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열아홉 칸이나 되는긴 방형 평면을 지닌 건물이다, 하고 지나가면 되었을 것을 굳이 이렇게 붙잡아 씨름을 했다. 그건 그렇고 종묘, 그 앞을 수도 없이 지나다녔을 텐데 어찌 죄다 처음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종묘 앞에서도 막걸리 퍼마신 기억 밖에는… ㅠㅠ)

----------------------------------------------------------------------------------


* 문화재청 홈페이지 문화유산지식 싸이트에서 옮겨온 종묘 정전 일대의 사진들이다.

종묘 정전

전퇴

동익사

전면

종묘 정전

종묘정전 내부 가구

종묘정전 내부 신단

종묘정전 신위

종묘정전 전면 공포

종묘정전 퇴칸

서울시에서 운영하는서울문화재라는 싸이트에 들어가보니 종묘에 대한소개를 동영상으로 만들어놓은 것이 있다.

종묘정전

종묘정전 宗廟正殿

지정번호 : 국보 제 227호

지정일 :1985년 1월 8일

시대 : 조선 태조 4년(1395) 창건, 광해군 즉위년(1608) 재건

규모, 양식 :정면 태실 19칸 익랑 2칸, 동·서월랑 정면 5칸 측면 1칸

단층 이익공 맞배지붕

재료: 석조 월대(기단), 목조

소유자 : 국유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5-1

종묘 정전은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세상을 떠난 후에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한 왕실의 사당건축이다.

종묘는 1392년 조선왕조를 일으킨 태조 이성계가 도읍지 후보로 계룡산, 무악 등 여러 곳을 물색하다가 태조 3년(1394) 8월 최종적으로 한양을 조선왕조의 도읍지로 정하고, 이 해 10월 28일 고려의 옛 도읍지 개성을 벗어나 천도를 한 해에 터를 개척하기 시작하여, 다음 해인 태조 4년 9월 29일에 재 궁궐과 함께 준공된다. 준공된 종묘는 대실(大室)이 7칸인데, 대실 안에는 석실(石室) 5칸을 만들고, 좌우에는 익랑(翼廊)을 각각 2칸씩 이어 지었으며, 그 외에 별도로 공신당(功臣堂) 5칸, 신문(神門) 3칸, 동문 3칸, 서문 1칸 규모의 건물을 지었고, 빙 둘러 담을 쌓았다. 그리고 담 밖에는 신주(神廚) 7칸, 향관청(享官廳) 5칸, 좌우 행랑(行廊) 각각 5칸, 남쪽 행랑 9칸, 재궁(齋宮) 5칸을 지었다.

종묘가 완성되자 태조는 날을 받아 즉위 4년인 1395년 10월 태조의 4대조인 목조(穆祖)와 효비(孝妃), 익조(翼祖)와 정비(貞妃), 도조(度祖)와 경비(敬妃), 환조(桓祖)와 의비(懿妃)의 4대 신주를 개성에 옮겨와 봉안하였다.

종묘는 태종대에 이르러 건축 형식이 정착하게 된다. 태종은 종묘 정전 건물 양끝에서 직각으로 앞으로 꺾여 나온 동·서월랑(東西月廊)을 건설하고, 종묘의 담 바깥 서남쪽 모퉁이에 있는 공신당을 종묘 담 안 묘정(廟庭) 아래, 즉 동쪽 계단 아래로 옮기고, 또 제기고(祭器庫)와 재생방(宰牲房) 등 부속건물을 지어 종묘의 제례 기능상의 정비를 한다. 또 태종은 향관이 재계하는 처소를 제전(祭殿) 동남쪽 낮은 곳으로 옮기게 하여 건축물 상호간의 위계를 확립하고, 둘레담과 하마비를 세워 종묘 건축의 격식을 갖추게 만든다. 명종 때에 이르러 종묘 정전의 부족한 감실을 해결하기 위해 4칸이 증축되어 그 규모가 모두 11칸으로 된다. 그 후 종묘는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게 되어, 재건에 대한 구체적인 작업이 진행되지 못하다가 마침내 선조 41(1608) 1월에 재건 공사를 시작하여 5개월 후 광해군이 즉위하고 나서 완공하게 된다. 이 때 재건된 종묘 정전은 임진왜란 전의 규모인 11칸이다. 종묘 정전은 그후 1726년(영조2년) 4칸 증축, 1836년(헌종 2년) 4칸 증축을 하여 지금의 모습인 19칸으로 정착하게 된다.

