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회루 하나를 붙잡고 닷새 째 씨름. 아직 멀었지만 우선 이 정도에서 일단락.진이 다 빠지는 것 같지만 그래도 좋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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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면(주열) 배치 양식의 구조

TOPIC 02 : 주열에 의한 평면 형태

5.장방형 평면 (정치법)

-경복궁 경회루 (7X5칸)

- 부석사 무량수전 (5X3칸)

- 수덕사 대웅전 (3X4칸)

- 해인사 장경판고 (15X2칸)

장방형 평면은 우리 건축사에서 보면 신석기 후기 때부터 등장하기 시작,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청동기 때부터다. 장방형 평면의 발달은 인류 주거 문화에 있어서는 아주 획기적인 발견이라 할 만하다. 평면 구성을 장방형으로 하게 되면서 건물의 규모를 원하는만큼 키울 수 있는 원리를 깨우치게 되었다. 그래서 역대로 가장 많이 지어진 건물들을 보면 동서양을 막론해 장방형이 가장 많다. 이 장방형 평면 양식은 굉장히 다양한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겠는데 경복궁 경회루나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해인사 장경판고 같은 것들은 모두 정치법이 적용된 장방형의 평면이라 하겠다.

경복궁 경회루

경복궁 경회루에서는 기둥의 원리를 주의깊게 보아야 한다. 건물의 평면 형태를 보면 안의 세칸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칸, 가장 바깥을 둘러싸고 있는 세 개의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가장 바깥을 둘러싸고 있는 기둥을 보면 굉장히 긴 장초석이 눈에 띈다. 초석의 길이가 거의 기둥 하나 정도가 되는 데다가 겉에는 각기둥의 초석을 쓰고, 안에는 원통형의 장초석을 썼다. 그렇게 쓴 까닭은 천원지방설의 원리를 도입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보면 중앙의 세 칸을 삼재,역시 유교에서 말하는 삼재를 도입한 것인데 각 칸들이 전, 지, 인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곳에는 바닥 높이를 한 단씩 높여주었다. 또한 그 세 칸에는 모두 분합문을 달아 개폐가 되도록 되어 있다. 그 다음 가운데의 세 칸을 둘러싸고 있는 여덟 개의 기둥은 팔괘(건, 감, 간,진, 태, 곤, 이, 손)를 의미한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세 칸을 둘러싸고 있는위쪽 다섯 칸,아래쪽 다섯 칸, 양쪽으로 한 칸 해서 열두 개의 칸이 나오는데 이 열둘이라는 숫자는 열두 달을 의미해 1월부터 12월까지를 한 칸씩 대응시키는 것이다. 이 열두 칸을 벽면으로 치면 모두 열여섯 개가 되는데, 이 벽마다 사분합문을 하나씩 달아놓았으니 내진을 구성하는 문의 수는 모두 64개가 된다. 이 64라는 숫자는 64괘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외진을 구성하고 있는 스물 네 개의 기둥은 24절기와 24방위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학자들마다 조금씩 다를 수가 있는데, 경복궁에 있는 민속박물관의 해석을 따르자면 이렇다는 것이다.

어쨌든 경회루의 평면은 가운데 세 칸을 놓고 겉으로 한 칸씩 돌리고, 그 다음에 한 칸씩 한 번 더 돌리면 그대로 나오는 방형의 평면이다.

(경회루와 같은 경우는방형의 평면을 지니고 있다고 단순히 이해하고 넘어가기에는 모자란 것이 많이 있다.그것의구성 원리부터 조형원리까지, 그리고 몇 차례의 중수를 거치면서 그 의의와 면모가 어떠했는지까지이해하고 있어야 그나마 이 건물을 알아가는데 그나마 바탕이되겠지싶기 때문이다.이에 참고가 될 만한 인터넷게시물들을 몇 개 골라보았다.)

경복궁 경회루 - 국보 제 224호 (옮겨온 곳)

태조 때 경복궁 서북쪽에 작은 누각을 지었으나,

대통 12년(1412) 4월 보다 큰 규모로 새롭게 누각을 짓고,

같은 해 5월 하륜에게 명하여 이름을 '경회루'라고 했다.

경회(慶會)의 뜻은 하륜이 태종의 명을 받들어 올린 기(記)에

"올바른 정사를 펴는 임금은 올바른 사람을 얻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으니,

올바른 사람을 얻어야만 '경회(慶會)'라고 할 수 있다"고 밝히며

이는 곧 "임금과 신하가 덕으로써 서로 만나는 것을 말한다"고 적고 있다.

태종 당시 원래 이곳은 사신의 접대 등을 목적으로 지어졌다.

하지만 그 외에도 과거시험이나 활쏘기 등을 열거나

공신들에게 연회를 베푸는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어 왔다.

또한 가뭄이 들면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 뒤 성종 5년(1475) 퇴락한 경회루를 대대적으로 개축하게 된다.

이 때 경회루 돌기둥에는 용을 새겨 넣는 등 다소 화려하게 꾸미기도 한다.

이 화려한 모습을 보고 유구(오키나와)의 사신이 "용이 물 속에 비치어

그 모습이 장관"이라며 극찬했다는 이야기가 성현의 <용재총화>에 전하고 있을 정도로

경회루의 모습은 매우 화려했다고 한다.

또한 연산 12년(1506)에는 경회루 서쪽에 만세산을 쌓고

금은 비단으로 화려하게 꾸미고 흥청(기생)에게 가무를 추게 했으며

황룡주(黃龍舟)를 타고 만세산을 왕해하며 사치를 일삼기도 했다.

하지만 경회루의 이러한 모습도 임진왜란을 거치며 완전 소실되어 폐허로 남게 된다.

그후 경회루는 고종 4년(1867) 4월에 재건되었지만

일제시기에 경회루 주변 담장이 모두 헐린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경회루 동쪽 담장이 복원되었으며

2층 경회루로 올라가서 관람할 수 있도록 특별관람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그 밖에 경회루 부속 건물처럼 경회루 북쪽에 있는 육각정은

이승만 대통령 시절 대통령을 위한 휴식과 낚시를 목적으로 지어진

하향정(荷香亭)이라고 한다.

경회루의 현판 글씨는 건립 무렵 세자였던 양녕대군이 썼으나

지금의 현판은 '조일강화조약(1876)'을 맺을 때 접견대신을 지냈던 신헌(申櫶)의 글씨다.

한편 경회루는 단일 누각으로 국내 최대규모의 웅장함을 자랑하지만,

그 건축적 특성면에서 심오한 우주의 원리를 담고 있다.

이는 고종 2년(1865) 경회루 재건공사가 시작될 무렵

경회루의 평면과 세부형태를 주역의 원리로 설명한

정학순(丁學洵)의 <경회루전도>에 잘 나타나 있다.

정학순은 <경회루전도>를 통해 경회루의 원리를 밝히는 가운데

경회루는 불을 억제하기 위해 지어졌다고 밝히면서

그 속에 깃든 뜻풀이를 시도했다.

즉 경회루로 건너가는 3개의 다리는 해, 달, 별의 삼광(三光)을 뜻하고,

다리를 건너 경회루 기단 양끝에 있는 2개의 문은 음양(陰陽)을 뜻한다고 한다.

또한 경회루의 바깥 돌기둥이 네모지고 안쪽 기둥이 둥근 것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우주관을 드러내 준다고 한다.

경회루의 상층은 3중으로 되어 있는데

정중앙의 1중 3간은 천지인(天地人) 삼재를 의미하며,

이 3간의 기둥을 이루고 있는 8개의 기둥은 8괘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 다음 1중을 둘러싸고 있는 2중의 12간은 일년 12달을 의미하고,

기둥 16개의 각 기둥 사이에 네짝의 문이 달려 있어 이는 64궤를 의미한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2중을 둘러싸고 있는 3중의 24개의 기둥은 24절기를 상징한다고 한다.

