 대첨차가 바로 놓이고, 그 위로 보와 결구된뜬장혀가 지나간 뒤 승두(혹은 초방)이라는 받침목 하나를 두고 주심도리-장혀가 바로 놓인다. 그러니까 조사당 공포부를 기억하려면 뭐가 있고, 뭐가 놓이는지를 봐야 하는 게 아니라 뭐가 없고, 또 뭐가 없이 놓이는지를 눈여겨보는 게 빠를지 모르겠다.

공포부만 따로 모형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인데, 확인차 다시 한 번 보면 일단 첨차와 첨차가 소로라는 부재를 두고 서로 떨어져 있다. 그리고 첨차의 어깨 부분이 오목하게 파여있는 공안이라 하는 것이 보이고, 창방은 장혀나첨차 부재와 굵기가 비슷한 수장폭으로 되어 있는 것도 충분히 확인 가능하다. 지금껏 외목도리는 봉정사 극락전을 빼고, 모든 건물(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강릉 객사전)이 다 초방이라 하는 받침목을 둔뒤 행공첨차와 결구된 보머리 위에 올라갔다. 그러나 봉정사 극락전에서처럼 부석사 대웅전의 외목도리는 따로 받침 부재랄 것이 없이 보머리 위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주심도리는 외목도리를 초방이 받치는 경우(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강릉 객사문)에는 부석사는 그 초방 위에 주심도리의 초방을 하나 더, 수덕사 대웅전과 강릉 객사문은 그 초방 위에 우미량을 받침재로쓰면서 얹히게 되었는데, 이 부석사 조사당의 주심도리는애초 외목도리 쪽에서 오는 초방이라는 게 없으니,대들보 위로 승두하나만을 받치고 얹히고 있다. 마치 봉정사 극락전의 주심도리가대들보 위에 승두를 놓고 얹히듯이 말이다.

사진으로 보면 이러한 모습이다. 주두 밑에서 처마내밀기를 하는 헛첨차가 나오고, 그 위에 소로를 받친 뒤 보 방향으로는 소첨차 없이 바로 대첨차, 그리고 도리방향으로는 외2출목의 살미첨차가 십자로 결구되어 있다. 그리곤 외목도리 쪽은 그 살미첨차의 외2출목 자리에서 바로소로 위로 나오는 보머리에외목도리와 장혀가 걸려 있다. 주심도리 쪽은 도리방향으로 뜬장혀가 보와 결구되어 지나가면서 그 위로 승두라는 받침재를 놓고 주심도리-장혀가 얹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사진으로 볼 때는 주심도리 밑으로 받침부재가 놓여 있는 것이 눈으로 확인이 안 된다. 그건 보가 지나가는 밑으로 순각판이라 하는 나무판이 마치 천정처럼 가리고 있기 때문인데, 이 사진에서도 역시 그것이 꽉 막고 있다. 도면에서 확인하자면 왼쪽 위에 있는 그림을 볼 때 외목도리 밑에서부터 뜬장혀까지 까맣게 빗금으로 표시한 얇은 널판 단면이다. 그런데 이 사진에서는 빛이 그래서 그런지 순각판이 마치 하나의 가로 인방재처럼 보여 착각을 하게도 한다. 처음에는 그래서 한참을 들여다 봤네.

이 사진으로 보면 그 순각판이라는 것이 잘 알게끔 보여진다. 그러니 살미 첨차 위로 는 보머리 나온 것이 살짝 모여지고 거기에 걸려 있는 외목도리 역시 살짝 보여질 뿐이다. 기둥열에서 올라가는 주심도리 쪽은 아예 보이지가 않아. 사실 순각판이라 하는 것은 주로 다포 건물에서 출목 사이에 생기는 공간으로 인해 천정이 노출되는 걸 가리기 위한 부재인데, 부석사 조사당은 주심포 양식인데도 이것을 사용한 것이다.

이 사진을 보면서 몇 가지 더 확인되는 것이 있는데 그 하나는 보머리의 초각 양식이다. 봉정사 극락전은 그냥 이분두로 깎았지만 부석사 무량수전부터 갈고리 모양으로, 수덕사 대웅전과 강릉 객사문에서는 좀 더 날렵하고 뾰족한 모양으로 초각이 되어 있었는데, 여기 부석사 조사당의 보머리는 거꾸로 돌아간 듯 다시 이분두로 깎여 있다. 참 여러 모로 봉정사 극락전과 부석사 조사당은 닮은 점이 많다. 입면의 구성에서부터 부석사 조사당 문이 분합문이라는 것만 달랐지 거의 비슷했고, 공포부에 와서는 이것이 헛첨차를 썼다는 게 좀 큰 차이이기는 하지만, 외목도리가 초방 없이 바로 보머리에 걸린달지, 주심도리가 승두라는 받침재를 쓰고 있달지, 또 여기에서 확인하는 것처럼 이분두 초각의 보머리까지.

보머리 초각은 그러한데, 그렇담 첨차 마구리와 밑면은 어떤가? 여기 부석사 조사당의 첨차들은 빗각으로 깎인 뒤 첨차 밑면이 흔히 보던 연화두형이 아니라단순하게 2단으로 깎아놓았다.이렇게 첨차 밑 단면을 2단으로 사절한 포작기법은다른 곳에서는 그 예를 찾지 못하는 거라 하여 건축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진다 한다.