정전 일곽은 네모나게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묘정을 중심으로 남쪽 담 중앙에 신문(神門), 동 · 서쪽에 제례 때 제관이 출입하는 동문(東門)과 악공(樂工)과 종사원이 출입하는 서문(西門)이 각각 나 있다.

신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서 이중량(二重梁)을 한 5량가(五梁架)이고, 초익공이다. 각 칸에는 두 짝의 판문을 달았고 상부는 홍살로 되어 있다. 정전 동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초익공의 5량가 가구(架構)로 신문과 거의 동일한 법식과 크기로 되었다. 다만, 기단 높이가 차이를 보인다. 정전 서문은 정면 1칸, 측면 2칸의 초익공 5량가 건물로 두 짝의 판문이 나 있으며, 상부에 홍살을 달았다. 남신문, 동문과 달리 임진왜란 후 광해군 때 재건 당시의 건물로 추정되며, 남문·동문과 달리 기둥에 약한 배흘림이 있다.

신문을 들어서면 동서 109m, 남북 69m가 되는 넓은 묘정 월대가 펼쳐 있다. 이 공간은 제관들이 제사를드릴 때 대기하는 공간으로, 헌가(軒架)가 자리잡는 공간으로 사용된다. 묘정 월대는 단(壇)의 일종인데, 지면으로부터 단을 높여 다른 공간과 성격이 다르게 천상(天上)으로 이어지는 공간임을 암시한다. 궁궐의 정전 앞에 돌로 깔고 단을 올리지 않은 것과 대조가 된다. 묘정 월대의 중앙에는 남북을 잇는 신로(神路)가 신문에서 상월대 아래까지 연결되어 있다. 신로와 접한 동쪽 한 곳에는 전(塼)을 깐 방석 모양의 부갈위판(簿喝位版)을 두었고, 동문 밖과 동월랑 남쪽 아래 묘정에는 사각형으로 된 전하판위(殿下版位)와 세자판위(世子版位)가 각각 자리를 달리하며 위치하고 있다. 묘정 월대는 장대석으로 쌓아 끝을 두르고, 그 상면은 박석을 깔았고, 신로는 전(塼)을 깔았으며, 곳곳에 차일(遮日) 고리가 박혀 있다.

상월대 위 기단에는 길이가 101m인 정전 건물이 서 있는데, 정전은 매 칸마다 신위를 모신 감실 19칸, 그 좌우의 협실 각 2칸, 그리고 협실 양끝에서 남으로 직각으로 꺾여 나온 동·서 월랑 5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묘정 월대 남쪽 아래에는 동·서에 공신당(功臣堂)과 칠사당(七祀堂)이 각각 서 있고, 서북쪽 뒤에는 제향후 축(祝)과 폐(弊)를 불사르는 망료위(望燎位)라고도 하는 예감이 있으며, 동문 북으로 수복방(守僕房)이, 둘레담 밖 서북쪽으로는 전사청(典祀廳)과 제정(祭井)이 있다. 그리고 정전 서남측으로는 악공청(樂工廳)이 있고, 정전 서측 북으로는 영녕전 일곽이 있다.

기단은 장대석 바른층쌓기로 하였으며, 그 위에 주좌(柱座)를 둥글게 다듬은 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웠다. 전면 반 칸은 퇴(退)로 모두 개방하였고, 기둥 위에는 주두를 놓고, 이익공으로 결구하였으며, 처마는 홑처마에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툇간과 각 실은 바닥은 강회다짐이고, 천정은 넓게 방형으로 귀틀을 짜고 그 위에 판장으로 천장을 설치해서 칸이 넓은 우물천장이 되었다. 측면과 벼면은 모두 전으로 두껍게 벽체를 쌓았으며, 처마는 홑처마에 지붕은 맞배지붕을 이루었다. 용마루와 기타 마루에는 양성을 하고, 취두(鷲頭)와 잡상(雜像)들을 늘어놓아 장식하였다.

정전 전면(前面)은 각 칸마다 두짝씩 판문(板門)을 달아 안으로 열고 닫히도록 하였으며, 중앙 칸에는 밖으로 빗장을 달았다. 문하방 좌우에는 신방목이 있고, 신방목 머리에는 삼태극이 조각되어 있다. 문 외부에는 발을 칠 수 있게 되어 있어, 제향 때에 판문을 열고 발을 널어뜨리고 제의를 행한다. 내부는 전체를 벽체로칸막이를 하지 않고 하나의 공간으로 되어 있으며 후퇴칸에는 각 칸마다 신주를 모신 감실을 두었다. 감실에는 신주가 서측에 왕, 동측에 왕비의 위치로 봉안되어 있고, 감실 전면에는 신탑(神榻)이 있어 제향 때 신주를 모시도록 했다.