또 동으로 만든 용 두 마리를 연못 북쪽에 넣어두었는데 이는 불을 막기 위해서라고 적고 있다.

실제로 1997년 11월 경회루 연못의 물을 빼고 청소를 하던 도중에

북쪽 못 바닥에서 동으로 만든 용이 출토되기도 했다.

경회루는 남북 113m, 동서 128m의 연못 가운데 2층 누각을 지어 세웠으며

정면 7간 측면 5간 총 35간의 규모에 이익공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경회루는 현재 국보 224호로 지정되어 있다.





(발길 닿는대로... 블로그에서옮겨온 사진과 글)

경회루(慶會樓)

경회루는 침전 영역 서쪽에 위치한 연못 안에 조성된 누각이다. 외국사신의 접대나 임금과 신하 사이에 벌어지는 연회장소로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경복궁 창건 당시는 작은 누각이었던 것을 태종 12년(1412)에 크게 연못을 파고 지금과 같은 규모로 만들었다. 같은 해 5월 하륜에게 명하여 이름을 '경회루'라고 했다. 그 후 성종 때 건물이 기울어져 다시 고쳐 지었는데 돌기둥에 용과 꽃 장식을 하여 화려하게 치장하고, 연산군 때에는 연못 안 인공섬에 만세산을 조성하고, 그곳에 월궁을 꾸며 조화를 장식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 경회루 건물은 없어졌지만, 경복궁이 중건될 때까지 연못은 나라에 가뭄이 들 때마다 기우제를 지내는 곳으로 이용되었다.

현재의 경회루는 고종 4년(1867)에 중건된 것이다. 다시 지어진 경복궁의 많은 건물들이 여러가지 이유로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회루는 중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여 왔다. 연못 주변에는 담장이 둘러싸여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동, 서, 남, 북의 담장이 철거되었으며, 2004~2005년에 각각 북쪽과 동쪽 담장이 복원되었다. 경회루로 가는 3개의 돌다리에는 벽사의 의미를 가진 동물상이 새겨진 엄지기둥을 놓았다.

경회루 중건에 앞서 이 건물의 공간구성을 역(易)의 원리에 기초하여 풀이한 글이 쓰여졌는데 정학순이라는 사람이 적은 <경회루전도>이다. 여기에는 경회루가 불을 억제하기 위하여 육육궁의 원리에 따라 지어졌다고 적혀있다. 6은 본래 8괘에서 큰 물을 의미하는 수이며 경회루를 구성하고 있는 공간과 구조부재의 개수등이 6궁의 원리를 따랐다는 것이다. 경회루 축조에 응용된 우주의 원리를 <경회루전도>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에 따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정학순은 경회루의 평면을 4방 3중 구조로 정의하고 이를 중국 상고시대에 나타났다고 전하는 신비한 도형인 하도(河圖 : 주역의 기본이 된 그림)의 모습이라고 적고 있다. 또 물과 불을 능히 다스리는 용 두 마리를 경회루의 연못 북쪽에 넣었다는 것이다. 북쪽에 용을 넣은 것은 생성되는 물로써 불을 제압하려는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

(내용 발췌 : 경복궁,한국의 재발견)

경회루


경회루 좌우측면


겨울의 경회루 전경

겨울 눈과 경회루

하향정과 북쪽 담장

얼어붙은 연못 위로 하얗게 눈이 내려있다.

부속 정자 하향정 - 육모지붕의 이 하향정은 궁궐과는 인연이 먼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낚시를 즐기기 위해 지은 시설일 뿐이다.

새로 복원한 경회루 북쪽 진거문

진거문에서 본 경회루뒷 모습

경회루 동북쪽 담에서 본 경회루 전경

만시문 - 경회루 뒷편 북쪽 만시문은 연회 때 잔치 음식을 장만하는 숙설소 방향으로 통한다.

경회루 뒷편 하향정 옆의 관필문

새로 복원한 경회루 북쪽 담장

경회루 전경, 겨울 눈왔던 푸근한 날

졍회루 전경



경회루 전경

경회루 전경


경회루 전경 - 봄


경회루와 하향정

경회루 뒷편 뜰과 석수


경회루 동쪽 담의 가운데 문인 함홍문. 경회루는 원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지금은 동쪽과 북쪽만 복원되었다. 서쪽 담장이 헐리기 전 천일문이 있었고, 수정전이 있는 남쪽으로는 경화문이 있었다 한다.


복원한 경회루 이견문과 자시문. 이견문은 대재문을지나 교태전으로 통하는 문이고, 자시문은 경회루로 통하는 임금의 전용문으로 강녕전 내성문을 통한다.

경회루 앞 연못, 멀리 보이는 북악산.

경회루 전경. 추운 겨울 얼어버린 연못.

경복궁(景福宮) - 태원전(泰元殿)과 경회루(慶會樓)

- 교동인씨 종친회 까페에서 퍼옴

경복궁의 나머지 부분 태원전과 경회루 그리고 궐내 각사자리의 수정전이다.

11, 12, 13번의 순서이다.

집옥재에서 태원전으로 향한다.

태원전 앞쪽 모습으로 원래 건물이 있던 자리인데 현재 비어있다.

태원전이다.

태원전(泰元殿)

경복궁의 서북쪽 일대는 빈전(殯殿)이나 혼전(魂殿), 영전(靈殿) 같은 제사와 관련된 전각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빈전은 왕실에 돌아가신 분이 있을 때 관을 모셔두는 곳이고, 혼전은 종묘에 모실 때까지 만 2년 동안 위패를 모시는 곳이며, 영전은 돌아가신분의 초상화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태원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시던 건물이다. 나중에는 빈전이나 혼전으로도 쓰였다.

이곳은 궁 안 외진 곳이어서 한적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고종은 태원전 재실인 공묵재에 머물면서 신하들을 만나보는 일이 많았다. 태원전 건물은 20세기 초에 철거되었다가 지금 옛 모습대로 건물이 복원되었다. 건물은 제사지내는 집답게 단정하고 엄숙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문 안의 문

작은 문도 무척 많아 어디가 어디인지 헷갈린다.

이 안이 태원전이다.

복도각



흥미로운 것은 문이 두 개다. 무언가 이유가 있을 텐데...

문으로 들어가니 영사재

미로같은 태원전이다.

옆의 건물도 복원된지 얼마 안 되어서 무척 깨끗했다.

태원전을 나와 경회루로 향한다.

향원지에서 나오는 물이 경회루로 흐르는데, 그 수로다.

경회루와 연못

경회루 뒤편 담벼락에 조그만 육각정이 붙어있다. 한두 사람 들어가면 꽉 찰 것 같다. 이 정자는 조선왕조와 상관이 없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개인 낚시터였다. 그러고보니 청와대(당시는 경무대)가 지척이다. 연못엔 셀 수 없을만큼 많은 물고기가 있다. 적적한 밤이면 예서 낚싯대를 기울였다고 한다. 참고로 하나 더, 경회루 연못에는 동용(銅龍)이 있다. 97년 연못의 물을 뺐을 때 발견됐다. 다시 물에 넣었는데 바로 그곳이 하향정 왼편이다.

