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답사 4

굴 속의 시간 2010. 3. 12. 03:12

창경궁을 다 보고 나서는 바로 종묘 쪽으로 움직였다. 가는 길에는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창덕궁의 낙선재가 보여 다들 창덕궁이 정기휴일인 것을 아쉬워했는데 어쩔 수가 있나. 아무튼 나는 창경궁, 창덕궁이 대충 가까이에 있다는 정도만 알았지 이렇게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로 붙어 있다는 것도 이제야 처음 알았다. 게다가 종묘 또한 바로 이어진다는 것도 말이다. 그런데 뭐라더라 일제 때 지맥을 끊으려고 창경궁과 종묘 사이에 길을 내놓는 바람에 지금은 육교를 건너 넘어가게 만들었다던가. 실제로도 우리는 창경궁을 나가 자동차들이 씽씽 달리는 도로의 육교 위를 걸어 종묘로 들어갔다. 애초 종묘를 지을 때는 응봉자락을 따라 흐르는 산줄기의 지맥이 창덕궁과 창경궁을 거쳐 흘러 들어온 곳에 자리하게 했다는데, 아무튼 그 시절 일제에서 참 못된 짓 많이 했다. 다행히 그 길(율곡로)를 덮고 창경궁과 종묘를 잇는 복원작업이 시작되어 내후년에는 완공될 거라 하니 그 때 다시 가보면 느낌이 또 다르려나 모르겠다.


어쨌든 창경궁에서 이어진 길로 해서 종묘를 들어가게 되니 청문인 외대문을 지나 들어가는 방향과는 거꾸로 살피며 내려오게 되었다. 정문에서 보자면 영녕전 일원이 가장 서북쪽 끝일 텐데, 거꾸로 영녕전부터 본 뒤에 정전을 보고 전사청 일원, 재궁 일원, 향대청 일원을 보며 내려왔으니 말이다. 여기가 영녕전. 세종 때 들어 정전의 신실이 모자라게 되면서 정전에 모시고 있던 신위들을 다른 곳에 옮겨 모시기 위해 새로 지은 별묘라 했다. 모습은 정전과 비슷하지만 정전보다는 규모가 조금 작다. 가운데 네 칸에 태조의 4대 조상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비를 모셨고, 좌우로 협실 각각 여섯 칸이 있다. 이 사진들은 영녕전을 보면서특히 동익사는 개방된 모습으로, 서익사는 담장을 둘러 폐쇄된 형식이라는 걸 다시금 확인하며 찍은 거였다.

영정전을 둘러 나오다가 측면과 뒷면을 보았는데, 바로 그 주에 배운 방화벽이라는 담장 형식을 확인하게 되어 사진으로 찍어보았다. 목조 건축물은 언제나 화재의 위험에 크게 노출되어 있고, 실제로도 화재로 인해 소실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 나온 것이 방화벽이라는 것. 방화벽 가운데 창문을 낼 수 있게 하고 반쯤만 돌로 쌓은 것을 단방화벽, 창문 따위조차 아무 것도 없이 끝까지 돌로 담장을 쌓은 것을 장방화벽이라 했는데 영녕전의 측면과 후면이 장방화벽으로 되어 있었다. 수업시간 교수님은 이 종묘의 정전과 영녕전 측, 후면 벽이 장방화벽으로 되어 있다 설명을 하면서 화재의 위험을 고려하는 한 편 실내를 어둡게 하여 좀 더 신성스러운 공간으로 만들려는 의도도 있었을 거라 설명하기도 했는데그런 게 떠오르기도 했다.

영녕전에서 나와 남동쪽으로 조금만 내려오면 바로 종묘의 정전 일원으로 들어서는 작은 문이 나온다. 그 문으로 들어서면 정전의 서익사와 정전의 서측벽이 보이게 되는데, 그렇게 들어서자마자 보게 된 서익사의 벽면을 보다가 무슨 기단을 저리높이 쌓았나 싶어 사진을 찍어두었다. 그런데 나중에 확인해보니 그것은 장대석 삼단으로 기단을 두껍게 쌓은 것이 아니라월대의 높이에 맞추어 그 위에 건물을 올리다보니 측면에서 봤을 때 그리 보였던 것이다.