종묘 정전 감실은 서측을 상(上)으로 하여[以西爲上] 제1실인 서쪽 첫번째 칸에 태조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동쪽으로 차례로 태종(3대), 세종(4대), 세조(7대), 성종(9대), 중종(11대), 선조(14대), 인조(16대), 효종(17대), 현종(18대), 숙종(19대), 영조(21대), 정조(22대), 순조(23대), 문조(추존), 헌종(24대), 철종(25대), 고종(26대), 순종(27대)과 각 왕의 비(妃)를 합쳐 모두 49위의 신위가 19감실에 모셔져 있다.

종묘 일곽은 사적 제 125호, 정전은 국보 제 227호로 지정되어 있고, 종묘는 1995년 12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정기총회의 정식 의결을 거쳐 종묘제례와 더불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종묘제례는 조선시대에는 종묘 정전에서 매년 봄 · 여름 · 가을 ·겨울과 섣달에 날을 잡아 5대향(五大享)을 지냈으나, 1971년 이후로는 전주(全州) 이씨(李氏) 대동종약원(大同宗約院)에서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한 차례 올리고 있다.

이건 좀 긴 동영상이다. 서울시인터넷방송이라는 싸이트에서만들어놓은 것인데 민족문화원 교수가관람객에게 해설을 해주듯 만들어놓았다.


문화재청 종묘관리소 홈페이지가 따로 있더라. 여기에는 또이 나름대로홍보동영상을 만들어놓은 것이 있는데 이번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거라며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놓은 것이다.(요거, 재미있다. ㅎㅎ) 아무튼 여기 종묘에 대해서는 벌써 동영상 자료만 셋이나 된다. 다른 건축물들도 다 이렇게 영상 자료로 볼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말이다.(종묘에 대해서는 이 밖에도 플플래쉬 프로그램으로 되어 있는 것들도 몇 개를 더 봤는데 더 봤는데, 그건 퍼올 줄을 몰라 퍼오지는 못했다.)


(퍼다놓으니까 이 동영상은 여기에서는 실행이 안 되나 보다.링크해 놓은 페이지로 들어가면 볼 수 있다.)

종묘 정전은 지금껏 어느 건물을 살필 때보다 동영상도 많고 하여 직접 가본 듯 간접으로 느낄 수 있었는데 어느 블로거가그곳의 구석구석을 사진으로 잘 담아놓은 것이 있어 다시금한 장 한 장 확인하며이리 옮겨놓았다. (옮겨온 곳 -여기

종묘

종묘는 조선왕조의 왕과 왕비, 그리고 죽은 후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다. 종묘는 본래의 건물인 정전과 별도의 사당인 영녕전을 비롯하여 여러 부속건물이 있다.

태조 3년(1394)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에 완성되었다. 태조는 4대(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추존왕을 정전에 모셨으나, 세종 때 정종이 죽자 모셔둘 정전이 없어 중국 송나라 제도를 따라 세종 3년(1421) 영녕전을 세워 4대 추존왕의 신위를 옮겨 모셨다.

정전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08년 다시 지었고, 몇 차례의 보수를 통해 현재 19칸의 건물이 되었다. 정전에는 19분의 왕과 30분의 왕후를 모시고 있다. 영녕전도 임진왜란 때 불에 타 1608년 다시 지었다. 현재 16칸에 15분의 왕과 17분의 왕후 및 조선 마지막 황태자인 고종의 아들 이은(李垠)과 부인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 앞 뜰에는 조선시대 83명의 공신이 모셔진 공신당이 있고, 중요무형문화재인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이 전해진다.

종묘는 동시대 단일목조건축물 중 연건평규모가 세계에서 가장 크나, 장식적이지 않고 유교의 검소함이 깃든 건축물이다. 중국의 종묘가 9칸인데 비해 19칸의 긴 정면과 수평성이 강조된 건물 모습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독특한 건축물이며, 동양 고대문화의 성격과 특징을 연구하는데 필요한 귀중한 자료가 담긴 유산이다. 종묘의 정전과 영정전 및 주변 환경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종묘 제례와 음악, 춤의 원형이 잘 계승되어,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천원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종묘의 외삼문(정문)을 통과하니 좌측에는 작은 연못이 있고 우측에 세계문화유산에 종묘가 등록되었음을 알리는 석판이 있다.