종 목 : 국보 제 224호

명 칭 : 경복궁 경회루(景福宮 慶會樓)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궁궐

수량/면적 : 1동

지 정 일: 1985. 01. 08

소 재 지 : 서울 종로구 세종로 1-1 경복궁

시 대 : 조선시대

소유자 : 국유

관 리 자 : 경복궁

경복궁 근정전 서북쪽 연못 안에 세운 경회루는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의 경회루는 작은 규모였으나, 조선 태종 12년(1412)에 연못을 넓히면서 크게 다시 지었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돌기둥만 남은 상태로 유지되어 오다가 270여 년이 지난 고종 4년(1867)에경복궁을 고쳐 지으면서 경회루도 다시 지었다. 연못 속에 잘 다듬은 긴 돌로 둑을 쌓아 네모 반듯한 섬을 만들고 그 안에 누각을 세웠으며, 돌다리 3개를 놓아 땅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이 연못에서 파낸 흙으로는 왕비의 침전 뒤편에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앞면 7칸, 옆면 5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누각건물에서 많이 보이는 간결한 형태로 꾸몄다. 태종 때에는 48개의 기둥에 꿈틀거리는 용을 조각하였으나(다른 자료들에서는 기둥에 용을 조각한 것은 성종 때라고 나오던데..), 다시 지으면서 지금과 같이 간결하게 바깥쪽에는 네모난 기둥을, 안쪽에는 둥근 기둥을 세웠다. 1층 바닥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고 2층 바닥은 마루를 깔았는데, 마루 높이를 달리하여 지위에 따라 앉도록 하였다.

경복궁 경회루는 우리나라에서 단일 평면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누각으로, 간결하면서도 호화롭게 장식한 조선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소중한 건축 문화재이다.

경회루, 통영의 세병관 그리고 여수의 진남관이 같은 규모이다.

현재의 경회루는 고종 4년(1867)에 중건된 것이다. 다시 지어진 경복궁의 많은 건물들이 여러가지 이유로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회루는 중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여 왔다. 연못 주변에는 담장이 둘러싸여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동서남북의 담장이 철거되었으며, 2004년~2005년에 각각 북쪽과 동쪽 담장이 복원되었다. 경회루로 가는 3개의 돌다리에는 벽사의 의미를 가진 동물상이 새겨진 엄지기둥을 놓았다.


경회루 중건에 앞서 이 건물의 공간구성을 역(易)의 원리에 기초하여 풀이한 글이 쓰여졌는데 정학순이라는 사람이 적은 <경회루 전도>이다. 여기에는 경회루가 불을 억제하기 위하여 육육궁의 원리에 따라 지어졌다고 적혀 있다. 6은 본래 8괘에서 큰 물을 의미하는 수이며 경회루를 구성하고 있는 공간과 구조 부재의 개수 등이 6궁의 원리를 따랐다는 것이다. 경회루 축조에 응용된 우주의 원리를 <경회루 전도>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에 따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정학순은 경회루의 평면을 4방 3중 구조로 정의하고 이를 중국 상고시대에 나타났다고 전하는 신비한 도형인 하도(河圖 :주역의 기본이 된 그림)의 모습이라고 적고 있다. 또 물과 불을 능히 다스리는 용 두 마리를 경회루의 연못 북쪽에 넣었다는 것이다. 북쪽에 용을 넣은 것은 생성되는 물로써 불을 제압하려는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

경회루와 흠경각 사이 담장.

경회루 앞이 수정전이고, 수정전은 근정전 서쪽 행각 바로 옆이다.

수정전이었던 일대를 궐내각사라 불렀는데, 궐내각사는 정규 관원들의 활동공간이다. 아주 중요한 것만 꼽아보면 정승이나 판서 등 고위 관료들의 회의 공간인 빈청(賓廳), 이조와 병조의 관원들이 들어와 인사 업무를 처리하는 정청(政廳), 사헌부와 사간원의 언관들이 언론 활동을 논의하고 준비하는 대청(臺廳),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승지들의 관서인 승정원(承政院), 학문을 도야하여 왕의 주문에 대응하고 또 왕과 함께 경전과 역사책을 토론하는 홍문관(弘文館), 외교문서를 짓는 예문관(藝文館), 실록 편찬 등 역사 기록을 담당하는 춘추관(春秋館) 등이 있다.

궐외각사는 국가의 기간 관서들로서 궁궐 정문 앞 궁궐과 인접한 곳에 설치된 관서들을 말한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 육조, 사헌부, 한성부 등 관료기구의 중추를 이루는 관서 건물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늘어서 있었다. 흔히 '육조(六曹)거리'로 불렸다.

궐내각사는 1915년 일본이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면서 완전히 철거되었다.

텅비어 나무만 심어놓은 궐내각사 터.

경회루 연지 남쪽에 위치한 수정전은 세종대왕 때 집현전이 있던 자리에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다시 지었다. 고종 초기에는 침전으로 사용되고, 편전의 역할을 하였다. 갑오개혁 당시에는 군국기무처 및 내각으로 사용되었다.

해시계가 놓였던 자리라 했던가?

수정전은 관청 건물로는 드물게 월대를 두었는데, 왕의 출입이 빈번하다는 이유였다.

수정전 일대의 궐내각사와 광화문 앞 육조거리의 수많은 궐외각사 건물 중에서, 지금은수정전이 유일하게 남은 건물이다.

흥례문을 나서며 경복궁 답사를 마친다.

경복궁의 각종 유물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어, 그리로 가본다.

위키백과에 나온 자료.

경회루(慶會樓)는 경복궁에 있는 누각으로, 조선시대에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대한민국 국보 제 224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회루와 연못

지정번호 : 국보 224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 (경복궁 내)

제작시기 : 조선시대 1412(태종12년) 창건, 1867(고종 4년) 재건

지정일: 1985년 1월 8일 국보 지정

규모: 정면 7칸, 측면 5칸

양식 : 2층 이익공계 팔작지붕

재료 : 석조 기단, 목조

소유자 : 국유

[개요]

경복궁에 있는 경회루는 조선시대에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마다 연회를 베풀던 누각이다. 공포에 출목(出木)이 없는 이익공계로 팔작지붕에 2층으로, 규모는 남북으로 113m, 동서로 128m, 인공방지(方池)에 정면 7칸, 측면 5칸으로 총 35칸이다. 연못 속에는 4개의 장방형의 인공 섬들이 있다. 방지의 물은 지하에서 샘이 솟아나고 있으며, 북쪽 향원지(香遠池)에서 흐르는 물이 배수로를 타고 동쪽 지안(池岸)에 설치된 용두의 입을 통하여 폭포로 떨어진다.

[본래 모습]

원래의 경회루는 경복궁 창건 당시 서쪽 습지에 연못을 파고 세운 작은 누각이었는데, 태종 12년(1412)에 연못을 넓히고 건물도 다시 크게 짓도록 명하여 공조판서 박자청(朴子靑)이 완성하였다. 그 후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서 돌기둥만 270여년 남았던 것을 고종 4년 경복궁을 중창할 때 재건하였으나 옛날처럼 돌기둥에 용을 조각하는 장엄은 베풀지 못하였다. 재건 후 130여년이 지난 1999년 지붕 일부를 해체 수리하였다. 임진왜란 전의 경회루는 유득공(柳得恭)의 <<춘성유기(春城遊記)>>에 "남아 있는 경회루의 돌기둥은 그 높이가 세 길이나 되고 모두 마흔여덟 개인데. . ."라고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흥선대원군 때 다시 지은 경회루와 같은 규모인 정면 7칸, 측면 5칸의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못 둘레에는 석연지, 연화대 등의 석조물과 이무기 형상을 새긴 석루조가 있고 경회루 난간과 돌다리 기둥에는 여러가지 형상의 짐승들이 조각되어 있다. 또한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이전에는 48개의 돌기둥에 승천하는 용들이 조각되어 있었다고 하며, 방지 서쪽에 만세산(萬歲山)이 조성되어 전국의 화려한 꽃들을 심고 봉래궁(蓬來宮), 일궁(日宮), 월궁(月宮), 벽운궁(碧雲宮) 등 상징적인 작은 모형궁을 만들고 금·은·비단으로 장식하였다고 한다. 또 연못 속에는 연꽃을 띄우고 산호(珊瑚)를 꽂아놓고 황룡주(黃龍舟)란 유선(遊船)을 타고 왕이 만세산(萬歲山)을 왕래하였다. 때로는 금과 은으로 장식한 비단꽃과 동물 모양의 등을 물 위에 띄우고 촛불을 켜고 향을 피워 밤이 낮같이 밝을 정도로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현재 모습]