가던 길에 멈춰서서 정전의 측면과 뒷면을 먼저 보았는데 역시벽돌을 끝까지 쌓아올린 장화방벽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쓰인 벽돌은 왠지 그 옛날의 것이 아닌 것만 같은데 글쎄잘 모르겠다.

건물의 전면으로 돌아오면서 아까 의아하게 보았던 기단부를 다시금 확인하느라 찍은 사진이다. 이 때까지만 해도 계속 무슨 기단을 이리 높게 쌓았나, 하는 의아함을 풀지는 못하고 일단 사진으로 찍어가야겠다 하며 찍었던 것 같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기둥의 초석이라 할만한 것이 기둥 놓이는 자리에서는 장대석을 아예 초석부분까지 하나로 깎아 받쳐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장대석 위에 초석이 놓인 것이 아니라 그 부분들은 초석과 기단장대석이 하나라는 거.


정전의 전경이다. 박석을 깔아놓은 넓은 마당이 있고, 월대가 있고, 열아홉 칸이나 되는 긴 정전 건물이 있다. 그 양옆으로 협랑이 있고, 동서쪽에 익사들이 있다. 영녕전에서처럼 동익사는 개방형, 서익사는 폐쇄형으로 말이다. 그런데 칸 수를 세다가 잠깐 헷갈린 것이 영녕전에서는 가운데 태칸이 넷이었고, 협칸이 양쪽으로 여섯 개씩이라면 정전은 그러한 구분 없이 열아홉 칸 건물에 협랑이라 해야 할지, 협칸이라 해야할지 하는 것이 따로 이어붙어 있다. 아마 그것은 동서익사에서 정전으로 이어지는 복도 같은 개념의 협랑이 아닐까 싶은데 크게 중요하달 것은 없겠으나 이건 다시 확인해봐야겠다.

동익사에 와서 다시금 기단이 왜 이래 높은가를 보다가 비로소 알게 되었을 거다. 정전 건물의 월대와 높이를 맞추느라(똑같지는 않고 한 단 정도 낮아지기는 하지만) 그랬구나 하는 걸 말이다. 또한 여기에 와서야 익사들의 주초가 월대 장대석과 하나로 되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말이다.

익사 건물은 이처럼 간소하게 이익공에 홑처마 지붕이었고.

정전을 나오기 전에 다시 한 번 뒤돌아 살펴보다가 전돌로 깔아놓은 넓은 마당 측면부에 이처럼 배수구가 하나씩 보이는 게 눈에 들어오기에. (실은 제문을 태우는 뭐라고 해야 하나, 화로랄까 하는 것이 어디에 있나 찾다가 안 보인다 싶었는데, 정전의 건물 서북뒷편에 굴뚝처럼 되어 있던 게 그거였다는 게 뒤늦게 생각났다. 이 건물은 온돌을 쓰지 않으니 그게 굴뚝일 리는 없을 테고, 사진기로 담지는 못했으나 거기에 있던 걸 보기는 했다.

정전 건물 바깥으로 나오면 '전사청' 일원이 있다. 말하자면 여기는 제사에 쓰는 음식을 준비하는 공간인데, 네모난 마당 둘레에 ㅁ자 모양의 건물이 있다. 정전 동문 옆에는 '수복방'이라 하여 종묘를 지키는 관원들이 머무는 숙소가 있고 그 앞에 '찬막단'이라는 단이 있는데 거기에서는 제사에 바치는 음식을 미리 검사하는 곳이라 한다. 찬막단 뒤로는 그보다 조금 작은 단이 있는데 그것은 '성생위'라 하여 제사에 쓸 제물(소나 돼지, 양)을 검사하는 거라 했다. 전사청 동쪽에는 제사에 쓰는 우물인 '제정'이 따로 있기도 했다.

전사청 둘레를 둘러보고내려가다 보면 재궁 일원이 나온다. 왕과 세자가 제사를 올리려 종묘에 들어와 머물면서 제사를 준비하는 곳. 어재실은 왕의 공간, 세자재실은 세자의 공간 그리고 어목욕청이라 하여제사를 하기 전 목욕재계를 하는건물도 한 켠에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재궁 일원도 지나 더 내려오다 보면 향대청 일원이 나오는데 이 역시 제사 전날 왕이 제례를 준비하는 공간이다. 제례에 쓸 향과 축문, 폐백과 제사 예물 같은 것을 보관하는 곳이고, 이 향대청 건물 남쪽으로는 망묘루라는 누각 건물이 있고, 그 뒤쪽에 공민왕 신당이 있다.