종묘제례악 : 종묘제례를 올릴 때에는 그 제례를 장엄하게 하기 위해 종묘제례악을 연주하는데 음악은 편종, 박, 축 등 다양한 전통악기로 연주된다. 이 종묘제례악은 조선시대의 기악 연주와 노래, 춤이 어우러진 궁중 음악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1호,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

깔끔하게 다듬어진 산책로 앞에 망묘루가 아름답게 보인다.

망묘루(望廟樓) : 왕이 제향시 이곳에 들러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을 추모하고 나라와 백성을 돌보고자 마음을 가다듬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을 가진 건물이다.

공민왕 신당 : 고려 제31대 공민왕과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정식 이름은 '고려공민왕영정봉안지당(高麗恭愍王影幀奉安之堂)이다. 공민왕은 밖으로 원나라를 물리쳐 나라의 주권과 영토를 되찾고 안으로 개혁정치를 폈으며 개인으로서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임금이었다. 공민왕이 친히 그렸다고 하는 말 그림도 사당 안에 있다. 조선왕조 최고 사당인 종묘에 고려의 왕을 모셨다는 점이 특이하지만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망묘루 앞쪽의 연못


향대청(香大廳) : 제례에 바칠 향, 축문, 폐백을 보관하고 제례를 주관하는 제관들이 대기하던 곳이다. 또한 제례에 종사하는 집사청(執事廳)도 딸려 있다. 정면 9.5칸의 긴 건물이며 앞에는 행각이 놓여 있어 남북으로 긴 뜰이 만들어졌다.

대청(香大廳)은 제사 전날 궁궐에서 왕이 친히 전한 향, 축문, 흰 모시의 폐백을 보관하는 곳이자, 제사에 참여하는 현관과 집사자들이 머물면서 재계(齋戒)를 하는 공간으로 사실상 종묘제례(宗廟祭禮)를 준비하는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

* 부묘 : 부묘란 왕이 돌아가시고 27개월이 되면 좋은 날(吉日)을 택하여 혼전(魂殿)에 모셨던 신주(神主)를 종묘로 옮겨서 모시게 되는 의식을 말한다. 이러한 부묘 의식은 부묘도감이 담당한다. 부묘 하루 전에는 정전(正殿)에서 옮겨 갈 신주를 영녕전으로 미리 옮기고부묘 당일에는 정전에 봉안할 신주를 혼전에서 종묘로 옮겨 왕의 신주는 서쪽에, 왕비의 신주는 동쪽에 봉안한다. 부묘에는 왕의 시책(諡冊)과 시보(諡寶)도 함께 올리며 배향공신(配享功臣)의 위패도 공신당에 봉안한다.

* 신실과 신주(神室, 神主) : 종묘에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봉안한 곳이 신실이다. 종묘가 건물은 같이 쓰고 그 안에 실만 따로 하여 여러 신위를 모신 동당이실(同堂異室)이었기 때문에 각 실 사이에 발을 내려뜨려 신실을 구획하였다. 신주는 죽은 사람의 혼을 상징하는 신체(神體)로 신실 중앙 뒤쪽의 신주장(神主欌)에 모셔지는데 왕은 서쪽에 왕비는 동쪽에 위치한다. 신주는 윗면이 둥글고 아래면이 네모난 직육면체로 상하사방에 혼이 드나드는 규(竅)라는 구멍이 있다. 신주 앞면에는 왕의 묘호(廟號), 존호(尊號), 시호(諡號) 등이 세로로 쓰여진다.

신주장 앞에는 높은 형태의 평상인 신탑(神榻)이 있고 그 위에는 제례 때 신주가 의지하도록 놓은 의궤(倚机)가 있다.

신주장 서쪽에는 금책, 옥책, 죽책을 넣어두는 책장과 동쪽에는 금보, 은보, 옥보를 보관하는 보장(寶欌)이 있다.

* 종묘의궤(宗廟儀軌) : 종묘의궤는 숙종 23년(1697)에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바탕으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및 여러 문집 등에서 종묘제례 관련 내용을 채록하여 정리한 종묘관련 종합보고서이다. 조선시대 종묘의 역사와 내용을 알기 쉽게 종묘전도(宗廟全圖)를 비롯하여 종묘제례에 사용하는 제기, 제복, 악기 등을 그림으로 그리고 종묘의 창건 및 중건 등의 여러 사항을 연대순으로 정리하였다. 태조에서부터 숙종까지 정리한 4책의 종묘의궤 원편(原編) 이외에 이후 새로운 종묘제례 관련 내용을 보충한 종묘의궤속록은 영조 17년에 2책, 순조 19년에 1책, 헌종 8년에 2책이 편찬되었다.