현재의 경회루는 고종 4년(1867) 4월 20일에 새로 지은 건물로서 경복궁의 편전(便殿)인 사정전(思政殿)과 천추전(千秋殿)의 서북방에 위치하고 있다. 경회루는 남북으로 113m, 동서로 128m가 되는 인공으로 만든 커다란 방형 연못 안 동쪽에 치우쳐 있는 네모난 섬 위에 지은 정면 7칸, 측면 5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이다. 건물 하층의 바닥은 네모난 전돌을, 상층 바닥은 장귀틀과 결합하는 동귀틀이 각 칸에 하나로 구성된 장판자를 깔았고, 동쪽과 서쪽에는 하층에서 상층에 오르내릴 수 있도록 계단을 두었다. 1층 천장, 2층 마루의 귀틀 밑부분은 소란우물천정을 꾸미고 화려하게 단청해 놓았다. 경회루 서쪽으로 있는 네모난 섬 두 개는 당주(當州)이며, 이곳에는 소나무를 심었다.

경회루는 둘레를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아 기단을 삼은 네모 반듯한 섬 위에 세워졌으며, 세 벌로 조성된 돌다리를 통하여 연결되는데, 남쪽의 것이 임금을 위한 다리다. 다리의 돌난간과 네 귀는 짐승 모양의 조각으로 장식되었고, 섬을 이루는 돌 기단 둘레에도 돌난간이 둘러있고, 모퉁이마다 돌로 조각한 12지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돌난간은 하엽동자(荷葉童子)와 팔각의 돌란대로 구성되었다. 기단의 서쪽으로는 계단을 두어 연못에서 배를 탈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의 경회루 1층 부분은 민흘림을 한 높은 사각 돌기둥이 외부 둘레에, 원형의 돌기둥이 내부에 배열되어 있고, 2층 부분은 나무기둥으로 조영되어 있다. 1·2층 바닥에는 모두 건물 공간 사용의 위계를 표시하기 위해, 바깥보다 안쪽의 바닥을 조금씩 높였고, 2층에서는 중앙부분의 바닥을 더 높여서, 외진-내진-내내진(內內陣)을 형성했다. 2층의 세 공간 사이에는 분합문을 달아 공간의 위계를 명확히 했고, 필요에 따라 들어올려 하나의 공간으로 사용토록 했으며, 상부에는 광창을 달았다. 현재 내진과 내내진 사이에 문은 없고, 문선만 있다. 2층 둘레로는 계자난간을 설치했고, 기둥과 창방 아래 부분에는 당초문의 화려한 낙양각을 달았다. 이곳 2층에서는 북쪽으로 백악, 서쪽으로 인왕, 남쪽으로 남산을 멀리 볼 수 있어서 이곳이 자연과 함께하며 연회를 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2층 상부의 가구(架構) 형식은 11량 구조로 복잡하게 구성되었지만, 치밀하고 합리적으로 결구되어 있다. 공포는 출목이 없는 이익공이고, 기둥 사이에는 화반을 얹어서 하중을 균등하게 분포시켰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내부 공간의 규모에 비해 매우 거대하다. 팔작지붕의 내림마루 · 추녀마루 · 용마루는 모두 회반죽을 바른 양성을 하였는데,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를 내림마루와 추녀마루가 만나는 부분에는 용두를, 추녀마루 위에는 용두와 잡상을 배열하였다. 사래 끝에는 토수를 설치했으며, 지붕 합각면에는 풍판과 쫄대를 사용하여 판벽을 구성하였다.

고종 때 재건된 경회루는 당시 유가(儒家)의 세계관이 반영되어 건설되었는데, 그 내용은 정학순(丁學洵)이 경복궁 중건 후인 1865년에 쓴 <<경회루전도(慶會樓全圖)>>에 나타나 있다. 1층 내부 기둥을 원기둥[圓柱], 외부 기둥을 사각기둥[方柱]으로 한 것은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나타낸다. 2층 기둥은 외진주만 사각기둥이고, 내진주는 모두 원기둥이다. 외진-내진-내내진 3겹으로 구성된 2층 평면의 제일 안인 내내진은 세 칸으로 이루어져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상징하고, 이 세 칸을 둘러싼 여덟 기둥은 천지 만물이 생성되는 기본인 <<주역(周易)>>의 팔괘(八卦)를 상징한다. 제일 안 세 칸을 둘러싼 다음 겹인 내진은 12칸인데 1년 12달을 상징하고, 매 칸마다 네 짝씩 16칸에 달린 64문짝은 64괘를 상징한다. 가장 바깥을 둘러싼 24칸은 1년 24절기와 24방(方)을 상징한다. 이와 같이 경회루는 당시 유가의 세계관을 건축 형식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경회루에는 불을 잡아먹는 짐승인 불가사리 둘을 금속으로 제작하여 연못 속에 넣어 화기(火氣)를 막으려고 했다는 것을 정학순은 기록하였는데, 이 상징물 하나가 최근 경회루 방형 연못을 청소하면서 나왔다. 방형 연못 서북쪽으로 돌기둥 두 개가 물 속에 담겨져 있는 육각형 평면의 하향정(荷香亭)은 이승만 대통령이 낚시를 즐기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평가]

경회루는 단일 평면으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누각건물이다. 이와 같이 거대한 규모의 건물을 물 속에 인공으로 조성한 섬에 세웠으면서도 그 기초를 견고히 하여 건물이 잘 견디게 처리한 점, 거대한 건물을 이익공의 간결한 법식으로 처리하면서도 왕실의 연회장소로 합당하게 잘 치장한 점, 2층 누에서 주변 경관으로 인왕산 · 북악산 · 남산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게 처리한 점, 1층 건물 주변을 돌며 연못의 물과 섬을 바라보며 감상토록 한 점 등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 이 자료는 중복되는 내용인 것 같아 한 번 읽어보고 넘어가려 했더니 다른 자료에는 없는 가구구조에 대한 설명이 잘 나와 있어 이 또한 옮겨놓는다. 원문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고, 내가 옮겨온 곳은 핸드폰 요금 싸게 쓰는 사람들이라는 까페의 게시물이다.

[명칭] 경복궁 경회루(景福宮 慶會樓)

[분류] 궁(누)

[지정사항] 국보 제224호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 경복궁

고종 4년(1867)에 건립한 회연(會宴)의 건물로 물 속에 기단을 축조하고 세웠다. 정면 7칸, 측면 5칸의 건물로 궁내에서는 정전(正殿)인 근정전 다음으로 대규모이다.

기단 위에는 석조방주(石造方柱)를 외진(外陣)으로 하고 원형석주(圓形石柱)는 내진(內陣)으로 하여 일층주(一層柱)를 배열하였고 그 위에 목주(木柱)를 세워 2층 공간을 형성하였다.