이 사진은 정면에서 측면으로 꺾어지는 귓기둥 위에 올라간 공포이다. 사진의 왼쪽으로 대들보와 종보, 솟을합장 따위가 보이니 거기가 측면부이고, 오른쪽이 정면부가 되는 모서리가 되겠다. 이 귓기둥 위에서도 공포부는 평주 위에서와 다를 바 없이 짜 올려지고 있고, 그래서 도리방향으로 나가는 부재들은 그대로 측면부에 드러나고 있다.

이제 부석사 조사당 건물의 공포부에서 가장 특징이 되는 점에 대한 설명 하나만을 남겨두고 있다. "창방이 공포 결구에 직접적으로 관여가 된 유일한 사례"라는 것. 부석사 조사당에서는 공포를 짤 때 주두 위 도리방향 첨차가 바로 대첨차부터 시작한다.지금까지 헛첨차를 쓴수덕사 대웅전이나 강릉 객사문에서는 헛첨차라는 주두 밑 보방향 처마내밀기 때문에 주두 위에서는보방향 소첨차를 생략하고 바로 살미첨차라 하는 긴 첨차를 쓴다고 했다. 그러나 도리방향에서는아직 소첨차라는 게 없었으니 주두 위에 소첨차를 놓고, 그 위로는 뜬장혀를 한 번 지나게 한 뒤 그위에서 대첨차를 올리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보방향 소첨차는 물론 도리방향으로도 소첨차 없이 바로 대첨차부터 시작한다.그렇담 소첨차는 어떻게되는가?도리방향 소첨차는쓰이지 않고 있지만대첨차 밑에 있는 창방을 마치 소첨차처럼 단청을 넣으면 그것으로 하나의 소첨차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창방 자체를 하나의 소첨차로 보고대첨차부터 시작하는 것이니 이러한 모습을'창방이 공포 결구에 직접 간여'했다고 보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방식을 쓴 까닭은건물 자체가 워낙 작기 때문일 텐데,그래서 규모는 작지만 사뭇 장엄하게 보도록 하려는 노력이었을 거라 보여진다. 그러니 이 건물은작은 규모이지만 나름의 자존심을 지키려 한것이라 말해지곤 한다. 아무래도 의상대사를 모신 건물이니건물의 규모를 떠나 나름의 위계를 두려 하지 않았겠나 하는 것이다.

공포부를 모형으로 만든 것으로 다시 한 번 보면 기둥머리와 주두 옆 창방에 소로가 놓인 운두가 있는 곳부터 빗각으로 그림을 그려 내려오면 하나의 소첨차 모양으로 단청을 할 수 있지 않았겠나 하는 것이다.


모형을 찍어놓은 사진들을 다시 살피다가 그 사진으로 한 가지 더 확인할 수 있는 게 있었다. 주심도리의 받침부재인 승두라는 것. 실제 사진으로 볼 때는 순각판과 벽체에 가려져 눈도장을 찍고자 해도 그럴 수가 없었는데, 찍어온 사진들 가운데 하나를 보다 보니 주심도리 밑 받침목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은 공포를 측면에서 찍은, 말하자면 모형으로 찍은 공포도 사진인데 주심도리 받침부재가 눈에 보인다. 바깥쪽은 춤이 깊고, 안쪽은 춤이 낮은.



갑자기 공포도들이 마구 튀어나왔다. 공포 도면들을 이렇게 한 데 모아 본 것은 굳이 여기에서 한 번 더 공포 짜임을 다시 따져보자는 것이 아니고, 무언가 한 가지를 확인하고 싶어서다. 사실 앞에서 횡단면도를 보며 몇 가지 메모들을 할 때, 공책에 필기되어 있는 내용 한 가지를 일부러 지나친 것이 있다.그게 뭐였냐 하면, '부석사 조사당에서는 단장혀를 사용하지 않았다'라는 것인데, 사진으로 혹은 횡단면의 도면으로는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그걸 확인시켜주는 것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생각난 것이 외목도리를 받치던 단장혀들. 아니나다를까 앞서 살펴본 건물들의 공포도들을 찾아보니 부석사 조사당만 빼고 모든 건물이 외목도리 밑을 단장혀가 받고 있었다. 약간의 초각으로 끝을 갸름하게 한 것도 있지만 어쨌든 네 건물에서는 모두 외목도리를 받는 장혀가 단장혀다.그에 반해부석사 조사당에서는도리 밑에 있는 장혀가 도리와 함께 계속 길게 이어진다.주심포 위에서 도리만 받쳐주면서 있는 게 아니라 끝에서 끝까지 하나로 이어지며 외목도리를 받아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지금 실제 건물에는장혀가 처지거나 해서 도리와 밀착되지 못한 모습이라던데…. 아무래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와야겠지. 아무튼 이 단면들만 조로록 놓고 비교해 봐도 지금껏 쓰이던 단장혀가 부석사 조사당에서만큼은 쓰이지가 않고 있다.

소로와 주두의 도면들. 부석사 조사당에 와서는 소로에도 주두에도 굽이랄 것이 없다. 뿐 아니라 내반곡도 가지고 있지 않다. 주두굽이 없는 것은 신라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이나 봉정사극락전의 것과 닮아 있어 그 수법을 이어받은 것으로 건축사에서 중요시 여기는 대목이다.


원효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그게 천 년 넘게 살아왔다는 선비화. 조사당에 대해 내가 기억하는 게 틀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지금도 이렇게 조사당 건물의 오른쪽 퇴칸 앞 기단에 철창으로 된 막으로 보호되어 있다 한다.

아, 부석사 조사당.조그맣고 위엄있는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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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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