* 조선시대 의궤(朝鮮時代 儀軌) : 의궤는 조선시대 왕실이나 국가에 큰 행사가 있을 때 후세에 참고하도록 행사의 경과 내용, 소요 물자, 의식 절차 등을 기록해 놓은 일종의 보고서이다. 의궤 제작은 의궤청이 담당하는데 국가 행사가 끝나면 임시 담당 부서인 도감(都監)에서 국가전례를 관장하는 부서와 서울과 지방의 각 사고에 나누어 보관하였다.

감실과 신주


향대청에서 한참을 머물다 이젠 재궁을 향한다.

측면이 보이는 곳이 어재실, 정면으로 보이는 곳이 어목욕청, 벽면만 보이는 곳이 세자재실이다.

재궁은 왕이 세자와 함께 제례를 올리기 전에 목욕재계하고 제례를 준비하던 곳이다. 임금과 세자는 재궁 정문으로 들어와 머물면서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한 다음 서문으로 나와서 정전의 동문으로 들어가 제례를 올렸다.



전사청(典祀廳) : 제례를 치를 때 음식을 마련하는 곳으로 평소에는 이곳에 제사용 집기들을 보관하였다. 'ㅁ'자 모양의 건물로 마당에는 음식을 마련하던 돌절구들이 남아 있다.

우물 안의 모습

제정(祭井) : 전사청 동쪽에 있는 제사용 우물

전사청과 천막단 : 제사에 바칠 음식을 상에 올리고 검사하던 곳

정전의 담장과 역대 왕의 공신의 신위 83위가 모셔진 사당 공신당의 지붕이 녹음 속에 짙게 보인다.




정전(正殿) 국보 제227호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임금의 신위를 모신 곳으로, 정전은 종묘의 중심 건물로 영녕전과 구분하여 태묘(太廟)라 부르기도 한다.

정전은 조선시대 초 태조 이성계의 4대조(목조, 익조, 도조, 환조) 신위를 모셨으나, 그 후 당시 재위하던 왕의 4대조(고조, 증조, 조부, 부)와 조선시대 역대 왕 가운데 공덕이 있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하는 곳이 되었다. 종묘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지내는 사직단과 함께 국가에서 가장 중요시한 제례 공간으로, 그 건축 양식은 최고의 격식을 갖춘다.

정전 뒤뜰


칠사당 : 정전 담장 안 서남쪽에 하월대 아래 있는 맞배지붕의 3칸 짜리 작은 집으로 왕실의 제례과정에 관여하는 일곱 신(운명을 주관하는 "사명", 집의 문을 관할하는 "사호", 아궁이를 관할하는 "사조", 지붕을 관할하는 "중류", "도성의 문을 지키는 "국문", 형법과 사형을 담당하는 "공려", 국왕의 여행길을 지켜주는 "국행")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정전을 나선다.

영녕전의 모습이 보인다.




바닥 여러군데에 이런 문고리에나 있을 법한 손잡이가 박혀 있다. 이것의 용도는 무엇인지? 영녕전은 정전과 더불어 종묘의 중심 영역을 차지하는 건물이다. (차일(遮日) 고리라는 것이라고 함)

영녕전은 정전과는 달리 가운데 태실의 4칸 지붕은 높게, 좌우 태실 6칸은 이어붙이듯이 낮게 지어졌다. 가운데 태실 4칸은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모신 곳으로 종묘의 시작이다.

영녕전 지붕 위의 잡상

정전은 19실, 이곳 영녕전은 10실이다.

영녕전 문을 나서면 오솔길이 이어진다. 이곳은 창경궁으로 가는 길이다.

창경궁과 종묘를 이어주는 다리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원남동 방향의 도로의 모습

창경궁에서 종묘를 바라보며

악공청


하마비(下馬碑) : 종묘하마비는 종묘를 지나는 사람은 신분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존경심의 표시로 말에서 내리라고 세운 비석이다. 1413년(태종13년) 2월 예조의 건의로 종묘에 이르러서는 모두 하마하도록 항식(恒式)을 삼았다. 이 하마비는 1663년(현종4년) 10월에 세운 것으로서 전면에는 '대소 인원은 이곳에 이르러서 모두 말에서 내리라'고 쓰여 있고 비신(碑身)은 높이 132cm, 너비 58cm, 둘레 20cm이다.


어정

'굴 속의 시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답사 준비  (2) 2010.03.03
평면배치 양식의 구조 6  (2) 2010.03.02
평면배치 양식의 구조 5-2  (2) 2010.03.02
평면배치 양식의 구조 5-1  (0) 2010.02.26
평면배치 양식의 구조 4  (0) 2010.02.26
Posted by 냉이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