· 하층의 바닥은 위계를 표시한 듯 외측보다 내측의 바닥 높이를 높였고, 상층에는 들어 열 수 있는 분합문을 외진 · 내진· 내내진[內內陳, 오간(奧間)] 사이에 두어 공간 구분을 분명하게 하였다.

천장은 하층에서 우물천장으로 상부 구조가 보이지 않도록 하였고, 동남과 서남측에는 고란층제(高欄層梯)를 설치, 상층으로 오르게 하였다.

상층의 가구(架構) 형식을 보면 사고주(四高柱) 십일량(十一樑) 형식인데 외진평주(外陣平柱)보다 내진주(內陣柱), 그리고 내내진고주(內內陣高柱)를 차례로 높여 중앙 공간이 가장 높게 되었고, 내내진 고주는 종도리 밑까지 치솟아 건물 중심을 견고하게 받치도록 시도되었다.

기둥과 보, 그리고 구조재(構造材) 부재(部材)들은 뜬창방과 대공(臺工)들로 간결하게 처리, 결구(結構)되었고 공포(慊包)는 이익공(二翼工)으로 하고 주간(柱間)에 수많은 화반을 얹어 하중의 분포를 원활히 하도록 노력하였다.

처마는 겹처마로 처리하고 지붕은 팔작지붕인데 전체적인 축부(軸部)와의 비례가 조금도 손색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조선 말기 누각(樓閣) 건축으로 대표적인 수작(秀作)의 대규모 건축이라 할 수 있다.

건물 주변에는 넓은 기단을 두르고 팔각의 회란석(廻欄石)을 돌려세우고 하엽동자(荷葉童子)를 일정 간격으로 세워 석난간(石欄干)을 마련하였는데 석난간 엄지기둥에는 서조(瑞鳥) 및 수상(獸像)들을 조각 배치하여 더욱 웅장하게 보이며 동쪽으로는 육지와 연결하기 위해 석교를 설치하여 운치 넘치는 의장(意匠)을 베풀었다.


<경회루전도(慶會樓全圖)>에 보면 경회루가 역(易)의 원리와 일치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 책은 1865년 경회루가 중건되던 해에 만들어진 것으로 저자는 정학순(丁學洵)이라 되어 있다. 저자 정학순(丁學洵)은 초야(草野) 신(臣)이라 하였는데 그 신분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경회루전도>에서는 경회루와 역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경회루가 경복궁에 자리잡고 있는 목적은 불을 물로서 제압하려는 데 있다. 따라서 경회루의 모든 구성은 물을 상징하는 숫자 6으로 이루어졌고, 경회루의 건축적 요소는 평면, 입면, 주변 환경이라 하고 이 모든 것이 주역(周易)의 원리에 입각하여 구성되었다고 하였다.

즉 경회루는 2층이고 내부 평면이 3중으로 되어 합 35칸이며 기둥은 모두 48개라 전재하였다. 그리고 제 1중의 3칸은 정당(正堂)으로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상징하고 8개의 기둥을 사용하여 팔괘(八卦)를 나타낸 것이다. 제2중의 12칸은 헌(軒)이며 1년 12개월을 상징한다. 또한 기둥 16개는 각 주간(柱間)의 4짝문이 있어 64괘를 이루고 있다.

제3중은 모두 20칸인데 낭무(廊黛)로서 기둥은 24개로 24방(方)의 월절후(月節候)를 이룬다. 또 내이중(內二重) 15칸의 목주(木柱)는 길이가 '66척'이며 외일중(外一重) 20칸의 목주는 길이가 '36척', 각 칸(間)의 장광(長廣)은 각각 '26척', 대들보는 소량(小梁) 26척, 대량(大梁) 66척을 아홉 사용한다. '9'는 노양(老陽)의 숫자이며 양(陽)에 속한다. '6'은 노음(老陰)의 숫자이며 음(陰)에 속하므로 기둥 아래에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서까래 숫자와 다리, 연못의 현상 등에 대하여도 주역의 숫자와 관련지어 풀이하고 있다.

이 <경회루전도>는 국립중앙도서관,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이 원본인 것으로 판단된다.

(앞서 찾아본글들과 달리 문화유산 해설사가 조금은 쉽고 평이하게 쓴 이 있어 그 또한 찾아 옮겨놓았다. 내용을 잘 모르던 팔괘라는 것에 대해서도 풀어 설명해주고 있기도 하고.)

덕으로써 만나는 경회루 / 고문준(문화유산 해설사)

경회(慶會)란 임금과 신하가 덕(德)으로써 만나는 것을 말한다. 공자는 '임금이 정사를 하는 것은 사람을 얻는데 있다. 대개 임금의 정사는 사람을 얻음으로써 근본을 삼는 것이니 사람을 얻은 후에야 경회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라를 다스리는데 유능한 신하를 얻는 것만큼 경사스러운 만남은 없을 것이다. 이곳은 신하나 외국 사신을 위해 잔치를 베풀기도 하고, 활을 쏘는 장소로도 쓰였으며, 과거시험을 치르는 등 궁궐 내 중요한 행사를 치루는 곳이었다. 또한 가뭄이 들어 농사가 힘들 경우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1. 푸른 물결 속의 용

경회루는 태조 때 지은 작은 누각이었는데, 3대 태종 때(1412년) 크게 다시 지었다. 못을 파서 사방을 둘렀으며, 9대 성종 때(1474년)는 대규모의 수리를 하였는데 이 때 이전과 다르게 돌기둥에 꽃과 용을 새겼다. 그 모습이 '돌기둥에 가로 세로 그림을 새겨놓아 용이 거꾸로 물속에 그림자를 지어 푸른 물결과 붉은 연꽃 사이에 보이기도 하고 숨기도 하는' 모습이어서, 유구국사신이 이를 보고 감탄했다고 한다.

2. 연산군과 중종의 경회루

연산군은 경회루의 못에 만세산을 세우고 연꽃, 모란, 봉황, 황룡 등의 각종 등을 달아 꾸몄으며, 왕은 황룡 모양으로 꾸민 배를 타고 이를 구경하였다. 부용향 수백 다발을 태우고, 밀랍으로 만든 큰 촛불을 1천 자루나 늘어세워 밤을 대나처럼 밝혔으며, 전국에서 뽑아 올린 기녀 흥청 수백 명이 늘어앉아 풍악을 연주하였다. 이렇듯 연산군은 민생과 국정을 돌보지 않아 결국에는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배다른 동생인 진성대군(중종)이 왕으로 즉위하였다.

중종의 첫째 왕비는 단경왕후이다. 반정에 성공하여 중종이 등극한 뒤에 신하들의 반대로 단경왕후는 왕비가 된지 일주일만에 폐위되어 궁궐을 나가야만 했다. 왜냐하면 단경왕후는 좌의정 신수근의 딸이고, 그의 누이동생은 폐위된 연산군의 비였으며, 신수근은 반정 당일 처형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반정세력은 신수근의 딸을 왕비의 자리에 둘 수 없었던 것이다.

단경왕후는 12살에 중종에게 시집을 와서 7년간 살다가 19살 꽃다운 나이에 폐비가 되어 남편과 생이별을 해야만 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신씨는 폐비가 되었지만 중종에 대한 깊은 사랑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상감께서 늘 경회루에 오르시어 자기 집을 바라본다는 소문을 듣고, 신씨는 전날 대궐 안에서 입던 붉은 치마를 경회루에서 잘 보이는 인왕산의 바위에 아침에는 내다 걸고 저녁에는 거두어 들였다고 한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훗날 사람들은 이 바위를 치마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폐위된 신씨는 홀로 자식도 없이 외롭게 한 평생을 살다가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폐위된지 230여 년이 지난 영조 때 왕비로 복위되었다.