여기가 공민왕 신당의 내부이다. 강의 시간에는 평사량가 건물을 배우다가 교수님이 나름 긴 시간에 거쳐 이 공민왕 신당에 대해 소개해주었는데, 직접 보니 정말 해도해도 너무했구나 싶다. 아예 짓지를 말지. 아무튼 조선왕조를 건국하고 나서 이 유학의 나라는 자신의 가장 큰 핸디캡이 역성혁명을 했다는 거였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신하와 백성에게 충을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 말할 수 있겠나. 그러니 어떻게든 고려의 법통을 이었다 하는 것을 내보이기 위해 종묘 안에 공민왕 신당을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데, 만들려면 제대로 만들지……. 왕도 아닌 태조의 4대조들은 정전에 모셨다가 영녕전으로 옮겨 모시고 했으면서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민왕의 사당은 보이지도 않을만한 구석진 자리에 겨우 한 칸 한 칸의 초라한 건물을 지어놓고 이렇게 신당이라 했다. 게다가 이 건물에는 종도리가 없는 평사량가 건물로 그야말로 아주 천대를 하여 지은 건물이라는 걸 단박에 느끼게 해준다. 사진에서도 보이는 것처럼 천정에 보이는 도리라는 것이 아무 층 없이 나란히 놓여 있다. 그러니 서까래라는 것도 물매없이 평평하게 놓여 있다. 바깥에서 보기에 물매가 있는 맞배지붕일 수 있는 것은평평한 지붕 위에 적심을 채워종도리가 있는 것처럼 가짜로 꾸며놓았을 뿐이다. 같이 간 분들도 이 신당을 보면서 혀끝을 차면서 명박스럽게도 해놨다며…….


바깥에서 보면 이러한 모습. 박공이 없더라면 도리들의 뺄목으로 어떻게 나란히 놓여 있나 확인할 수도 있었을 거다. 아무리 봐도 뭔가 건물을 짓다만 것 같은 느낌, 전면에서 봤을 때 옆으로 조금 더 길게 나가야 할 것 같은데 그대로 뚝 끊어놓은 것 같은 모양새다. 게다가 저 기와를 들어내고 나면 그 안에는 종도리라 할 것도 없이 그대로 적심으로만 채워져 있는 평사량가 건물이라니. 아무리 작은 민가라도 우리 가구구조는 홀수량가로 짓는 것이 보통인 것인데…….

아무튼 이렇게 하여 종묘 답사를 마치고 나왔다. 바깥으로 나오니 할아버지들이 다들바둑판 앞에 모여 서 있더라. 여기저기에서 내기 바둑들이 벌어지고, 바둑두는 사람보다관중들이 더 많은. 아마 훈수를 뒀다간 큰일이라도 날 분위기.

아직 날이 어두워지기에는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이제 방향을 어떻게 잡을까 했다. 동쪽으로 지하철 하나만 더 가면 동묘와 흥인지문을 볼 수 있을 테고, 다시 서쪽으로 가면 사직단을 보거나 그 근처로 해서 환구단 같은 것을 볼 수 있겠는데. 덕수궁에도 안에는 들어갈 수야 없지만 중요한 문루 건물인 대한문은 바깥에서나마 볼 수 있으니 사직단부터 하여 환구단, 덕수궁의 대한문을 보기로 하고 그리로 방향을 잡았다.좋기는 하다만도조금은 정신이 없기도 했다. 준비를 해야지, 해야지 하는 부담만 있었을 뿐 제대로 준비를 못하고 나갔으니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들을 눈에 담고 있어. 따로 답사 수첩이나 노트를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건물들에 대한내용을 살펴보기는 했고, 더구나 함께 다니는 분들이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기는 했다.그야말로 혼자 나왔다가는 눈만끔벅끔벅 길 잃은 아이처럼 돌아다녔을는지도 몰라.아무튼 이렇게 서울 구경 한 번 제대로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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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냉이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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