3.경회루의 조영 원리

현재의 경회루는 고종 때(1867년) 다시 지은 건물이다. 정학순의 『경회루전도』를 보면 주역이나 음양오행사상이 경회루에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경회루의 마루는 높이가 세 단인데 가운데 단이 가장 높고 바깥쪽 단이 제일 낮다. 가운데 제일 높은 단은 넓이가 3칸으로 3은 모든 만물을 낳은 하늘, 그것을 키우는 땅, 그리고 이것을 완성시키는 사람, 즉 하늘, 땅, 사람인 삼재(三才)를 나타낸다.

이 단의 둘레 사면에는 기둥이 8개가 있는데, 8은 주역의 8괘로 자연의 대표적인 현상인 ☰(하늘) ☱(못) ☲(불) ☳(우뢰) ☴(바람) ☵(물) ☶(산) ☷(땅)을 말한다. 이 중에서 4괘는 태극기에서도 볼 수 있는 ☰(하늘) ☲(불) ☷(땅) ☵(물)이다.

다음 높은 단의 넓이는 12칸으로 1년 12달을, 이 단의 바깥 쪽 네 면에는 기둥이 16개로 각 기둥 사이에 4개의 문을 달아 총 64개 문(16X4=64)이 있다. 64는 주역의 점괘인 64가지 괘를 말하며 가장 낮은 단의 바깥 쪽 기둥은 24개로서 1년 24절기를 말한다.

4. 경회루의 불을 막는 동룡


1997년 경회루의 못을 준설할 때 동으로 만든 용이 출토되었다. 『경회루전도』에는 동으로 만든 용 두 마리를 못 북쪽에 넣었는데, 오행사상에 의하면 불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오행(五行)에서는 우주만물의 구성하는 기본요소는 물, 나무, 불, 흙, 쇠인데 그 성질에는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이 있다. 상생은 '물은 나무를, 나무는 불을, 불은 흙을, 흙은 쇠를, 쇠는 물을 낳는 것'이며 상극은 물은 불을, 불은 쇠를, 쇠는 나무를, 나무는흙을, 흙은 물을 이기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동룡의 동은 쇠로 물을 낳고, 물은 불을 이기므로 동룡은 경회루의 화재를 막기 위함이었다.

경회루 관련 자료를 찾다가 참고로 경복궁의 옛 '북궐도'가 있는 자료를 보게 되었는데 참고로 함께 올려둔다. 실은 앞으로도 경복궁에 대해서는 앞서 살펴본 향원정과 경회루 말고도 근정전, 수정전,강정전 근정문, 흥예문 등 하나하나 봐야 할 것들이까마득히 남아 있다. 이 자료는 재테크 왕중왕이라는 까페에서 퍼왔다. 재테크 까페에서도 고건축에 관심이 많은가 보다. ^ ^;

경복궁은 보통 흥선대원군이 재건한 모습이 대부분 남아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현재의 경복궁의 모습은 일제치하에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된 모습이다.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수백여 전각이 헐리고, 그 자재가 매각되어 10여개의 전각만이 남았다.

△ 위 사진이 전각들이 소실된 경복궁이다. (구글어스 사진)

△조감도로 나타내면 위와 같다. (문화재청 경복궁 홈페이지)

△ 하지만 경복궁의 원래의 모습은 위와 같다. (경복궁 관리소 제공)

위 북궐도 조감도(고종시절의 정궁 지도)는 북궐도를 바탕으로 만든 조감도이다. 북궐은 경복궁의 별칭이다.

현재의 경복궁에서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전각들이 보인다. 사정전 우측에 보이는 건물들은 궁녀들이 기거하는 처소이거나, 왕실 물품들을 제조하는 간단한 공장들이 있었다. 근정전 좌측(경회루 아래) 부분에 보이는 전각들이 바로 대신들이 정사를 보던 자리이다. (이 부분은 2009년에 상당 부분 복원, 공개될 예정이다.)

위에 보이는 경복궁은 후원을 뺀 경복궁의 모습으로서, 약 35만 평방미터에 약간 못미친다. (자금성의 반 정도 되는 면적이나 7000 칸이 넘는다는 점에서 9000여 칸의자금성에 크게 뒤지지 않는 대규모 궁궐이었다. 근정전 천정의 용의 발톱을 중국의 황제 것보다 많이 조각해 놓는 도발(?)을 하기도 했다.)

그림에서 보이지 않는 후원 부분은 현재 청와대가 위치하고 있다. 후원에는 너른 뜰에 동물들을 길렀고, 농경국가답게 왕이 직접 농사를 짓는 전답도 있었다. 현재 청와대 앞 뜰이 이 전답 자리이다. (행정수도 이전 계획 당시, 청와대 자리를 경복궁 후원 뜰로 반납하는 문제가 거론되기도 했다.) 이 자리는 과거 고려 이궁인 남경이 존재했다고도 한다.

현재 2009년을 목표로 60%선의 경복궁 복원사업을 진행 중이다. 이와는 별도로 광화문을 원위치하는 공사가 진행중이다. 1차 복원 후 추가 복원 여부를 논의한다고 한다.

△ 위 그림은 고종 때 만든 설계도 북궐도형을 현대식으로 다시 그린 것이다. (문화재청 경복궁)

△ 위 CG의 출처는 잘 모르겠으나 만약 경복궁을 100% 복원하면 이런 모습일 듯 하다.

당시 경복궁 설계 도면 (일부 회손됨)



다시, 북궐도와 현재 진행중인 복원 공사에 대해 참고할만한 짧은 글을 하나 더 보았다. (어느 분의 개인 블로그에서 퍼온 게시물)

북궐도를 통해 본 경복궁의 모습

조선왕조의 건립에 따라 창건되어 초기에 정궁으로 사용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조선 말기 고종 때 중건되어 잠시 궁궐로 이용되었다.

1592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면서 그 첫 사업으로 천도를 단행하여 수도를 개성에서 현재 서울로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궁궐의 창건을 시작였으며 이듬해에 완성하였다.

이 때의 궁의 규모는 390여 칸으로 그리 큰 규모는 아니었다. 그리고 태종의 장자인 정종이 즉위하면서 도읍을 다시 개성으로 옮기어 궁을 비우게 되었으나, 제3대 태종 때 다시 환도하여 정궁으로 이용되었다. 이 궁궐이 대규모로 증축된 것은 세종대왕 때였는데,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궁궐은 건물 일체가 완전히 불 타 없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터만 남긴 채 무려 270년 간이 방치되었지만 고종시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공사를 단행하여 공사 기간 2년만인 1866년 완공하기에 이르렀다. 그 크기는 무려 7225칸의 조선시대 만들어진 궁궐 중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게 되었다.

1910년 이후 일제는 궁안의 전(殿), 당(堂), 누각 등 4000여 칸의 건물을 헐어서 민간에 판매하는가 하면 필요할 때마다 경복궁 내 각종 전각을 헐어 편의에 따라 쓰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경복궁은 광화문 광장 조성을 시작으로 대규모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던 경복궁이 대원군 시절 다시 지어질 수 있었을까? 또한 일제시대 때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훼손당한 경복궁을 어떻게 7200여 칸의 각종 건물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 자리에 복원시킬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북궐도에 있다.

조선시대에는 경복궁을 도성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북궐(北闕)이라고도 불리었다. 따라서 북궐도란 경복궁의 건물 배치도를 뜻하는 말이다. 대원군 시대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진행 중이지만, 이 북궐도가 있기 때문에 두 번의 대규모 훼손사태에도 불과하고 경복궁은 본래의 모습대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북궐도는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공사를 마친 후 제작된 19세기 말 그림으로 추측된다. 도면은 접혀져 있는 '帖(첩)' 형태인데 완전히 펼치면 가로 2.8m,세로 4.3m나 되는 엄청난 크기이다. 당시에는史部(사부) 지리류에 소속되어 있어 일종의 지도로 보았지만, 현대적 관점에서 봤을 때 건물 배치도에 가깝다.

북궐도의 정밀함은 건물 하나하나의 배치는 물론 그 정확한 측량에 있다. 도면 전체를 1.1cm X 1 1cm의 눈금으로 나누어 붉은 색 선으로 긋고, 남문인 광화문에서 북문인 신무문까지의 건물 배치 상황을 검은 먹줄로 그었다. 도면기법은 칸과 칸을 구분하는 선을 그어 평면상의 구획을 분명히 하고 각 칸에는 방(房), 청(廳), 문(門) 등의 용도를 써 넣었다. 따라서 건물 복원은 단 1cm의 오차도 없이 진행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현재 복원공사는 대원군 시대의 모든 건물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고궁박물관과 주요 녹지를 일부 남겨둔 채 하는 부분공사이다. 고궁박물관은 비록 현대에 와서 지어진 건축물이기는 하지만 그 역시 역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에 CG 처리된 도면을 바탕으로 북궐도를 탐색해 보자. 우선 가장 정면에 있는 것이 광화문이고 그 문을 지나면 남쪽문인 正門이 나온다. 이 정문을 통과하면 ㄹ자형의 인공 하천이 나오는데 이 하천을 건너는 다리를 금천교라 했다. 금천교를 넘어서면 근정문이 나오고 근정문을 통과하면 궁궐의 핵심이자, 가장 웅장한 2층 건물인 근정전이 나온다. 이 근정전은 법령을 반포하는 곳이자 국왕이 문무백관들에게 조하를 받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근정전 뒷편에는 국왕의 침소인 강녕전이 자리잡고 있다. 이 밖에 사각형 호수 위의 건물 이 경회루이며 가장 뒷편 부채꼴 모양의 호수 위에 건물이 향원정이다.

경복궁의 구조에 대해서는 이후 보다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경복궁의 구조를 보면 필요 이상의 건물들이 밀집하여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경복궁이 소실된 후, 경복궁보다 규모가 절반에도 못 미치는 창경궁이나 창덕궁도 궁궐로써의 구실을 충분히 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토록 아름답고 광대한 궁궐을 만들도록 하였는가? 그것은 아마도 조선의 영원한 발전과 왕실의 무궁한 번영을 기원하였던 조선왕조의 마지막 열정이 발휘된 때문일 것이다.

자료를 찾다보니 고종 때 그려졌다는 북궐도 이전의 그림에 대한 기사 하나를 더 보게 되었다. 이 그림이 발견된 것도 최근의 일이어서 그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뉴스가 된 모양인데, 주간동아(2003년)에 김정동 교수가 연재한 글을옮겨놓았다.

'경복궁' 초기 모습 알려주마?

경회루 준공 전 그린 '조선국왕성지도' - 중층건물, 탑 형태 등 지금의 형태와 판이

조선국왕성지도 (일본 와카야마 시립박물관 소장)

조선시대에 지어진 궁궐은 5개로 그 중 으뜸인 경복궁이 정궁이고 나머지 궁들은 별궁이었다. 경복궁은 도성의 북쪽에 있어 북궐(北闕)이라고도 했다. 정도전(1342~98)은 궁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궁궐은 왕이 정사를 펴는 곳이며, 사방이우러러보는 곳이다. 신민들이 다 나아가는 곳이므로 제도를 장엄하게 해서 위엄을 보이고, 이름을 아름답게 지어 보고 듣는 자를 감동하게 해야 한다."

궁궐을 짓는 국가의 자세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경복(景福)'이라는 말도 정도전이 지은 것이다. 경복궁은 1394년 공사를 시작, 이듬해인 1395년(태조 4년) 준공됐다. 당시 15만 평의 땅에 근정전 등 정전들과 회랑, 누각 등 390여 칸을 지어 국가의 위엄이 나타나도록 했다.

"15만 평에 누각 등 390여 칸 지어"

그러나 오늘날 유감스럽게도 당시 경복궁의 규모나 양식(樣式)에 대해 알 길이 없다. 궁궐의 건축도면은 물론 설계한 건축가, 공사비 등 어느 것 하나에도 정확한 기록이 없다. 역사서에는 건물 이름 정도만 기록되어 있는데 준공 이래 증개축, 이축, 멸실이 잦았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 화재, 정변 등의 와중에 왕궁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사라졌다. 현재 우리가 보는 경복궁 모습은 세워질 당시와는 매우 다르다. 현재의 경복궁은 대원군 이후 지어진 것 중에서도 일부일 뿐이다.

이번에 일본에서 찾아낸 '조선국왕성지도(朝鮮國王城之圖)'는 경복궁을 그린 최초의 그림으로 추측된다. 궁궐을 그린 그림을 흔히 '궁궐도'라고 하는데 이 그림에는 '왕성지도'라 씌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또 한 번에 여러 벌 제작되어 분배된 것 중 하나로 보인다.

우리나라에 있는 경복궁 그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경복궁도'로 헌종 때 (1834~49) 제작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삼성출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채색 필사본 '경복궁전도'나 장서각이 소장하고 있는 '경복궁지도'도 비슷한 시기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필자가 일본에서 '조선국왕성지도'를 발견한 것은 지난 여름, 마침 중부도시 후쿠야마(福山)의 작은 항구마을 도모노우라에서 열린 '조선통신사 세미나'에 참가했을 때다. 여느 때처럼 자료 모으기에 정신이 없었는데 일본 관계자가 '조선국왕성지도'의 소재와 내용에 대해 귀띔을 해주었다. 도모노우라는 조선통신사들이 거치던 곳으로 옛 한문 이름이 '도모노우라(韜の浦)'였다.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그림은 옛 기슈(紀州)의 한 도시에 있다는 것이다. 기슈라면 오사카 남쪽 와카야마(和歌山) 일대를 가리킨다. 이후 세 차례나 일본을 오가며 그림 찾기에 나섰다. 다행히 게이오기주쿠 대학 대학원에 재학중인 재일동포 3세 부학주 씨의 도움을 받아 와카야마 시 시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어람용 혹은 외교용 추정

'조선국왕성지도'는 목판에 채색 인쇄한 것으로 3장을 붙여놓은 형태다. 해설서에는 '이씨 조선의 수도, 한성에 있는왕궁 경복궁을 부감한 비단 그림'이라 씌어 있었다.

그림의 크기는 35.5X70.2cm. 그림에 '기일(基壹)'이라는 글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림이 몇 장 더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경복궁 외의 다른 궁들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나머지 그림들을 찾는 것 또한 우리의 숙제다.

그림은 궁중의 화원이 그린 것 같다. 왕이 보는 어람용(御覽用)이거나 외국(중국이나 왜국) 사신에 대한 외교용 그림으로보인다. 우리나라에는 어람용 그림인 '근정전청연도(勤政殿請宴圖, 1537)' 등이 남아 있고, 중국 사신이 우리 궁궐도를 요구한 예가 있기 때문이다. 한양을 드나들던 왜사(倭使)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림이 그려진 연대와 일본으로 건너간 시기는 다음 몇 가지로 추측해볼 수 있다.

첫째, 1400년 전후 일본 왜사가 한성을 방문했을 때 선물로 준 것이다. 1395년 경복궁 준공을 기념해 그린 그림일 가능성이 높다.

둘째, 임진왜란(1592~1596) 때 일본군이 탈취해 갔다.

셋째, 이 그림이 조선통신사 자료에 묶여 있던 것으로 보아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선물한 것이다. 조선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일본을 오갔다.

넷째, 당시 조선과의 교류를 위한 교두보였던 쓰시마의 왜인들이 이 그림을 얻어, 일본 막부에 전달했다. 당시 일본 막부도 조선의 왕궁에 관심이 있었기에 이런 그림이 필요했다. 와카야마 시는 세토나이카이에 면한 항구도시로 쓰시마와 깊은 관계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작가 미상의 경복궁 궁궐도(위). 보수공사가 거의 마무리돼 ㅁ자형의 경복궁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아래).

'조선국왕성지도'는 왕궁과 궁내의 정원을 묘사하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 바탕을 노란색으로 하고 붉은색을 많이 써서 건물을 표현했는데 동양풍이 강하다. 여기서 동양풍이란 조선, 명나라, 왜의 3국풍이 뒤섞인 것을 말한다. 그림은 서양식 투시도법을 사용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고 멀리 있는 건물은 약간 크기를 줄이는 원근법도 이용됐다.

그림에 보이는 경복궁은 백악산(白岳山)이 매우 강조되어 있다. 백악산은 북악산(北岳山)으로 불린다. 북악산 기슭 현 청와대 쪽은 고려 숙종(1096~1105) 때 궁궐로 쓰이던 곳이다. 숙종 때인 1104년 5월 남경(南京) 궁궐을 준공했다는 기록이 있다. 남경은 오늘의 서울이다.

그림에서 북악산 기슭의 궁전은 고려시대 연흥전(延興殿)으로 보인다. 연흥전은 조선 연간에는 연고궁(延枯宮)으로 이름이 바뀌고 경복궁의 후원이 되었다. 현재의 청와대 일대다. 만약 청와대가 옮겨가면 이곳은 옛 궁궐로 복원해야 할 것이다.

그림에서 경복궁 경내는광화문, 근정전, 서루(西樓)로 보이는 건물들이 축상에 이어져 있으나 오늘 우리가 보는 경복궁과는 다르다. 건물은 대부분 중층(重層)으로 되어 있다. 탑 형태의 건물도 많이 보인다. 궁궐이 비교적 꽉 찬 느낌이다. 중앙에 두 개의 방형 큰 연못이 연결돼 설치되어 있는 것이 독특하다.

고종 때 중건 건물 10%도 남지 않아

서루, 즉 경회루는 1412년에, 광화문은 1431년에 준공됐다. 경회루는 1474년 보수되고 근정전과 광화문에는 청와(靑瓦)가 올라간다. 청기와가 경복궁에 쓰인 첫 예다. 그림의 전면이 광화문이고 그 다음이 근정전으로 짐작된다. 그림 중 경회루로 보이는 건물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그림은 초기 경복궁을 그린 그림인 것만큼은 틀림없다. 참고로 창덕궁은 1484년 9월 준공됐다.

경복궁의 대표적인 건물인 근정전(국보 223호)

경복궁 담장은 1503년 11월에 쌓았다. 그 전에는 간이 울타리만 있어 주변 민가와의 경계가 확실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담을 쌓으면서 주거를 금지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림에도 담장은 묘사되어 있지 않다. 1527년 7월 경복궁을 수리했다. 1553년 9월(명종 8년) 사정전(思政殿) 북쪽이 모두 소실됐다가 1554년 9월 중건되었으나 1592년 선조 때 경복궁은 다시 불타버렸다.

오늘날 대부분의 전각은 200여 년 후인 1865년 2월 대원군이 중건을 시작, 1868년 6월에 완성한 것이다. 고종은 그해 7월부터 경복궁에서 정사를 보았다. 이 때 경복궁 안에 지어진 건물은 모두 7225칸이었으나 1905년 이후에는 일제에 의한 파괴가 극심했다. 근정전과 경회루 등 10여 동만 남기고 200여 동을 헐어버렸다. 지금 남아 있는 부분은 고종 때에 중건된 궁궐의 10%도 되지 않는다.

어쨌든 이 그림은 임진왜란 이전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전파(全破)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초기 경복궁 그림은 희소성으로도 가치가 높다. 이 그림의 발견이 경복궁 복원을 위한 조사와 연구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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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복원사업은

태원전 복원 돌입 70% 이상 진척 - 도편수 신응수 씨 "증거 없어 답답"

경복궁 대복원 사업은 1991년 착공하여 2009년 완공을 목표로 진행중이다. 물론 여기서 복원이란 대원군이 중건했을 때의 모습을 되살리는 것이다. 2009년까지 전각 총 93동 약 3200평을 복원할 예정이다. 1단계로 왕의 처소인 강녕전과 오아비의 처소인 교태전을 비롯한 침전 지역, 2단계는 세자가 거처하던 동궁 지역, 3단계는 구 조선총독부 자리인 흥례문 지역, 4단계는 승하한 왕과 왕비의 혼령을 모신 태원전 지역, 5단계는 광화문, 서십자각 등의 복원을 목표로 잡았다. 현재 태원전 복원 작업에 들어간 상태여서 70% 이상 진척됐다.

그러나 경복궁 복원에 참여한 도편수 신응수 씨(중요무형문화재 대목장 기능 보유자)는 "계획대로 모두 완공한다 해도 옛 경복궁 건물의 40%도 채 목원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특히 태원전에 이어 복원할 예정이던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 복원은 위치 때문에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니다.

광화문은 한국전쟁 때 불에 타 석축만 남은 것을 1968년 복원했으나 목재가 아닌 철근과 콘크리트로 복원해서 제 모습을 잃고 말았다. 현재의 한글 현편 또한 복원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또 지금의 위치가 경복궁 남북 축이 아닌 동남 방향으로 5~6도 가량 틀어져 있고 원래 위치에서 14.5m 가량 뒤쪽으로 물러앉아 궁궐과 대문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광화문의 원래 위치가 현재 도로로 돼 있어 교통문제 등으로 복원 일정이 연기됐다.

경복궁을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려면 무엇보다 고증 작업이 중요하다. 1단계 침전지역의 '건순각' 공사 때 기와를 올리고 미장 공사까지 끝낸 후 단청을 하는 도중에 경복궁의 옛 사진(목원대 김정동 교수가 발굴)이 나오는 바람에 문양이 틀린 것을 발견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적도 있다. 2단계 동궁 복원 공사 때도 신응수 씨는 도면의 '자선당' 시둥 크기가 잘못된 것 같다고 주장해 문화재 전문위원들과 승강이를 벌였다. 문제는 신응수 씨의 주장이 현장 경험에 근거한 것이어서 입증할 길이 없었다는 점. 이번에도 김정동 교수가 일본 오쿠라 호텔에 자선당의 기단과 주춧돌이 남아 있음을 확인해주었다. 주춧돌을 통해 기둥 크기와 건물 규모를 추정할 수 있었다. 신응수 씨는 "확실한 고증과 조사를 해야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는데 복원의 근거가 될 만한 아무런 단서나 증거도 없어 답답했다"고 말했다. 경복궁 복원, 보수 과정은 신응수 씨의 '천년 궁궐을 짓는다'(김영사 펴냄)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그리고 하나 더 다시 봐야 할 자료. '과학기술정보 통합서비스'라는 곳에 가면 여러가지 논문이나 보고서들을 검색해 볼 수 있게 해주고 있다. 그곳에 올라 있는<경복궁 경회루의 건축계획적 논리체계에 관한 연구 - 정학순의 '경회루전도(慶會樓全圖)'를 중심으로> 라는 연구논문. 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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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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